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38화]전초전
* * *
"젠장."
스트렐치는 폭발의 진동이 그대로 느껴지는 성벽 위에 엎드려 있었다.
포격이 잠깐 멈출 때마다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나, 이미 주변의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그가 후퇴할 길이 모두 막히고 말았다.
차라리 여기서 떨어질까. 라고도 생각했으나 빠른 보급을 위해 말끔히 정리된 요새 내부엔 얼어붙은 땅만 있었기에 떨어지는 순간 부활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스트렐치는 종이에 만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가 궐련에 불을 붙인 순간, 정확하게 그가 있던 성벽으로 날아온 폭죽이 터지며 반짝였다.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온전히 자기 죽음을 기다렸다.
...
백수의 거인은 지평선 너머에서 전장을 굽어보았다.
전장에서 하늘을 본다면 오십 개의 머리가 전장 전체를 살피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지만, 전투에 집중한 사람들은 하늘을 보지 않았다.
백수의 거인이 오십 개의 왼손으로 오십 개의 턱을 쓰다듬었다.
지금이야말로 촉수의 탐구자의 공세를 멈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거인이 포인트를 사용해 신의 힘을 발동시키겠다고 선언했다.
[(ALL) 스테이시(블루)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포격을 멈추고 뒤로 물려라."]
[(BLUE) 스테이시(블루) : "서쪽 성벽이 무너졌다. 해당 지역 인원들은 2차 방어선으로 후퇴하라."]
[(ALL) 스테이시(블루) : "당장 포격을 멈추지 않으면, 어... 큰일이 일어날 거다."]
스테이시는 계속해서 허세를 부리면서도 아군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동공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고, 그녀의 입은 쉴 새 없이 떠들며 적에게 가짜 정보와 진짜 정보를 섞은 정보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믿지 않는 허세가 무슨 소용인가.
스테이시는 점점 허세를 부리는 것에 지쳐가고 있었다.
"진짜 일어나면 좋을 텐데."
정보는 진실 속에 거짓을, 거짓 속에 진실을 섞어야 하는 법이다.
진실된 진실과 거짓된 거짓은 혼자선 아무 소용이 없다.
스테이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요새를 포기하고 다른 고지로 이동할까? 아니면 계속 요새를 중심으로?
머릿속에 온갖 대안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스테이시의 간절함을 알았을까?
신께선, 스테이시에게 큰 도움을 내렸다.
...
도미닉 경은 적들의 고지를 점령하고 나서 아군의 전쟁 확장으로 새로 생긴 5번 고지를 향했다.
그 어떤 적의 방해도 없이 무사히 5번 고지를 점령한 도미닉 경은 근처에 쌓인 눈에 피에 물든 검을 닦으며 전장을 살폈다.
눈 위로 두 줄의 붉은 선이 그어졌다.
전장의 상황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중심은 3번 고지 요새였다.
3번 고지 아래에 있던 인원들은 사격을 지속하며 성벽 위에 있던 아군에게 조금씩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었고, 4번 고지를 점령한 적의 포병 전력이 화력을 투사할 때마다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왈록이 그 거대한 녹슨 칼날의 채찍을 휘두르며 막아보고 있었으나, 적은 비겁하게도 인원을 조금씩 나눠 치고 빠지며 왈록을 농락했다.
안 그래도 험상궂은 악마의 얼굴이 더욱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ALL) 성좌 백수의 거인이 신의 힘 [유성우]를 사용합니다!]
도미닉 경은 이제 하얀 눈 사이로 검은 재가 휘날려 회색이 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거인이 백 개의 손에 백 개의 돌을 쥐고 있었다.
"후퇴! 후퇴하라!"
신의 힘이 발동되었다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자, 4번 고지에는 혼란이 일어났다.
하늘을 바라본 플라기우스는 얼굴을 감싼 붕대 너머로 감정이 전달될 정도로 정색했다.
이 타이밍에 신의 힘이라.
조금만 더 하면 요새를 무너뜨리고, 태세가 무너진 적들을 쓸어담을 수 있었는데.
플라기우스는 향로를 쥔 손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백 개의 돌... 아니, 바위가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나하나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바위는 점점 가속을 받으며 불타올랐다.
첫 바위는 4번 고지 중앙에 떨어졌다.
쿵. 소리가 아니라 쾅! 소리를 내며 땅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4번 고지의 적들은 안 그래도 휘날리는 눈과 요새에서 나오는 재로 시야가 흐릿한 상황에서 사방으로 튀어 오른 흙먼지까지 겹쳐 완전히 시야가 차단되었다.
시야만 차단 되었다면 그나마 나았겠으나, 바위가 땅과 부딛히며 난 굉음에 순간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았다.
혼란한 상태에서 시각과 청각이 차단된 사람들은 불안해지는 법이다.
공포와 혼돈이 일어났다.
단지 바위 하나 때문에.
"...! ...!"
플라기우스는 짓무른 입술을 더욱 강하게 씹으며 새로운 집결 명령을 내렸으나 이미 신의 힘의 영역에서 도망치는 이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적에게 안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하자면, 신의 힘은 바위를 범위 내에 '아무렇게나' 던지는 것이었고, 아직 바위들은 '제멋대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플라기우스는 떨어지는 바위의 소음 사이로 고개를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근처엔 바위가 떨어지지 않았으나, 이내 그의 발아래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플라기우스는 하늘을 보았다.
집채만 한 바위가 점점 커지며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플라기우스는 죽음을 직감했다.
[(ALL) 성좌 촉수의 탐구자가 신의 힘 [계몽]을 발동합니다. 범위 내에서 지정된 대상과 그 주변의 무작위 대상들을 '계몽'합니다!]
플라기우스가 바위에 깔리기 직전, 촉수의 탐구자가 능력을 발동시켰다.
플라기우스는 뇌가 녹아내릴 정도로 들어오는 '진실'에 머리를 쥐어짰다.
붕대로 감싼 몸이 울룩불룩 튀어 오르더니, 이내 그의 등에서 촉수들이 튀어나왔다.
그의 불길한 녹색 고름에 끔찍한 보라색이 섞이기 시작했다.
근육과 골격이 뒤틀리며 진실을 마주한 자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플라기우스는 모든 진실을 깨달았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으나, 플라기우스는 촉수의 탐구자의 계몽을 통해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났다.
"진실을 알고 나면, 그 어떤 법칙도 믿지 못한다."
거대한 촉수 덩어리로 이루어진 플라기우스가 이빨이 가득한 입에서 역병을 뚝뚝 흘리며 선언했다.
그를 덮치려던 바위는 플라기우스의 압도적인 신체 능력에 막혔으며, 그의 능력에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참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계략.
마침내 모든 바위가 땅에 떨어지고, 뒤집혀 일어난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이미 수는 절반으로 줄었으나 모두 '계몽'된 상태가 된 촉수의 탐구자 측 인원들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
제길. 제기랄.
촉수의 탐구자는 속으로 백수의 거인을 백 하고 서른 번은 더 죽였을 것이다.
그는 히든카드를 사용하느라 더 많은 포인트를 소모했지만, 아직 이득을 보지 못했다.
오히려 저 시대착오적인 변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있었다.
심지어 포인트가 넉넉해진 백수의 거인이 신의 힘을 사용했을 때, 촉수의 탐구자는 입 밖으로 욕을 내뱉고 말았다.
그 모습에 촉수의 탐구자 뒤에 있던 검은 양복이 경고를 내뱉었다.
"경고입니다. 한 번 더 욕하면 바로 실격패 하겠습니다."
그러나 촉수의 탐구자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행정부에서 나온 심판은 가차랜드 내에서는 성좌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들이었으니.
욕을 하는 대신 촉수의 탐구자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신의 힘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도 최대한 적은 포인트로.
흩어져 치고 빠지는 인원들이 다시 다른 고지를 점령하기는 했으나, 아직 포인트가 모자랐다.
어쩔 수 없지. 촉수의 탐구자는 신의 힘 [계몽]을 발동시켰다.
결과적으로 이는 정답이었다.
계몽된 인원들은 더욱 진화된 신체 능력으로 바위의 피해를 온전히 막아 냈다.
일반적인 같은 등급의 인원보다 적어도 두세 배는 더 강해진 이들.
그러나 이 인원들로는 요새를 압박할 수는 없었다.
촉수의 탐구자는 촉수를 굽혀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백수의 거인 측 지원군들이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
일단 빠져서 다른 고지를 우선시하라. 그리고 재정비 후 다시 요새를 공략하라.
플라기우스는 성좌의 전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진보된 시야를 얻은 플라기우스는 적의 지원군이 도착한 모습을 보았다.
지금 당장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전장.
플라기우스가 진보된 촉수를 뻗어 동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단 후퇴해 재정비를 한다.
그 말을 들은 계몽된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자신들의 주둔지로 향했다.
플라기우스는 계몽된 이들의 뒤를 따라가다가 문득 요새를 바라보았다.
가기 전에 적에 대한 '감탄' 정도는 하고 가도 되겠지.
플라기우스가 손을 들었다.
이제 녹아내린 촉수 손에 융합되어 버린 역병 향로가 은은한 녹색과 끈적한 보라색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RED) 계몽된 지휘관, 역병 주교 플라기우스가 특성 [저주], [역병]을 발동합니다.]
[(RED) 블루 팀의 요새에 역병이 창궐합니다. 일시적으로 적의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이는 역병을 진정시키기 전까지 점점 효과가 증가합니다.]
전쟁에선 싸움만이 능사가 아니다.
가끔은 전쟁의 틀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쟁보다 더 심각한 일일 수도 있었다.
지치고 약해진 이들에게 있어서 역병은 두말할 것 없이 위험하고 심각한 일이다.
플라기우스는 이빨이 빽빽이 박힌 두 개의 입으로 크게 미소 지었다.
적들이 지쳐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한참 동안 역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요새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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