〈 52화 〉 [51화]역전 청문회
* * *
도미닉 경은 머슬만 의원이 말한 날아다니거나, 깨지고 부서져도 당황하지 말라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스텟을 먼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발언권 없는 이가 발언해도 되는 겁니까? 의장님! 저 의원에게 경고를!"
"발언권은 자신이 쟁취하는 것! 듀얼이다!"
"오냐, 오늘이야말로 내가 네 듀얼 중독을 고쳐주마! ←↙↓↘→ ⓐⓑ!"
말 그대로, 의원들이 날아다니고, 의원들의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서지는 난투가 시작된 것이다.
"정신이 없지요? 이렇게나 정신없어 보여도 할 건 다 한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어느샌가 나타난 머슬만이 도미닉 경의 팔을 잡고 혼잡한 난투 속을 지나갔다.
머슬만이 이끄는 대로 온 장소는 바로 의장석 뒤편이었다.
"왔소? 그럼 다 왔구만."
의장석 뒤편은 마치 성벽이나 첨탑과 같아서 청문회장과 격리된 장소였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의 숫자를 세어본 의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왜 여기에 절 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붉은색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도수가 높은 안경을 낀 더벅머리의 청년이 말했다.
그는 더욱 유혈이 비산하는 청문회장의 모습에 입장한 지 10분 만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진 모습이었다.
"그, 전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대표께서는 겸손하시군.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이 할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을 검증하는 것뿐이오."
"모르가나 회장도 마찬가지요. 당신이 준 정보로 우리가 여기까지 계획을 짤 수 있었소.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뭐, 도를 넘긴 했으니까. 그리고 블랙이라고 부르세요. 친근하게 모르가나라고 부르지 말고."
여기 있는 이들은 도대체 왜 모였을까?
도미닉 경은 지금 상황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잠깐 시간을 뒤로 돌려, 도미닉 경과 머슬만의 대화가 있던 때로 돌아가 보자.
"부디, 탱커의 부흥을 위해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머슬만은 손을 내밀었다.
도미닉 경은 그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손에는,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일단 거절하세요. 도청당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 말을 듣고 있어요.'
도미닉 경은 그 손을 잠시 바라보며 글자를 읽었다.
머슬만의 말에 반쯤 넘어간 도미닉 경이었기에 일단 끝까지 머슬만의 계획에 따르기로 하면서.
"아쉽게도 힘들 것 같소. 아직 내게 가차랜드는 버거운 곳이거든."
도미닉 경은 최대한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어미가 약간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버거운 곳이거든'이 아니라 '버거운 곳이오.'라고 했어야 하지만 다행히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머슬만은 다시 손을 회수하며 아쉬운 척했다.
"그렇습니까... 아쉬운 일입니다. 혹시 마음이 바뀌시면 찾아오세요."
머슬만은 반대편의 손을 들었다. 그곳에는 '가는 길에 설명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도청기가 있던 방을 나온 둘은 미로처럼 얽힌 복도를 빙글빙글 돌며 작게 대화를 시작했다.
"트롬은 도를 넘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인지도를 쌓았지만, 그는 엉뚱한 공략으로 가차랜드에 혼란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어요."
그게 의도한 것이든, 아니면 그의 편집증적인 망상에서 비롯된 우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라고 덧붙인 머슬만은 골목을 확인하며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가차랜드가 엉망진창에 소위 '망겜'이라고 불리는 건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가차랜드가 기본을 잊은 건 아닙니다."
"기본?"
"재미있을 것. 게임답게 즐길 수 있을 것."
머슬만이 멋진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부분의 의원들은 그 사실을 지키면서 자기 이득을 챙깁니다만, 트롬은 그렇지 않죠. 그는 그저 가차랜드를 도구로 보고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투영할 도구."
"게임에 욕망만 가득하다면... 특히 가차랜드처럼 무작위성이 강한 곳에서 욕망만 챙긴다면, 그건 게임이 아니라 도박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트롬을 무작정 제재할 수는 없습니다. 트롬은 딜러들의 지지로 당선되었고, 자극적인 공략으로 무지성 딜러들의 지지가 견고하니까요. 그러나 정작 딜러에 대해 깊은 이해도를 가진 이들은 트롬을 못마땅하게 보는 것도 현실입니다."
"저희는 트롬을 제재할 방법이 필요했고, 마침내 트롬이 싫어할 만한 사람이면서 사람들에게 인지도가 높아진 이를 찾았죠. 당신 말입니다."
머슬만은 골목을 돌 때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연기하며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도미닉 경은 한 번에 쏟아지는 정보에 정신이 없었다.
그의 주특기는 전쟁이지 정쟁이 아니었다.
지휘관이 아니라 기사였던 탓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는 정치에 대해서 매우 무지했다.
그런 도미닉 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슬만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당신 덕분에 저희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트롬이 스스로 그렇게나 멍청하게 굴 줄은 몰랐죠. 이번 기회에 트롬은 저희가 만든 덫을 밟고 몰락할 겁니다."
까지 말한 머슬만은 문득 말이 없어진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는 표정, 그리고 오늘 저녁 뭐 먹지? 라는 표정이 합쳐진 기묘한 표정으로 머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흠흠. 아무튼, 가차랜드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선, 당신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뜻입니다."
머슬만은 바로 말을 끊었다. 아무리 설명해도 도미닉 경이 이해할 것 같지 않았다.
대신 머슬만은 진실성 있는 말 하나를 도미닉 경에게 내밀었다.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난 또 뭐라고."
도미닉 경은 드디어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미끼가 되어 달라는 말 아니오."
머슬만은 좀 더 순화해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도미닉 경의 말이 맞았다.
"그런 일은 내 전문이지. 맡겨 주시오."
도미닉 경은 너무 쉽게 수락했다.
얼마나 쉽게 수락했던지 머슬만이 도미닉 경을 설득할 마흔 가지 방법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머쓱해 할 정도였다.
그러나 도미닉 경도 무작정 수락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도미닉 경은 기사였다. 그에게 기사란 다른 이들의 도움 요청에 반드시 응해야 하는 이들이었다. 그 부탁이 악에 대한 징벌이라면 더더욱.
무엇보다도 농노 출신이던 도미닉 경은 다른 이들의 '부탁'을 자주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도미닉 경은 여전히 기사였고, 눈앞의 악을 같이 부수자는 도움 요청을 받았다.
도미닉 경이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한 이상, 머슬만의 제안은 도미닉 경이 반드시 수락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직까지 페럴란트의 관행을 벗어던지지 못한 도미닉 경은 그런 이유로 이 일을 수락했다.
도미닉 경은 행복해졌다.
"그래서, 내가 무엇하면 되며, 어떤 이들이 우릴 돕소? 계획은 어찌 진행되는 것이외까?"
도미닉 경은 이렇게 된 이상 더욱 깊은 곳까지 정보를 캐내기로 마음먹었다.
머슬만은 열정적인 도미닉 경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나 화끈하게 자신들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감사를 표하며 협력하지는 못할망정 이를 의심하고 경계하는 건 탱커의 도리가 아니었다.
"계획은 이렇습니다"
머슬만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계획에 대해 상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머슬만, 그도 탱커의 도리를 지킬 줄 아는 남자였다.
...
트롬이 떠난 의원 대기실.
남아 있던 보좌관은 도청장치의 음성파일을 백업한 뒤 장치를 정리했다.
'장치는 절대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해. 알았어?'
트롬의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보좌관은 트롬의 말대로 눈에 띄지 않게끔 무난한 상자에 옷가지를 담아 그 사이에 도청장치를 숨겼다.
누가 그 가방은 뭐냐고 물어도 의원님을 24시간 보좌하려고 가지고 다니는 옷이라고 둘러대면 될 일이었다.
보좌관은 의원 대기실을 나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청문회가 끝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안건은 하나였지만, 보좌관은 어디서 들은 말이 있었기에 정말 오랫동안 저 문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행정부 건물을 빠져나온 보좌관은 트롬의 의전용 차량이 있는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여기쯤이었지."
보좌관은 의전용 차량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의전용 차량에 가방을 챙기는 대신 그 자리를 지나쳤다.
"정말이지, 의원이란 이들도 엉성하다니까. 그토록 오랫동안 같이한 보좌관이 이상하다는 걸 못 알아차리고 말이지."
보좌관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보좌관이 자기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댄다.
어디선가 날아온 동양풍 그림이 가득한 보라색 천이 보좌관의 모습을 가렸다.
행정부의 불빛에 비춰진 그림자가 움직이더니, 구름으로 가득한 보라색 천이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졌다.
그러자, 그 너머에서 보좌관과는 전혀 다른 골격과 체형의... 닌자가 나타났다.
"이제 이걸 그대로 블랙 그룹 회장실로 옮기면 임무 완료란 말이지?"
닌자는 붉은 목도리를 복면처럼 올려다쓰며 자기 양복을 탁탁 털어냈다. 그리고 가방을 닌자 스쿠터에 올려놓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붉은 목도리의 끝자락이 화려하게 펄럭였다.
그 모습은 꽤나 멋있었다.
닌자가 주차 요금을 계산하려고 요금소에서 잠깐 멈추고 동전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