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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38화 (38/528)

〈 38화 〉 [37화]전초전

* * *

도미닉 경은 시스템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이미 행복함이 넘쳐흐르는 상태였기에 그 소리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대신 도미닉 경은 중앙이었던 2번 고지로 향했다.

"저기 적이다! 당장 대응해!"

2번 고지를 지키는 사람들은 몇 없었으나, 1번 고지와 달리 이들은 제대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무엇보다 고지끼리 관측이 가능한 상태였기에 1번 고지에서 일어난 일을 미리 보았던 것이 컸다.

"흐."

도미닉 경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눈을 헤치고 걸어갔다.

그의 방패엔 눈이 살짝 녹았다가 다시 얼어 서리와 얼음조각이 박혀 있었고 그의 어깨와 머리에도 쌓인 눈이 굳어갔으나 도미닉 경은 전진했다.

저 멀리 바람을 뚫고 화살과 총알이 날아왔다.

도미닉 경은 본능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신 그는 다리를 굽혀 눈 아래로 숨었다. 방패를 앞으로 내민 채로.

화살과 총알이 높이 쌓인 눈을 뚫으며 살상력이 줄은 탓에 방패를 뚫지 못했다.

"광역기! 아니면 관통기 있는 녀석 없어?"

"그런 애들은 다 요새 공략하러 갔지! 제길!"

언덕 위에 있던 이들이 재장전을 하며 서로에게 소리쳤다.

전쟁은 언제나, 더 멀리서 더 잘 죽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전장에서 구를 대로 구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화력의 집중이라는 점에 있어서 원거리 무기만큼 좋은 것이 없다.

현재 상황이 맑고 평온한 날씨에 평범한 초원이었더라면 그들의 말이 맞을 것이다.

만일 그런 상황이었더라면 도미닉 경은 저들의 화력 집중에 당해 이미 부활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눈이 높게 쌓이고 바람이 칼처럼 불며 손과 발을 얼려 버리는 날씨에서는 달랐다.

그들의 시선에서 도미닉 경은 가끔 눈보라 사이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마치 설원의 유령처럼.

엉망진창인 시야, 엉망진창인 환경.

도미닉 경의 에메랄드빛 눈만 가끔 저 눈보라 너머에서 반짝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2번 고지에 있던 이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가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사격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심지어 이 더럽고 짜증 나는 날씨에 사격 무기들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완전히, 완벽하게 도미닉 경을 도와주는 듯한 환경.

이제 2번 고지를 지키던 이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제길, 탱커 개사기네."

방패를 든 그의 특성을 극찬하는 사람.

"너프 왜 안 해? 너프 왜 안 해? 너프 왜 안 해?"

눈앞의 부조리함에 미쳐 버리기 직전인 사람.

"차라리 지금이라도 요새 공략조로 가면 안 될까?"

그나마 합리적인 의견을 내는 사람.

"니가 냉기 법사라 그래. 화염 법사였으면 공략조로 갔거나 저놈 잡고 남았다."

분탕질을 시도하는 사람.

"흐."

그리고 완전히 행복에 절여진 사람.

도미닉 경은 흐리게 웃으며 전진했다.

더 이상의 사격은 없었다.

대신, 도미닉 경의 무용담이 있었을 뿐이다.

...

백수의 거인은 지평선 너머에서 강하게 땅을 치며 분노를 표했다.

비겁한. 비겁한 녀석.

촉수의 탐구자는 숨겨둔 한 수를 꺼내 백수의 거인의 템포를 흩어놓았다.

[(ALL) 2번 고지가 점령되었습니다!]

[(BLUE) 1, 2, 3번 고지를 모두 점령했습니다. 1스테이지 독점 보너스가 지급됩니다!]

그러나 아직 계획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작은 변수가 만든 기회.

백수의 거인은 빠르게 머릿속으로 포인트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딱 한 번. 딱 한 번의 신의 힘.

지금 있는 고지를 모두 잃었다는 가정하에 자기 계획이 흐트러지지 않는 선에서 사용 가능한 카드였다.

심리란 것이 참 신기하기도 하다.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급해지는 법이지만, 자신이 쓸 수 있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법이다.

백수의 거인도 그랬다.

오히려 변수에서 나온 작은 카드 하나에 점점 이성을 되찾았다.

[(ALL) 성좌 백수의 거인이 고뇌를 통해 전장 확장을 완료했습니다!]

[(ALL) 전장이 확장됩니다! 하나의 고지와 추가적인 지형이 연결됩니다.]

그리고 자기 계획의 시작을 마주했을 때, 완전히 냉정한 상태가 되었다.

...

4번 고지를 빠르게 점령한 역병 주교 플라기우스는 이내 화력 하나는 끝내주는 이들에게 요새를 무너뜨리라고 명했다.

4번 고지 위에 대포와 폭죽 발사기, 그리고 대전차포가 설치되었다.

[(ALL) 성좌 백수의 거인이 고뇌를 통해 전장 확장을 완료했습니다!]

[(ALL) 전장이 확장됩니다! 하나의 고지와 추가적인 지형이 연결됩니다.]

"맙소사.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스트렐치는 성벽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에 몰린 그는 눈앞에 뜬 시스템 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이 얼어 눈을 뜨기 힘들게 만들었으나 뒤에서 다시 뜨거운 눈물이 그 얼어붙은 눈물을 밀어냈다.

지원군이 오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늦지는 않을 것이다.

요새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첫 포격은, 스트렐치가 있는 성벽을 향하고 있었다.

...

설치를 마친 이들은 뒤가 없다는 듯 요새를 향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그 사이, 플라기우스는 지휘관 자격을 빼앗긴 예카테리나를 만나고 있었다.

"어설프군, 어설퍼. 예카테리나. 벌써 은퇴할 때가 되었나? 벌써?"

플라기우스는 얼굴을 감은 붕대 너머에까지 보일 정도로 예카테리나를 놀려대고 있었다.

같은 클랜 소속에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두 사람은 서로를 깎아내리며 친해진 사이였다.

"변수 때문이야. 다 그 시대착오적인 변수 때문에­"

"그만. 실패한 건 변명이 통하지 않아. 결과는 바뀌지 않으니."

플라기우스는 비열하게 웃으며 불길한 녹색 향이 흘러나오는 향로를 흔들었다.

"이제부터 지휘관은 나야. 예카테리나."

플라기우스는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한 3번 고지의 요새를 음미하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만큼 효과적인 전력은 없고."

그의 광대에 걸친 붕대가 살짝 올라갔다.

...

도미닉 경은 요새를 바라보았다.

요새는 불길에 휩싸여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흐."

도미닉 경은 언덕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1스테이지 지휘관, 예카테리나.

그리고 그녀와 대화하는 나병환자.

역병 주교는 그저 붕대를 감고 있었을 뿐이었으나, 도미닉 경은 그의 붕대에서 흘러나오는 진물과 고름을 보며 착각한 것이지만, 아쉽게도 도미닉 경의 착각을 바로잡을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엉망이군. 엉망이야."

도미닉 경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본능적인 움직임이 아닌, 지극히 이성적인 움직임.

그러나 도미닉 경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땅을 유린한 이들을 찢고, 찢어 그 영혼마저 조각낼 것이다!"

도미닉 경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요새만큼 큰 키를 가진 악마가 한 손엔 녹슨 칼날이 달린 채찍을, 한 손엔 해골이 가득한 흉악한 검을 들고 땅에 생긴 불길한 불을 내뿜는 마법진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BLUE) 새로운 지휘관이 차원관문을 허가합니다. 전진 배치가 시작됩니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

"이건 너무하잖아. 진짜. 혼자서 그렇게 관심을 다 가져가다니."

스테이시는 백수의 거인 측 주둔지에서 혼자서 튀는 왈록을 보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난데. 관심도 내가 받아야 하는데.

잠깐 불만을 털어내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래. 잠깐의 관심은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지금부턴 내가 주인공이야."

스테이시는 날카로운 바람에 날리는 자기 불꽃처럼 아름다운 빨간 머리를 넘기며 장교모자를 고쳐 썼다.

"정보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 주지."

고개를 숙여 장교모자에 살짝 가려진 스테이시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입이 찢어질 듯 기쁜 광기의 미소가.

[(BLUE) 지휘관 스테이시가 특성 [공포와 희망], [야전 방송]을 사용했습니다! 이제 전장 전역에 확성기와 통신장치가 설치됩니다.]

[(BLUE) [야전 방송] 특성으로 인해 지휘관은 이제부터 전체 방송이 가능해집니다.]

[(ALL) 스테이시(블루) : "아, 아. 마이크 테스트 하나둘 하나둘."]

전장에 확성기가 달린 전신주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전장 전역에 일정 간격을 두고 세워진 확성기들에서 스테이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둔지에서 커다란 헤드셋을 쓰고 책상 위에 놓인 마이크를 테스트한 스테이시는 소리가 조금 작았던지 입력 장치의 패널을 조금 조작했다.

아, 아.

다시 한번 마이크를 테스트한 스테이시는 음향 설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본 방송을 시작했다.

[(ALL) 스테이시(블루) : "전 장병들에게 알린다. 지휘관, 선전장교 스테이시다. 감도 양호한지?"]

옆에서 같이 헤드셋을 낀 인원 하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손으로 OK 표시를 보냈다.

스테이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방송을 이어 나갔다.

[(ALL) 스테이시(블루) : "아군이 들린다면 다른 이들도 들리겠지. 지금 우리와 싸우는 괴뢰도당 놈들이라거나."]

[(ALL) 스테이시(블루) : "요새를 포격하는 이들에게 알린다. 지금 당장 포격을 멈추고 뒤로 물리지 않으면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다."]

[(ALL) 스테이시(블루) : "이는 절대 허세가 아니며, 협박이다. 당당하게 말한다. 이건 협박이다."]

말을 마친 스테이시는 옆에서 건네주는 전장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고 머릿속으로는 정보의 정리를, 입은 정보의 재구성을 하며 외쳤다.

[(ALL) 스테이시(블루) : "그리고 당장 3번 요새의 서쪽을 공략하려는 특공대도 가라고 해. 이미 들켰는데 개죽음당할 건가?"]

전쟁은 미친 짐승들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스테이시는 지금만큼은 이 전장에서 가장 잘 짖는 짐승일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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