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36화]전초전
* * *
[(RED) 10분 뒤 레드 팀 전쟁 확장이 완료됩니다. 배치를 완료하십시오.]
"뭐라고?"
촉수의 탐구자 측 2스테이지 대기실.
두 번째 지휘관인 역병 주교 플라기우스는 예측보다 빠른 전쟁 확장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온몸을 감싼 고름 가득한 붕대 너머로 그 표정이 그대로 보일 정도로.
"첩보대장! 아직도 불통인가?"
"그, 그게..."
첩보대장이라 불린 이의 후드 아래로 난감한 표정이 보였다.
양측 모두 이를 갈고 나왔는지, 각자 전장의 정보를 통제할 수 있는 인원을 넣은 상태였다.
첩보대장의 정보 수집 능력과 정보 은폐 능력은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으나 상대편은 첩보대장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정보 은폐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상대 측 정보를 다루는 이의 신상조차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플라기우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숨결에 불길한 녹색의 바람이 섞여 허공에 흩어졌다.
전장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다.
이는 필연적으로 상대의 의도를 알지 못한 체 그저 예측만으로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지. 우리가 유리한 방향으로 전략을 짤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점은 촉수의 탐구자는 초반에 자신과 긴밀한 클랜들을 배치했다는 점일까.
플라기우스는 이제 7분 남았다는 시스템의 알림을 무시하며 2스테이지에 있는 인원들을 확인했다.
...
[(BLUE) 전쟁 확장이 시작되었습니다. 20분 동안 전략을 수립하십시오.]
백수의 거인 측 대기실은 오히려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빠르긴 했으나 블루 팀 2스테이지 지휘관 딕 스테이시는 거울을 보며 자기 불타는 듯 아름다운 붉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 장교 모자를 걸쳤다.
거울 속에는 쭉 찢어져 사나운 눈과 주근깨 가득한 창백한 피부의 소녀가 웃고 있었다.
"어때, 왈록? 괜찮지?"
스테이시는 거울 너머로 보이는 악마에게 눈초리를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했으나 갈색의 장교복에 푸른 띠 완장을 찬 모습이 나름 군인처럼 보였다.
"20분이야. 스테이시, 20분이라고."
왈록은 으르렁거리며 손에 든 채찍을 매만졌다.
녹슬었으나 날카로운 칼날들이 채찍의 움직임을 따라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템포가 있는 법이야, 왈록."
스테이시는 완전히 편한 자세로 시가를 입에 물었다.
왈록은 어린 외관과 담배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눈을 찌푸렸으나, 차마 지적하지는 않았다.
스테이시의 나이는 외관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템포를 유지해야 승리할 수 있어. 다른 이들의 템포에 내 템포가 어긋나는 순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리지."
스테이시는 익숙하게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거울 아래 놓인 안테나가 잔뜩 달린 장치를 조작했다.
납작하고 둥근 손잡이를 돌려 화살표를 127.3 Dhz라고 적힌 곳으로 옮기자 장치에서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장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통신병이 설치를 잘한 모양이네. 음질이 꽤 좋아."
왈록은 치지직거리는 소리가 절반 이상인, 소음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도 음질이 좋냐는 말을 내뱉을 뻔했으나 스테이시의 말이 더 빨랐다.
"흠. 3번 고지. 1번 고지. 우리 주력은 3번 고지. 적의 주력도 3번 고지... 현재 최대 전장은 3번 고지인가. 요새화? 스트렐치 치곤 괜찮은 전략인데."
스테이시는 장치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통해 전장의 상황을 유추했다.
"이래서 천재들이란."
왈록은 기가 찬다는 듯 혀를 크게 쯧. 하고 소리냈다.
스테이시는 천재였다. 한 번 들은 말은 헛소리라도 잊은 적이 없었고, 한 번 본 글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고스란히 저장돠고 재창조되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천재라고 불리는 이유는 바로 그 정보를 본능적으로 잘 써먹기 때문이었다.
정보를 취득하고 분석한 이후, 그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조작해 이득을 보는 이.
그것이 바로 스테이시란 여자다.
지금도 그렇다.
스테이시는 전장의 상황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갑자기 2스테이지 대기실 내에서 다양한 물건들을 찾아 조합했다.
포크와 접시, 카세트 테이프와 루비 조각 2개. 그리고 커튼과 금붕어 먹이를 조합해 도청 장치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그녀가 1스테이지에 통신병이 간 것을 기억하고 행한 일이었다.
전장 전체에 깔린 정보 차단 때문에 적군의 정보에 접근하진 못했지만 아군의 정보를 훔치는 정도는 충분했다.
"좋아. 아무래도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인 모양이군. 내가 날뛰기 딱 좋은 상태야."
스테이시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의 창백한 볼에 발그레 홍조가 떠올랐다.
[(ALL) 성좌 촉수의 탐구자가 뒤틀린 계몽을 통해 빠르게 전쟁 확장을 완료했습니다!]
[(ALL) 전장이 확장됩니다! 하나의 고지와 추가적인 지형이 연결됩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기 전까지.
스테이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
"빨리 성벽으로 탄약을 옮겨! 대응 사격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성벽이 위험해진다!"
스트렐치는 이제 완전히 목이 쉬었으나, 쇳소리가 가득한 목에서 피가 나도록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한 번 죽고 다시 부활할까.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스트렐치의 정신은 몰려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스트렐치는 웃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전쟁 확장이 완료된다.
그렇다면 지금 요새를 중심으로 삼아 적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겠지.
성벽 위는 이미 엉망이었다.
적의 특성으로 벽의 일부가 무너지면 그 자리를 아군의 시체로 메웠다.
얼어붙은 시체는 그 자체로 벽돌과 같아 간이 벽이 완성되었다.
지속적인 적의 특공대의 침입과 사보타주로 계단은 벌써 17 번째 고쳐지고 있었고, 통신병과 공병들이 오가며 혹시라도 외벽이 뚫릴 것을 대비한 제 2 방어선을 구축하는 상태.
그러나 요새의 사람들은 웃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전쟁 확장이 완료된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만 버텨!"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덕분에.
그러나 그 믿음은 곧 산산이 깨졌다.
[(ALL) 성좌 촉수의 탐구자가 뒤틀린 계몽을 통해 빠르게 전쟁 확장을 완료했습니다!]
[(ALL) 전장이 확장됩니다! 하나의 고지와 추가적인 지형이 연결됩니다.]
[(ALL) 추가적인 고지는 3번 고지 옆에, 추가적인 지형은 백수의 거인 측 주둔지와 고지들 사이에 생성됩니다.]
촉수의 탐구자가 먼저 선수를 쳐 버렸다.
"망할."
스트렐치는 요새를 버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촉수의 탐구자 측 주둔지에서는 2스테이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인원들이 하나둘 소환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전장에 발을 내민 건 검은 피부에 마술사 복장을 한 남자였다.
"아, 으하."
얼굴에 하얀 형광 페인트로 해골을 그린 검은 마술사는 전장을 보며 웃었다.
가끔 어깨가 툭 하고 움직였는데,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진정해라, 밤의 마술사."
다음으로 소환된 것은 역병 주교 플라기우스였다.
플라기우스는 소환되자마자 자신보다 먼저 달려간 밤의 마술사를 진정시켰다.
저번에 룰을 어긴 대가로 3번의 참전 기회를 잃은 밤의 마술사는 복귀의 기쁨에 반쯤 미쳐 있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플라기우스는 지휘관이었다.
일단, 상황을 확인한 이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다. 플라기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첩보대장. 당장 정보 수집해. 30초 주지."
"이미 끝났습니다."
첩보대장은 자기 특성을 발동해 순식간에 전황을 알아냈다.
대기실에선 알 수 없었으나, 직접 전장에 발을 내민 이상 더 이상의 정보 교란은 의미가 없다.
첩보대장은 실전에 더 유능한 인재였으니까.
"1번과 3번은 상대에게 넘어간 듯합니다. 2번은 우리에게, 이번에 생성된 4번은 아직 빈 상태입니다. 3번에서 큰 교전이 있군요. 상대가 요새를 짓고 농성하는 모양으로... 아무래도, 저희가 필요한 상황이 맞습니다."
순식간에 정보를 요약해 전달받은 플라기우스는 거칠고 냉혹한 바람에 휘날리는 자기 붕대를 다시 감았다.
"4번으로 간다. 아직 싸운다는 것은, 적의 저항이 거세다는 뜻도 있으나 요새의 존재를 생각하면 우리도 나름 잘 싸우고 있다는 뜻이지. 차라리 2번과 4번을 점령해 3번을 양면에서 압박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도록 하죠."
새로운 지휘관 역병 주교 플라기우스와 첩보대장은 지원군을 이끌고 4번 고지로 향했다.
그 뒤를 밤의 마술사가 히죽거리며 쫓아갔다.
여전히 뒤틀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
...
백수의 거인 측 2스테이지 대기실.
"상대가 먼저 증원되었어. 이러면 우리 전략이 통하지 않아."
왈록은 고민에 빠진 스테이시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5분 남았어. 내게 전방으로 갈 기회를 줘. 한 번에 뭉쳐서 간다는 계획도 좋지만, 우선 요새를 지원하고 봐야지."
설득하는 왈록의 얼굴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요새 뒤편에 적! 적의 증원군'
'성벽을 포기 당장 2차 방어선'
'신의 힘을 쓰면'
스테이시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고민은 오래할 수 없었다.
결국, 스테이시는 왈록의 계획을 차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의 큰 계획에 왈록이란 변수가 생겼으나, 그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는 듯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