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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44화 (44/528)

〈 44화 〉 [43화]전멸전

* * *

백수의 거인이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촉수의 탐구자는 대공세를 막느라 정신없이 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전장은 명백하게 백수의 거인 측으로 승기가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촉수의 탐구자의 뛰어난 전장 파악 능력으로 인해 예상한 것보다 진격 속도가 늦은 편이었다.

백수의 거인은 자신이 가진 카드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모두 지금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패였으나 촉수의 탐구자의 패도 만만치 않았기에 그저 유리할 뿐 효과적인 패는 아니었다.

마침내 지금 쓸 수 있는 모든 패를 살핀 백수의 거인은 본능적으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백수의 거인은 숨겨두었던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다.

히든카드는 촉수의 탐구자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숨겨둔 한 수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법이다.

...

전쟁. 전쟁은 변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변화시킬 뿐이다.

지금도 그렇다. 이 참혹한 전장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짐승들이 서로를 물고 물어뜯으며­

"스트렐치 경, 힘든 건 알겠지만 일단 싸우는 데 집중해 주시겠소? 그쪽 방어선이 뚫리고 있잖소!"

낭만 없는 놈 같으니. 스트렐치는 도미닉 경의 외침에 멋있는 장면이 될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며 투덜거렸다.

전장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평야가 폭발로 인해 야생적인 참호가 되었다.

거대한 로봇이 눈에서 레이저를 쏘아내면 땅에서 솟아오르던 촉수들이 잘려 나갔고, 박살 난 해적선에서 유령 선원들이 튀어나와 유쾌하게 웃다가 아군 드래곤이 내뿜은 화염 브레스에 쓸려나갔다.

난전 중에서도 난전.

그 사이에서 도미닉 경은 한 손에 깃발을 들어 올리고 방패를 앞으로 향한 채 고지로 향하고 있었다.

"저 기사가 고지에 깃발을 꽂으려한다! 저지해!"

"깃발 하나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아직 성급도 낮고 장비 파밍도 덜 된 녀석 같은데."

첩보대장이 다가오는 도미닉 경을 보며 경기를 일으켰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도미닉 경이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않은 어설픈 인원으로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초반부터 도미닉 경의 놀라운 활약을 보았던 첩보대장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저자는 탱커다! 성급 하나 정도는 그냥 씹어 먹는다고! 게다가 겨우 깃발이라니, 결투 상위 리그에서 깃발을 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당장 첩보대장이 아는 상위 랭커만 해도 신의 대변인과 이교도 교황과 같은 굵직한 인물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여기는 전장이었다. 인공 지능이 판치는 곳이 아니라 진짜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곳.

소위 뽕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나면 저 깃발의 효과가 어떻든 두 배, 세 배의 플라시보 효과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 사이 도미닉 경은 고지의 아래쪽에 도착했다.

적과 아군이 뒤섞여 피아를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서 도미닉 경은 중간중간 생긴 공간 사이로 파고들었다.

초반과는 그 느낌이 다르다.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도미닉 경이 현재 코스트와 성급 대비 성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었으나, 지금 전장은 더 높은 능력치와 성급을 가진 이들이 넘쳐났으니까.

지금도 그렇다.

도미닉 경의 앞으로 숲의 순찰대 의상을 입은 엘프 하나가 이단 옆차기를 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엘프의 다리 옆 가장 노출이 심한 부분을 검날로 쳐 냈으나, 상처는커녕 그저 날아오는 궤도를 빗겨낸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였다.

탱커의 장점은 지속적인 피해와 전장 장악능력이었으나 단점은 지속적이지 않으면 거의 없다시피 한 피해와 전장 장악이 불가능할 경우 무능해진다는 점이었다.

도미닉 경은 더욱 어려워진 전장의 상황에 행복했으나, 반면 날뛰기 어려워진 상황에 대한 불만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기사 이전에 전사였다.

재밌는 싸움을 원하는 건 영혼에 새겨진 후천적 본능 같은 것이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기사였다.

싸움보다는 명예와 영광, 그리고 승리를 위하는 것도 후천적 본능이었다.

기사와 전사의 본능이 충돌하는 이 전장에서 도미닉 경은 행복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기묘한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적이 너무 단단합니다!"

"너 관통셋이 아니라 치명셋 끼고 온 거 아니야?"

"아닙니다! 관통셋에 풀 차지 상태 최대 체력피해 100%로 때리는데 죽질 않습니다!"

촉수의 탐구자 측 고위 저격수가 절규했다.

고위 저격수의 특수 기술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즉사시킬만한 피해를 가졌으나 계속 딸피로 살아남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도미닉 경의 특수 능력, [기수]의 효과로 백수의 거인 측 모든 인원에게 4%의 피해 감소가 적용되며 일어나는 일이었다.

한 방을 맞고 쓰러질 이가 두 방에 죽고, 두 방에 죽을 이가 세 방에 죽는다.

그 한 방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딜 낭비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망할 기사 놈. 탱커라 죽지도 않는데, 광역 피해 감소 스킬까지 있다고?"

"패시브일까, 액티브일까? 액티브라고 치기엔 너무 무난하고, 패시브라고 치기엔 너무 강력한데."

촉수의 탐구자 측 후방에서 전장을 바라보던 이들이 의견을 나눴다.

도미닉 경은 이 전장에서 보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개인이었고, 자세히 보더라도 외눈과 안대, 검과 방패, 깃발을 제외하면 평범하다 못해 하위권에서 놀만 한 외관이었다.

그러나 눈썰미 좋은 이들은 도미닉 경이 이번 전장을 기회로 날아오를 포텐셜이 충분하다는 걸 알았다.

즐거운 싸움은 물론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명예와 영광, 그리고 명성까지 쌓아가는 도미닉 경이었으나, 현재 도미닉 경은 눈앞의 상황만 보였기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흐."

그저 이 불쾌하면서도 행복한 기묘한 감각을 느끼며 전진할 뿐이었다.

...

"흠. 꽤 놀라운 활약이로군?"

촉수의 탐구자 측 지휘관, 별을 기록하는 자는 주둔지에 설치된 화면들을 통해 전장의 곳곳을 보고 있었다.

수많은 화면에서 다양한 영웅담이 보였으나, 그녀의 눈은 도미닉 경에 고정하고 있었다.

책을 펼쳐 깃펜으로 도미닉 경의 하나하나를 기록한 그녀는 8번 고지의 화면이 다른 인원에게 넘어가자마자 깃펜을 놓았다.

"천재 과학자가 관심을 가지고 재벌 회장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어떤 이인지 궁금했는데 말이야."

성능도 꽤 괜찮고, 스타성도 나쁘지 않아. 별을 기록하는 자가 중얼거렸다.

사실 그녀는 3지역에는 더 이상 볼일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블랙 회장의 의뢰로 도미닉 경을 관찰하기 위해 3지역에 오랜만에 지원했다.

그녀의 성급과 코스트가 높았기에 6스테이지 지휘관이 되었으나, 그녀는 지휘를 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겉으로는 열심히 하는 척 했으나 이미 기울어진 승기와 도미닉 경을 조사해야 하는 임무에 더 이상 지휘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탱커로서 성능은 준수함. 회피 탱이라기 보단 정석적인 체력과 방어로 버티는 탱커. 피해 감소 효과 있음. 다만 아쉬운 건 군중 제어 기술의 부재라..."

별을 기록하는 자는 자신이 방금 기록한 도미닉 경의 정보를 다시 읽어보았다.

"2스테이지를 끝내고 나서의 기록이 거의 없음. 탱커라는 특성을 믿고 단련을 게을리하는 경향이 있음...?"

그녀는 자신의 정보 사이에 정보원들이 보낸 정보들을 끼워 넣었다.

그 사이에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사실인 것처럼 적어놓은 정보도 있었으나 별을 기록하는 자는 확실하지 않은 것은 책의 뒤편에 꽂아두었다.

나중에 사실이 확인이 되면 정보들 사이에 놓일지, 아니면 폐기하고 정보원과의 교류를 끊을지 선택하기 위해서다.

"최근 가차랜드에 '초대 된' 이들은 기본적인 특수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숨기고 있는 특수 능력이 있을 수 있음."

그녀는 이 정보를 가능성이 있는 정보들 중에서도 가장 앞에 두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도미닉 경은 너무 '심플'한 경향이 있었다.

그가 가차랜드에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너무 평범한 것이다.

"아."

별을 기록하는 자가 문득 시간을 보았다.

"이제 곧 끝나겠네."

별을 기록하는 자는 책을 덮었다.

이제 더 이상 여기서 기록할 시각은 없었다.

이제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

도미닉 경은 고지의 중간을 지나 어느덧 고지의 정상에 올랐다.

한 번은 거대한 로봇의 발에 치여 다시 고지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으나 도미닉 경은 아슬아슬하게 버텨 내고 다시 고지를 올라 정상을 정복하고 말았다.

물론, 여전히 적들은 정상에서 도미닉 경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지만.

도미닉 경은 마지막 힘을 짜내 고지에 깃발을 꽂았다.

의도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과거 페럴란트에서도 고지를 점령하면 깃발을 꽂았던 습관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그 사소한 행동은 꽤 멋진 장면이 되었다.

[(ALL) 모두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성좌 백수의 거인이 신의 힘 [티탄의 지식]을 통해 전장을 통제합니다.]

도미닉 경이 깃발을 꽂는 그 순간, 고지의 반대편에 있던 이들은 도미닉 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깃발이 꽂히고 도미닉 경이 행복함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ALL) 경배하라! 티탄 우라노스의 하늘 길을 통해 타이탄급 기함 '우라노스'가 차원을 도약합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사이렌 소리와 함께, 하늘을 가득 뒤덮는 거대한 우주 전함이 하늘을 찢고 나타났다.

그 거대한 전함의 아래에 달린 모든 포탑들이 빙글빙글 돌며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기 시작했고, 격납고의 문이 열리며 바리케이드와 군수물자들이 낙하했다.

혼란스러웠던 전장에 어둠과 침묵이 내려앉았다.

빨갛게 점멸하는 붉은 경고등과 사이렌 소리만이 8번 고지가 아직 존재하고 있음을 알렸다.

8번 고지 위에서 깃발을 꽂아 세운 도미닉 경의 행복한 웃음은 점멸하는 붉은 등의 불빛에 따라 섬뜩하게 보이기도 했다.

도미닉 경이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놀라운 타이밍이었다.

"...탱커 개사기네 진짜."

사람들 사이에서 저 말이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모든 이들이 이미 신의 힘이라는 문장을 보았다.

도미닉 경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이 불합리한 신의 힘을 가진 성좌를 욕하는 대신 가장 만만한 탱커를 욕한 것뿐이다.

촉수의 탐구자 측 인원들은 이제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저 멀리 촉수의 탐구자가 붉어진 촉수로 허공을 내려치는 것이 보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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