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39화]국지전
* * *
서로 재정비를 택했다고 해서 전투가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보낸 소수의 인원들의 충돌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흐."
도미닉 경은 5번 고지에서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대충 닦은 도미닉 경은 쌓인 눈에 검을 문질렀다.
말라붙어 있던 피가 지워지며 눈 위에는 다시 한번 두 줄의 붉은 선이 그어졌다.
누군가 도미닉 경의 주변을 살펴보았더라면 일정한 간격으로 마치 횡단보도나 전차의 궤도처럼 보이는 붉은 선의 향연에 놀랄지도 모른다.
그만큼 도미닉 경은 지치지도 않고 전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고지를 점령해! 적은 하나야! 둘이라면 고민해 보겠고, 셋이라면 내가 말을 안 해! 그런데 하나란 말이다!"
별동대 중 하나를 이끌고 있던 촉수의 탐구자 측 첩보대장이 아군을 독려 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번 전투에 흥미가 없는 상태였다.
촉수의 탐구자 측에선 그저 도미닉 경의 이상 행동을 막기 위해 자신을 보낸 것뿐이다.
정작 기만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는 다른 쪽이었다.
"흐."
도미닉 경은 창을 들고 뛰어오른 천사를 향해 방패를 내질렀다.
예상한 타이밍보다 더 빠르게 충돌한 창 끝과 방패의 충격에 천사의 균형감각이 어긋났다.
도미닉 경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사의 날개 하나를 베는 데 성공했다.
천사가 눈 사이로 떨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다음!"
도미닉 경은 이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높게 쌓인 눈 덕분에 도미닉 경은 평범한 환경보다 더 적은 수의 적과 싸울 수 있었다.
특성과 행복함 덕분에 지치지도 않고 검과 방패를 휘두른 도미닉 경은 다시금 눈 위에 붉은 선을 추가했다.
서른 둘.
도미닉 경이 새긴 숫자.
영하의 추운 날씨에 피와 땀에 젖어 버린 도미닉 경의 옷도 얼어붙었으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아 식지 않는 몸의 열기와 열의에 녹아내렸다.
전투가 끝나고 나면 분명히 몸살과 감기에 시달리겠지만, 지금의 도미닉 경은 그저 지금 상황이 행복할 뿐이다.
"다음!"
도미닉 경이 소리쳤다.
여전히 그는 처음과 같이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진짜 탱커 너프 좀 해라..."
첩보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
백수의 거인과 촉수의 탐구자는 거의 동시에 다음 전쟁 확장을 시도했다.
양측 모두 지금의 상황에선 서로에게 치명타를 먹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변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각자가 바라는 변수는 달랐다.
촉수의 탐구자는 초반에 이득을 보지 못한 순간 3스테이지가 필요해졌다.
1스테이지와 2스테이지에서 오로지 공격 일변도로 준비한 탓에 보급과 지원이 부족했다.
3스테이지부터는 후반을 도모하기 위한 지원형 인간들이 많았으니 따라잡으려면 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백수의 거인의 전쟁 확장은 좀 달랐다.
그는 3스테이지가 연결되는 순간 요새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전장 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었다.
역병의 저주에 걸린 요새의 사람들은 회복되기 전까진 전력에서 제외해야 했고, 요새를 제외한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환경. 전장의 환경이 양측에 그 어떤 유리함도 제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환경을 극복하고 유리함을 굳히기 위해서는 3스테이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전쟁 확장을 시작했다.
...
3번 고지 요새 안.
어느 정도 복구 된 성벽의 너머에서 악마가 주변을 살피는 곳.
역병으로 쓰러진 사람들이 고열과 고름에 시달리고 있었다.
고름들이 온몸에 퍼져 누울 수도 없는 상태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를 한 간호사가 돌아다니며 등에 멘 커다란 주사기를 병자들에게 찔러 넣고 있었다.
주사기에 맞은 이들은 초록색 십자 표시와 빨간 하트 표시가 뜨며 일시적으로 나아졌으나, 간호사 혼자서는 역부족인 상태였다.
이 아비규환인 요새의 내부에서, 한 남자가 절뚝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반 스트렐치. 성벽이 무너지며 그 아래 깔린 남자였다.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그는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죽음을 직감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목숨을 건졌다.
도미닉 경의 특성 [기수] 덕분이었다.
4%의 피해를 감소시킨 결과, 죽을 위기에 처한 피해량이 죽기 직전으로 바뀐 것이다.
"뭐, 부활에 필요한 시간과 에너지를 아꼈으니 좋긴 한데..."
스트렐치는 말을 흐렸다.
"제발! 죽여! 그게 더 깔끔하잖아!"
"부활하면 안 될까요? 가려운 건 못 참아서."
"으. 진짜 이럴 때만 현실성 높은 게 싫다니까."
환자들이 간호사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그만큼 플라기우스의 능력은 더럽고 귀찮은 능력이었다.
...
예카테리나는 이미 흩어진 인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적이 보이는 족족 저격을 시도했다.
그녀의 저격 실력은 점점 더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 사이에서도 빛을 발했다.
이번에도 두 명의 적을 부활 대기 상태로 만든 예카테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방구쟁이놈. 총애를 좀 받는다고 기고만장해서는."
플라기우스. 예카테리나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들어와 클랜 내부의 라이벌과 같은 남자를 떠올렸다.
플라기우스의 특성은 역병과 저주. 나름 딜탱이 가능한데다가 적에게 디 버프까지 줄 수 있는 만능형 캐릭이었기에 클랜 수뇌부의 총애를 받았다.
반면, 자신은 단일 대상에게만 효과가 있는 딜러.
비슷한 수준의 딜러들은 많았기에 예카테리나는 더 독하게 업적을 쌓아 올렸다.
플라기우스를 생각하던 예카테리나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올랐다.
도대체 탱킹 조금 할 줄 안다고 해서 총애받는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분노에 억눌린 소리가 이빨 사이로 기어나왔다.
예카테리나는 이 분노를 풀 곳이 필요했다. 스트레스는 피부에 좋지 않으니까.
그녀는 다시 총을 어깨에 메고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의 방향엔 5번 고지가 있었다.
...
"으. 흐아!"
밤의 마술사는 플라기우스의 명령을 받고 몰래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멋진 실크햇과 붉은 나비넥타이를 단 연미복이 눈보라 사이에서 반짝거렸다.
'적진에 가서 수뇌부를 공격해. 수뇌부가 죽으면 베스트. 실패해도 혼란을 주면 굿.'
첩보대장을 통해 전해진 플라기우스의 명령.
하늘이 어두워질 때마다 그의 얼굴에 그려진 형광 해골이 번쩍였다.
마침내 적진의 근처에 도달한 밤의 마술사는 바위의 뒤에 숨어 적진을 염탐했다.
간이 지휘소가 지어진 적의 주둔지는 거의 모든 상황에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날씨가 문제였다.
심각한 전장의 날씨로 인해 가끔 전자기기가 먹통이 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빠르게 조치를 취했지만, 이 완벽한 대비 중간중간 적이 파고들 틈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밤의 마술사는 그 틈을 파고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적의 동태는?"
스테이시가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부관에게 물었다.
"적이 너무 흩어져 치고 빠지는지라 상황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으니..."
부관은 추위에 이빨을 부딛히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하계 수영복 스킨이었던 탓에 살을 에는 바람과 추위에 전혀 맞설 수 없었다.
"제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수영복 스킨으로 온 건지 모르겠네요."
입술 사이가 얼어붙기 전에 부관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왜? 저번엔 완벽한 몸매를 자랑할 수 있다며 좋아하더니."
스테이시가 털이 달린 두꺼운 코트를 여미며 말했다.
"나처럼 꼬맹이는 코트로 가려도 꼬맹이라며. 자신처럼 나이스 바디인 사람은 이런 옷을 입어야 한다며 자랑하더니."
스테이시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부관을 놀려댔다.
실제로 스테이시의 외모는 아직 어린 티를 벗어나지 못했고, 부관은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멋진 몸매의 소유자였다.
나이로 따지자면 스테이시가 월등히 많았으나 이번만큼은 외모에 걸맞은 유치함으로 부관을 놀리는 스테이시였다.
"으, 잠시만요. 이 이야기는 그만하죠."
"왜? 네가 먼저 수영복 이야기를 꺼냈잖아."
"진짜 잠깐만요. 추가적인 정보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부관은 팩스에서 인쇄되어 나오는 종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부분이 없는지 한 번 검토하고 스테이시에게 전했다.
"적진에서 몇몇 인원이 확인되지 않는답니다. 혹시나 해 확인했는데, 죽은 것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 그래... 기만인가? 역시 촉수의 탐구자다운 날카로운 한 방을 보여주려는 건가?"
다시 팩스가 작동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팩스에서 나오는 종이가 걸려 버렸다.
부관은 추위에 덜덜 떨면서 팩스를 한 대 내리쳤다.
"아, 좀!"
추운 날씨에 자꾸 고장이 나는 장치들.
"통신병 불러 올게요."
"그래."
부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은 추위 속에서 크게 퍼져나가며 얼어붙어 안개처럼 흩어졌다.
밤의 마술사는 혼자 남은 스테이시를 보았다.
이건 기회다.
"으, 하으."
밤의 마술사는 달리기 시작했다.
눈이 발소리를 가려주었고, 바람이 움직이는 소리를 막아주었다.
스테이시는 남은 코코아를 마시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오한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치 미친개처럼 뛰어오던 밤의 마술사가 자기 연미복 상의를 활짝 펼쳤다.
그는 밤의 마술사였지만, 밤은 밤(night)이 아니었다.
밤(bomb)의 마술사였다.
곧, 백수의 거인 측 수뇌부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