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44화]3지역 후일담
* * *
"이야, 지긴 했지만 참 보기 힘든 걸 봤어."
"그러니까. 뭔가 막 막막하고 그런데도 가슴 한 켠이 찡한 게 지금 생각해 보면 감격해서 그랬던 것 같아."
3스테이지의 입구에서 사람들이 만면에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나오고 있었다.
이미 타이탄 급 기함 우라노스가 전장에 강림한 순간부터 촉수의 탐구자 측의 성좌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패배를 직감했다.
거대한 질량을 가진 우주 전함이 차원을 찢고 나타난 순간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다리가 풀렸고, 우주 전함이 내려오며 만든 중력과 풍압에 주저앉았다.
전함이 하늘을 가득 채우며 해를 가리자 땅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 상황에서 탐조등들이 켜지며 지상을 탐색하는 모습은 마치 신의 은총이 이땅에 강림하는 것처럼 보였다.
[(ALL) 성좌 촉수의 탐구자가 전장을 포기합니다. 성좌 백수의 거인의 승리입니다.]
이미 승기가 넘어간 상황에서 최종병기가 강림하자, 촉수의 탐구자는 더 이상 역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항복을 눌렀다.
승부욕의 화신과 같은 촉수의 탐구자는 패배했다는 사실에 분노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백수의 거인에게 존경어린 시선을 보냈다.
사실, 촉수의 탐구자는 논란이 되는 언행과 달리 이 성좌들의 전쟁의 오랜 팬이기도 했다.
백수의 거인은 꽤 오랫동안 전쟁을 겪어온 성좌다.
촉수의 탐구자가 어느 정도 세상의 진리를 인지하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이 전쟁에서 유명한 성좌였다.
그만큼 나이가 지긋한 백수의 거인은 이미 피지컬적으로 퇴보가 일어나는 중이었고, 여전히 최고 수준의 성좌이긴 했으나 나름 만만히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티탄의 지식]은 그가 전성기 때 시그니쳐로 굳은 신의 힘이다.
초기엔 자주 쓰던 기술이었으나 피지컬이 최고조에 달한 이후엔 어지간한 라이벌 매치에서만 나왔고, 피지컬이 퇴보한 지금, 메타의 변화와 패치 노트를 통해 대부분의 전쟁이 초반에 끝나는 현 상황에서는 쓰기 힘든 기술이었다.
그런 기술이 자신과의 전쟁에서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촉수의 탐구자는 기분이 좋아진 듯 촉수의 끝자락을 뱅글뱅글 꼬았다.
지긴 했으나 어떻게 보면 자신은 명경기를 만들었다.
백수의 거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그를 이겼었다.
그리고 지기는 했으나 명경기를 만들어낸 자신은 그의 라이벌이나 다름없는 경지에 올랐다.
이 뒤틀린 팬심을 가진 성좌는 자신이 동경하던 성좌와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서, 자기 가치를 증명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두 번 연속으로 허무하게 졌더라면 이렇게까지 기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동경하던 성좌의 몰락을 비웃었겠지.
태어난 지 고작 10만 년밖에 되지 않은 이 어린 성좌는, 뒤틀리기는 했으나 여전히 백수의 거인의 팬으로 남았다.
...
"봐요. 제가 말했죠? 이번 판은 백수의 거인이 이길 거라고."
정배충들, 정신이 들어?
누구세요? 왜 내가 여기에 있지?
5252, 믿고 있었다구!
성좌 아임 낫 리틀은 중계방송을 하며 자기 시청자들과 소통을 하고 있었다.
약간의 시청 포인트 도박은 덤이었다.
성좌들에게 있어서도 백수의 거인과 촉수의 탐구자가 맞붙는 매치는 인기가 좋았다.
구세대의 레전드와 신세대의 루키.
이번 경기는 어쩌면 이벤트 매치에 가까웠음에도 공식 채널에서 중계하며 가차튜브 실시간 시청자 수 1위를 찍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수십만 명의 시청자들이 적는 광기 어린 채팅이 채팅창을 무수히 수놓았다.
"그나저나 [티탄의 지식]은 진짜 오랜만이네요. 현 메타에서 퇴물 소리듣는 기술인데, 진짜 뽕 하나는 기깔난다니까요?"
아임 낫 리틀은 몇 번이고 다시 보기를 통해 타이탄 급 기함이 나타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가차튜브는 다시 보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시간대 내에서 전장의 어디든 볼 수 있는 초차원적 녹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기에 아임 낫 리틀은 기함이 출몰하는 장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었다.
몇 번을 봐도 뽕이 차오르는 장면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아임 낫 리틀은 한 장면에서 잠시 일시 정지를 눌렀다.
"아무리 봐도 이 각도가 제일 멋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거 이미 짤 따여서 커뮤니티 돌아다니고 있음.
확실히 뽕 차기는 하더라.
"아, 그래요?"
도미닉 경이 고지대의 정상에 깃발을 꽂자 하늘을 찢으며 나타나는 거대전함.
성좌 아임 낫 리틀은 고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앵글로 도미닉 경이 깃발을 꽂는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보았다.
"이러면 더 뽕 찰것 같지 않아요?"
아임 낫 리틀이 영상을 조금 조작하자 화면의 구도가 바뀌었다.
고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각도에서 도미닉 경이 나타나자마자 도미닉 경에게 화면이 확대된다.
그리고 도미닉 경이 웃으며 깃발을 내려꽂자, 시간이 화면이 다시 넓어지며 깃발이 펄럭임과 동시에 하늘에서 화면을 뚫을 듯이 나타나는 거대 전함을 동시에 담았다.
아스트로무스 편집자 출신이라 그런지 편집 개잘하네.
리얼? 아스트로무스 편집자 출신임?
"타 방송인 언급 밴입니다. 제 방송에만 집중하세요. 지금 두 분은 30초 밴 드립니다."
두 시청자에게 밴을 한 아임 낫 리틀은 화면을 조금 더 조작했다.
고지와 거대 전함이 따로 움직인다. 조금 더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거 알아요? 요즘 제가 주로 하는 언찬트 있잖아요. 거기 나오는 해적기사가 이 사람이더라구요."
진짜로?
어쩐지 개사기더라.
초보자용 캐릭터 치곤 너무 게임이 쉬워져서 관심 없었는데 저런 사람이면 그럴 만도 하지.
시청자들이 처음 안 정보에 놀라 수군거린다.
아임 낫 리틀이 화면의 밝기를 조금 내리며 말했다.
사실, 이 작은 성좌는 언찬트 때부터 도미닉 경의 팬이 된 지 오래였으나 아직 도미닉 경이 인지도가 없던 시절에 팬이 된 지라 마이너하다고 놀림 받을까 봐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항상 언찬트를 할 때마다 해적 기사를 고르는 것으로 나름 유추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좀 아쉽네요."
뭐가?
아 뭔진 모르겠지만 방장 말이 맞음.
아임 낫 리틀이 한숨을 쉬었다.
"저코스트에 고성능. 게다가 탱커에 버퍼.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이 들어요?"
개사기다?
덱에 무조건 넣어야겠다?
당장 섭외해야겠다?
우결각?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으나 아직 아임 낫 리틀이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채팅을 보던 작은 성좌가 입을 열었다.
"우결각 누구야? 일단 밴. 제 생각을 말해보자면, 너무 가성비가 좋아요. 탱커 특성이 있어서 그렇다 쳐도 아직 제 2 특수 능력도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활약했어. 무엇보다 내일모레 뭐가 있는지 알아요?"
채팅창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아임 낫 리틀은 바로 답을 말했다.
"패치 날이야. 분명히 지금 날뛴 것 때문에 패치 청문회에 반드시 들어갈 거라고. 한 달 전부터 이랬으면 청문회 측도 꼼꼼히 분석하고 밸런스를 맞추겠지만, 시간이 없으니 분명히 심할 정도로 너프할 수도 있단 말이지."
마침내 영상을 모두 편집한 작은 성좌가 저장 버튼을 누르고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껐다.
"제가 아직 팬은 아니지만, 가차랜드를 걱정하는 한 명의 성좌로서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않을까 걱정되기는 하네요."
성좌는 걱정스럽다는 듯 화면 너머의 도미닉 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직 팬이 아니라는 말을 믿는 시청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ㄹㅇㅋㅋ" 만 칠 뿐이다.
...
"후배! 여기야."
전장이 끝나고 난 후.
도미닉 경은 휴대폰의 진동에 놀라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통화 몇 통과 읽지 않은 메시지가 몇 개 있었다.
메시지를 먼저 열어본 도미닉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장 끝나면 술이나 한잔 하자. 기사의 모닥불로 와.'
왈록의 문자였다.
마침 도미닉 경은 격한 전투를 겪은 후라서 그런지 개운함과 동시에 여전히 몸이 기억하는 전투의 짜릿함과 여운이 남은 행복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이 오묘한 감정의 흐름을 정리하려면 술로 씻어내는 것도 좋으리라.
기사의 모닥불에 도착하자, 이미 왈록은 악마의 모습에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안주로 땅콩과 오징어 다리가 가득 담긴 접시도 있었으나, 왈록은 그 안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도시락통에서 도넛을 꺼내 안주 삼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손을 흔들며 자신이 여기 있다고 주장하는 왈록에게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벌써 한 잔 마셨습니까?"
테이블에는 왈록이 든 맥주 잔 외에도 빈 잔이 하나 있었다.
얼굴이 빨개진 왈록은 웃으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간만에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말이지. 사실 다이어트 중이라 술 마시면 안 되긴 하는데, 오늘 같은 날은 마셔줘야지."
원래 전쟁이 끝나면 뒤풀이를 하는 게 정석이야. 라고 왈록이 말했다.
도미닉 경은 척박한 페럴란트에서 뒤풀이란 적의 장비를 노획하고 시체를 묻는 작업을 뜻했으나, 가차랜드의 뒤풀이는 다른 의미인 모양이라고 스스로 납득했다.
"아무튼, 한 잔 마셔. 오늘은 내가 사지. 아니지, 유명 인사에게 한 잔 얻어마실까?"
유명 인사?
도미닉 경은 왈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명 인사라는 말을 모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 어디 유명 인사가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후배, 커뮤니티에서 아주 인기던데? 여기 봐봐."
왈록이 자기 스마트폰에서 가챠튜브를 켰다.
아임 낫 리틀이라는 이름의 방송인이 올린 짧은 영상은 자신이 깃발을 꽂자 공중전함이 나타나는 것이 전부였다.
물론 가슴이 웅장해지는 배경음악이 있긴 했으나 도미닉 경은 이 영상이 무슨 상관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 구독자 수를 봐. 조회 수도."
10억 명. 120억 뷰. 도미닉 경은 순간 억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큰지 생각했다.
도미닉 경은 페럴란트에서도 백만 이상의 숫자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겨우 그 규모를 알아차린 도미닉 경의 외눈이 크게 떠졌다.
생각보다 자신이 나온 영상이 유명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나저나 큰일이군."
왈록은 바닥에 조금 남아 있던 맥주를 모두 마셔버리고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조만간 패치 노트가 나올 텐데, 분명히 네가 구설수에 오를 거란 말이지."
완전히 취해 버린 듯 꼬인 혀를 움직이며 왈록이 말했다.
이미 그의 얼굴은 악마일 때처럼 완전히 붉은색이었다.
"패치 노트?"
도미닉 경은 새로운 정보에 의문을 표했으나, 이미 술에 취해 독백 상태에 들어간 왈록은 도미닉 경의 의문에 답해주지 않은 채 자기 할 말만 했다.
"너프가 될지도 모르지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심하다 싶으면 다시 롤백하거나 버프 하기도 하고, 너프 하는 대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너무 취했나보다. 어지럽네. 혹시 네 방에서 하루 잘 수 있겠냐? 내 집은 너무 멀어서."
"...?"
도미닉 경은 왈록의 말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왈록은 그런 도미닉 경의 표정을 보더니 역시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그래? 집 없는 사람처럼 말이야."
"없습니다."
"뭐?"
"집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미닉 경은 농노 출신이었고, 페럴란트에서 농노들이 가진 집은 영주의 소유인 법이었다.
징집 되었을 때는 지정된 막사에서 살았다.
기사가 된 이후에도 주급을 받으며 지급된 막사에서 일했지, 개인이 집을 가진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왈록은 술이 확 깨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