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35화]전초전
* * *
"미치겠군. 되는 게 없어."
촉수의 탐구자 측의 지휘관 예카테리나는 한숨을 쉬었다.
차가운 공기와 닿은 숨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연기처럼 흩어졌다.
예카테리나는 적의 사기를 꺾을 생각으로 스트렐치를 향해 저격을 감행했다.
스트렐치의 덩치는 곰보다 컸기에 아무 곳이나 대고 쏴도 충분히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노련한 저격수였던 예카테리나는 전장에서 효과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트로피 헤드].
대상을 정해 사격 시 그 대상에게 관통 피해를 입히며, 우두머리일 경우 반드시 치명타가 들어가는 특성.
스트렐치를 말 그대로 저격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특성 덕분에 저번 전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노련한 지휘관의 부재는 곧 적 전체의 사기 저하로 이어졌기에.
그러나 이번만큼 이 특성이 계륵처럼 느껴진 적이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시대착오적인 기사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방패를 든 기사는 자신의 총알을 튕겨 냈다.
대상으로 지정한 사냥감이 아니라면 효과가 적용되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 극적인 장면에 백수의 거인 측 병력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예카테리나는 입술을 씹었다. 얼마나 억울했던지 입술이 찢어져 피가 날 정도로 씹어댔다.
스트렐치는 경험 많고 유능한 지휘관이다.
예카테리나도 그 사실을 안다.
무엇보다, 이 한 발이 빗나감으로서 적의 사기를 오히려 올려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성벽 위로 사격 시작해. 성벽을 노리지 말고, 성벽 위의 사람을 노려. 최대한 위협적으로 보이게끔 허세를 섞어도 좋아."
예카테리나는 스트렐치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절반 이상 적에게 기세가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 밖으로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은 최대한 변수를 창출하고 적의 의도를 비틀어 승리를 향한 실마리를 만들어야 했다.
...
도미닉 경은 눈을 헤치고 걸어갔다.
이제 허리를 넘어 가슴까지 쌓인 눈을 뚫고 걸어가는 일은 고되고 힘들지만, 도미닉 경은 오히려 황소처럼 묵묵히 눈을 파고들며 움직이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이 넘쳐나는 활력에 대해 의문을 품었으나 뜻밖에 이유는 간단했다.
도미닉 경이 가진 특성 중 [탱커]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전투를 오래, 그리고 지저분하게 싸울 수 있도록 하는 특성이었다.
전장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몸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 잘 싸울 수 있는 특성인 셈이다.
특성과 함께 도미닉 경이 소위 '행복함'이라고 말하는 상태도 한몫 했다.
고통을 감내할수록 '행복'해지는 도미닉 경은 현재 고통을 거의 느끼지 못 하는 상태였다.
몸이 지치고 힘들어도 무시하고 행동을 강행할 수 있는 상태가 도미닉 경의 '행복함'인 것이다.
"흐."
그러나 도미닉 경은 현재 그렇게 복잡한 생각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전장.
그리고 행복해 미칠 것 같은 감정.
"흐."
도미닉 경은 현재, 싸움 외에 그 어떤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미닉 경이 기사는 될 수 있어도 지휘관이 될 수는 없는 이유였다.
그러나 행복한 상태의 도미닉 경의 본능만큼은 그 어떤 야수와 괴물들과 비교해도 영리하고 비열하다.
도미닉 경은 적의 본대를 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눈을 헤치며 걷고 있다.
적이 점령한 나머지 두 개의 고지를 향해서.
...
"적이 은신했다! 당장 레이더로 위치 파악해!"
"찾았습니다! 서쪽 성벽 기준 30미터! 벽을 넘을 생각인 모양입니다!"
스트렐치는 정신없이 전장을 지휘했다.
이런 기분이 얼마만이던가.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스트렐치는 예카테리나의 저격에 당해 부활에 헛된 시간을 쓰고 말았다.
결국 두 번의 전쟁 모두 첫 번째 전쟁 확장 직전에 부활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미 전쟁 확장으로 충원된 지휘관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이반 스트렐치는 쉴 새 없이 호통치고 삿대질하며 사방에서 기만하는 적들을 상대했다.
오랜만에 하는 지휘. 계속해서 변화하는 전장.
스트렐치는 심리적으로 완전히 지쳐 버렸으나, 그는 웃었다. 웃으며 서쪽 성벽으로 달려가며 쉴 새 없이 명령을 내렸다.
그는 그저 지금의 상황이 즐거웠다.
스트렐치는 전쟁을 사랑하는 짐승이었으니까.
오른손에 야전삽을 들고 서쪽 성벽에 도착한 스트렐치는 이미 레이더에 걸려 위치가 드러난 적의 기동타격대에게 설득력 있는 한 방을 먹였다.
얼마나 감명 깊은 설득이었는지, 목에서 피를 뿜으며 공중제비를 돌 정도로.
"아버지께선 말씀하셨지. 사람은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그래야 잘 산다고."
이 광기 어린 전장에서 스트렐치는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쓴 채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야. 이렇게 머리가 말랑말랑하니까 살아남질 못하잖아."
스트렐치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은신 도적 하나의 정수리에 날을 세운 야전삽을 꽂았다.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조금만 더.
그때가 오면, 이제 스트렐치는 이미 충분히 즐긴 지휘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더 즐겁게 날뛸 수 있으리라.
...
"퉤. 도대체 우린 왜 남아 있어야 하는 거야?"
쥐 수인이 찍찍거리며 침을 뱉었다.
왼쪽 고지에는 두 명의 수인이 있었다.
둘은 각각 석궁과 활을 들고 있었으며, 고지 위에 심어진 커다란 참나무의 그늘에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적의 특공대가 올 수도 있다잖아. 고지를 뺏기면 안 되니까 최소한의 방어 병력을 넣은 거지."
"그러니까, 특공대라면 우리 같은 어정쩡한 용병이 막을 수 있겠어?"
올빼미 수인이 고개를 180도 돌려 쥐 수인을 바라보았다.
큰 눈망울에 작은 동공이 합쳐져 마치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으나, 오랜 친구인 쥐 수인은 그것이 그저 심심할 때 행하는 버릇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너도 그렇잖아. 이렇게 여기서 전쟁 확장까지 기다리라고? 이러려고 용병 지원한 거야?"
쥐 수인은 또다시 땅에 침을 뱉었다. 선천적으로 성급하고 생각 없이 사는 그의 습관이다.
"내가 널 몰라? 너 심심하면 목을 360도 돌리잖아. 얼마나 심심하면 지금도 그러잖아!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당장 가자! 어차피 적이 오더라도"
속사포처럼 불만을 토해내던 쥐 수인의 말은 올빼미 수인을 바라보는 순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올빼미 수인은 더 이상 목을 돌리지 않았다.
흐린 하늘과 나무의 그림자로 어두운 곳, 목까지 잠길 정도로 쌓인 눈 사이에 붉은 머리가 떨어졌으니.
쥐 수인은 피가 솟아오르기 시작한 올빼미 수인의 목 너머에 에메랄드빛으로 흉흉하게 빛나는 괴물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흐."
괴물의 눈이 올빼미 수인이 들고 있던 활처럼 휘었다.
...
[(ALL) 1번 고지의 주인이 변경되었습니다. 촉수의 탐구자 → 백수의 거인.]
백수의 거인은 지평선 너머에서 분함을 못 이겨 꿈틀대는 촉수의 탐구자를 바라보았다.
그 꿈틀대는 탐구자의 모습에 백수의 거인은 이번 전쟁의 승기가 자신에게 기울었다고 예측했다.
촉수의 탐구자는 순간적인 집중력과 전장에 대한 이해도가 백수의 거인보다 월등히 좋아 단기간에 결판을 내려는 성향이 강했다.
그러나 백수의 거인은 오십 개의 머리에서 나오는 지속적인 집중력을 통한 장기전에 능했다.
초반의 이득을 통해 후반을 무난하게 이기느냐, 초반을 버티고 후반에 역전을 노리느냐.
그 정도의 차이.
지금까지 촉수의 탐구자는 더 많은 고지의 점령을 통한 압도적인 포인트 수급과 지속적인 압박을 통한 강제적인 능력 사용 압박으로 이득을 챙겨 왔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전과 달랐다.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두 개의 고지를 점령했음에도 서로 비슷하게 모인 포인트.
예상치 못하게 빼앗겨 버린 탐구자의 고지.
변수에 변수가 겹쳐 초반부터 승산은 거인의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비록 후반의 집중력이 자신보다 떨어질지언정, 상대는 자신과 라이벌로 묶이는 성좌였다.
무엇보다 전장에 대한 이해도가 월등히 높았기에 언제라도 새로운 전략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그랬기에 백수의 거인은 지금 숨통을 끊으려고 무리하는 것보다 미래를 보고 조금씩 압박하는 선택을 골랐다.
[(BLUE) 성좌 백수의 거인이 첫 번째 전쟁 확장을 시작합니다!]
[(BLUE) 앞으로 20분 뒤, 백수의 거인 측 2스테이지가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으며 가장 익숙한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
망할. 촉수의 탐구자는 속으로 온갖 모독적인 말을 떠올리며 전장을 노려보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어디서부터?
촉수의 탐구자는 전장 전체를 빠르게 훑다가 저번의 전쟁과 다른 변수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방심했다. 저번처럼 적의 공세를 한 번 막아 내고 진출한다는 전략은 상대가 새롭게 들고 온 우주방어 전략에 파훼 되었다.
적 지휘관이 우연히 합류한 새로운 인물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것도 저번과 달랐고, 혼자서 고지를 탈환하려고 움직일 정도로 미친놈이 있을 줄도 몰랐다.
이 모든 변수가 합쳐져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초반에 강한 자신이 초반에 승기를 넘겨 주다니.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촉수의 탐구자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전쟁은 길고, 전쟁 확장을 통한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촉수의 탐구자는 지금이 승패의 분기점이라고 생각하며, 히든카드를 꺼내 들었다.
[(RED) 성좌 촉수의 탐구자가 책장에서 계몽의 서를 꺼냅니다!]
[(RED) 성좌 촉수의 탐구자가 뒤틀린 계몽 특성을 통해 빠르게 전쟁 확장을 시도합니다!]
[(RED) 앞으로 10분 뒤, 촉수의 탐구자 측 2스테이지가 연결됩니다. 뒤틀린 계몽으로 인해 부활에 필요한 에너지가 20% 증가합니다!]
후반까지 결판이 나지 않을 경우 쓰려고 했던, 히든카드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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