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34화]탐색전
* * *
[(BLUE) 백수의 거인 : 이번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 네놈과 다시 싸우기 위해서.]
[(RED) 촉수의 탐구자 : 배당, 사전 예측, 병력의 질, 나의 피지컬, 전략과 최근 전적. 모든 것이 나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 너의 모든 것은 사라지리라.]
[(ALL) 성좌 인터뷰 시간이 끝났습니다. 3초 후 탐색전이 시작됩니다.]
[(ALL) 고지를 점령해 당신의 성좌에게 도움을 주십시오. 당신의 성좌는 헌신에 보답할 것입니다.]
3.
2.
1.
허공에 솟은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있던 반투명한 푸른 막이 사라졌다.
저 멀리 세 군데의 언덕에 화살표 모양의 기둥이 생성되었다.
아마도 저기가 고지겠지. 도미닉 경은 최전방에서 전장을 확인하자마자 달렸다.
[(BLUE) 성좌가 중앙과 왼쪽 고지를 포기하고 오른쪽 고지만 점령하고자 합니다.]
[(BLUE) 지휘관 스트렐치가 자기 특성 [가혹한 행군]을 발동합니다. 모든 아군의 발걸음이 30초 동안 가벼워지지만, 이후 10초 동안 탈진합니다.]
도미닉 경은 마지막에 최전방에 합류했기에 가장 오른쪽에 서 있었다.
스트렐치의 특성이 합쳐져 가장 빠른 경로로 뛰어간 도미닉 경은, 자신을 추월해 달려가는 이들을 보며 더욱 빠르게 뛰었다.
망원경과 무전기, 망치와 삽을 든 인원들은 가장 먼저 오른쪽 고지를 점령했다.
언덕에 오른 망원경을 든 이는 주변에 적의 병력이 있는지 탐색하기 시작했고, 무전기를 든 이는 순식간에 주둔지와 고지 사이의 통신망을 연결했다. 망치와 삽을 든 이들은 포대자루에 흙과 모래를 담아 간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당장 요새화 시켜! 무전병! 지금 연락망 완성했나?"
다음으로 올라온 것은 도미닉 경처럼 최전방에 섰던 전사들이었다.
전사들은 한두 번 전쟁을 겪은 것이 아닌지 순식간에 완성된 간이 벽에 기대어 각자의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도미닉 경도 그 사이에 껴 방패를 거치하고 검을 빼어 들었다.
"흐."
전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곳을 지키는 향토병들을 따라 하라.
도미닉 경은 징집병 시절 징집관이 지겹도록 말한 격언을 생각했다.
"요새화 끝났으면 벽을 더 올리고 해자를 파! 정찰병! 적의 군세는?"
지휘관 스트렐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요새화를 하는 이들을 독려 했다.
쉴 새 없이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목이 쉴 만도 하련만, 여전히 그는 호랑이가 울부짖듯 쩌렁쩌렁 지시를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근처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지휘관의 예측이 옳은 모양입니다!"
"좋아. 하지만 적은 기만과 속임수로 유명한 촉수의 탐구자다. 당장 통신병은 레이더 센터와 릴레이 노드를 연결해 은신한 적들을 감시하도록!"
"네!"
스트렐치는 이 전장에서 오래 있었던 만큼 다른 이들의 특성을 잘 알았다.
스트렐치가 모르는 특성을 가진 이는 처음으로 전장에 참여한 도미닉 경뿐이었다.
"거기 기사! 너는 무슨 특성을 가지고 있지?"
"[탱커], [기수]요."
"기수?"
"패시브로 깃발을 설치해 아군이 입는 피해를 4% 감소시킨다더군."
"거리는?"
"적혀 있지 않았소."
"좋아. 확실히 좋군. 이번에는 이길 것 같아."
스트렐치는 곰처럼 껄껄거리며 웃었다.
4%는 적어 보이는 수치였으나, 전장에서 한 번에 죽느냐, 아니면 한 번을 더 막고 죽느냐는 큰 차이였으니까.
설령 효과 범위가 좁아도 상관없다. 애초에 성좌 백수의 거인과 스트렐치가 세운 전략은 고지 하나만 확실하게 먹는 것이었고, 이는 전선이 좁다는 것을 의미했다.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눈 덮인 설원에 순식간에 성벽과 해자가 생겼다. 성벽 안에는 은신한 인원들을 감지하는 통신계열 타워들이 세워졌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페럴란트의 문양이 그려진 갈색 깃발이 그 사이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아마 적들은 천천히 중앙 고지부터 점령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여기에 도착해 포인트를 벌었기에 적이 나머지 두 고지를 점령해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스트렐치는 성벽에 올라 쌍안경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손은 권총 홀더 위에 올려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경계하면서 말이다.
그의 예측은 옳았다. 각 고지는 제법 먼 거리에 있었으나, 모두 언덕에 위치해 있어 고지에서 다른 고지를 볼 수 있었다.
도미닉 경도 성벽 위로 올라가 살을 에는 바람을 무시하며 중앙 고지를 보았다.
촉수의 탐구자의 인원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중앙 고지에 오르더니, 이내 오른쪽 고지를 미리 점령한 백수의 거인 팀의 요새를 보고는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RED) 성좌 촉수의 탐구자와 지휘관 예카테리나가 블루 팀의 전략을 비난합니다.]
[(BLUE) 성좌 백수의 거인이 기만은 너의 영역이 아니었냐며 비아냥거립니다.]
촉수의 탐구자는 저 요새를 처리하지 못하면 백수의 거인이 그토록 연마한 후반 지향형 빌드에 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요새는 탐색전에서 무너뜨리기에는 너무 단단하게 변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촉수의 탐구자가 요새를 무너뜨리는 대신, 차선책을 선택했다.
촉수의 탐구자의 명령받은 예카테리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이들에 명령을 전달했다.
최대한 요새를 공략해라. 저들의 신의 힘은 자기 신의 힘보다 포인트가 많이 들기에 한두 번 쓰면 고지를 두 개 점령한 자신보다 포인트가 모자란 시점이 올 것이다.
이후 오히려 자신이 빠른 전쟁 확장을 통해 요새를 무너뜨리면, 적은 가을 낙엽처럼 스러지리라.
예카테리나는 고지를 점령할 두 팀을 제외한 모든 인원을 끌고 요새로 향했다.
어차피 자신들은 에너지가 넘쳐났다.
시간만 지나면, 다시 전선에 복귀할 수 있으니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초반 탐색전은 공성전으로 시작되었다.
"적이 옵니다! 확실히 우리 인원보다 많습니다!"
"우린 성벽이라는 유리함을 가지고 있다! 예카테리나의 저격만 조심하면 나머진 신경 쓸 필요도 없어!"
스트렐치가 긴장한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소리쳤다.
그때, 저 멀리 설원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탕!
스트렐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다가온 총탄에 죽음을 직감했다.
이번에도 저 비열한 년의 공격에 한 번 죽는구나.
다시 살아나면 반드시 저년을 찢어 버리리라.
스트렐치는 눈을 감고 평온한 마음으로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직 스트렐치는 죽을 때가 아니었다.
핑! 하고 총탄이 빗나가며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당신은 죽을 때가 아닌 듯 싶은데."
스트렐치는 아직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듯 감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앞에는 도미닉 경이 방패를 올리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전장에 나와 있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이 살을 에는 추위.
걷기 힘들 정도로 쌓인 눈.
쉴 새 없이 긴장해야 하는 고통.
그 모든 것이 그의 신체를 자극해 엔돌핀과 아드레날린을 분비했다.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도미닉 경은 저 멀리 날아오는 총알을 바라볼 정도로 예민한 상태였고, 그 총알의 궤적을 확인해 방패로 빗겨낼 수 있을 정도로 순간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 지휘관 스트렐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
스트렐치는 눈앞에 기사를 보았다.
동공이 크게 축소되어 상대를 노려보는 듯한 에메랄드빛 삼백안.
지금 상황 자체가 즐겁다는 듯 활짝 웃는 입꼬리.
무엇보다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즐겁다는 감정.
스트렐치는 기사가 자신과 같은 전쟁광임을 깨달았다.
아니, 사실은 달랐다.
도미닉 경은, 스트렐치 이상으로 전쟁광이었다.
스트렐치는 이런 사람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도 전쟁광이었으니까.
날뛰어도 될까? 내려가서 상대와 겨뤄봐도 돼?
도미닉 경의 눈빛이 스트렐치에게 그렇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이름이 뭐지?"
"도미닉 경.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진짜 기사였군. 컨셉이 아니었어."
스트렐치는 도미닉 경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의 뻣뻣한 수염의 끝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경에게는 특별한 임무를 주지. 저 아래에서 오는 이들을 모조리 족치는 거요. 우리 쪽 성좌가 전쟁을 확대하기 전까지..."
스트렐치는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이내, 말을 고쳐서 말했다.
"아니,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날뛰는 거요. 이해했소?"
"이해했소."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에 온 이후 가장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족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지."
도미닉 경은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평소라면 자살이라도 하는가 싶었겠으나, 성벽의 아래에는 이제 사람의 허리까지 오는 눈이 쌓여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그 눈이 충격을 흡수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판단하고, 명령을 수행할 가장 짧은 루트로 지정한 것이다.
"미쳤군. 미쳤어."
스트렐치는 그런 도미닉 경의 행동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보기에도 도미닉 경은 충분히 미친놈이었다.
눈에서 멀쩡히 상체를 들어 올린 도미닉 경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보고 난 이후, 스트렐치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뭣들 하나! 적들이 올 거야! 성좌가 능력을 사용하면 우리가 반드시 진다! 최대한 우리의 힘으로 버텨야 승산이 있어!"
그리고 호통을 치며 웃었다.
누가 누구에게 미친놈이라고 한단 말인가?
본질적으로 이 전장에 속한 이들은 그 정도가 크고 작을 뿐, 다 같은 부류였다.
전장은 고상하고 우아하며 지적인 사람들의 공간이 아니다.
전장은 미친 짐승들이 이끌어나가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는, 미친 짐승들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