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33화]탐색전
* * *
"빨리빨리 움직여! 시간 없다! 조금 있으면 성좌 인터뷰가 있고, 그다음 바로 시작이야! 그 전에 배치를 끝내야 한다!"
곰보다 덩치가 큰 이반 스트렐치가 소리치자 용병들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아, 이번엔 성녀님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뭐, 2스테이지 열리면 지휘관이 바뀌니까 기대해보자고."
"잡담할 시간이 어딨나! 당장 자기 위치로 가! 최대한 전방에 붙으란 말이다!"
용병들의 잡담을 들은 스트렐치가 버럭 화를 냈다.
용병들은 들은 체 만 체 천천히 걸음을 옮겼으나, 이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스트렐치가 권총을 뽑고 나서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이 상황이 마치 자신이 징집되었을 때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수많은 역경을 거치고 전장의 공포를 외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왜 그렇게 기사들과 장군들의 호통 소리가 무서웠는지.
도미닉 경은 추억에 잠겨 피식 웃었다.
스트렐치는 도미닉 경의 근처를 지나가다가 도미닉 경이 피식 웃는 것을 보았다.
이미 세 병의 보드카를 마신 그는 도미닉 경이 자기 권위를 무시하고 비웃는다고 생각했다.
"이봐! 거기 너!"
얼굴이 새빨개진 스트렐치가 도미닉 경을 불렀다.
"넌 최전방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넌 후퇴하는 즉시 추방이니 알아"
그때였다.
저 멀리 갑자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핑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트렐치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에 찬 야전삽을 꺼내 넓은 부분으로 날아오는 것을 막아 내었다.
깡! 소리와 함께 야전삽이 구부러졌다.
누군가가 쏜 총알이 스트렐치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온 것이다.
스트렐치는 그 누구보다 이 총알을 쏜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설마 이걸 막아 낼 줄은. 많이 컸다, 스트렐치?"
스트렐치가 분노에 차 내지른 소리에 집결지 주변 언덕에서 누군가가 은신을 풀고 나타났다.
붉은 베레모에 검붉은 코트를 입고 어깨에 키보다 큰 저격총을 걸친 여성은 땋은 긴 금발을 어깨너머로 넘기며 스트렐치에게 손을 흔들었다.
"명예도 모르는 겁쟁이가 말이 많군, 예카테리나."
스트렐치가 이죽거렸다.
"아무리 탐색전이라고 해도 아직 공세는 허락되지 않았을 텐데?"
"물론, 그저 인사였지. 네가 이런 허접한 사격에 죽을 리가 없으니까."
예카테리나라고 불린 인물은 자기 베레모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붉은 베레모에 달린 금색 백합 장식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사실 네가 저번처럼 바로 탈락할까 봐 미리 인사하러 왔어. 지금이 아니면 도저히 기회가 없을 거 아냐?"
예카테리나가 반대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했다.
스트렐치는 그 도발에 바로 넘어가 얼굴이 터질 듯 피가 몰렸다.
"예카테리나! 네년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일 거다. 죽이고 또 죽여서 다시는 이 신성한 전장에 오지 못하게 할 거다, 이 명예도 모르는 년!"
"네, 네. 잘해 보시라고. 저번처럼 엉엉 울면서 집에 가지 말고."
"예카테리나!"
예카테리나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인 스트렐치를 보고 비웃으며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탐색전이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스트렐치는 예카테리나에게 진 상황.
그러나 스트렐치는 예카테리나가 사라지자마자 언제 분노했냐는 듯 얼굴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기만의 기만.
자신을 얕보게 하기 위해 스트렐치는 이성을 잃은 듯이 굴었다.
전쟁은 일어나기 전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보아하니 예카테리나의 군세는 후방에서 방진을 구축할 거다. 우리의 전진 배치를 보고 막기만 해도 이길 거로 생각하겠지."
스트렐치는 화가 난 것이 맞았으나, 오히려 화가 끝까지 나면 이성적인 상태가 되듯 그의 상태가 그러했다.
술 기운마저 날아간 스트렐치는 주머니에서 대충 종이에 싼 궐련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기다린다. 1스테이지 인원은 우리가 훨씬 적어. 하지만 백수의 거인은 고 코스트 인원을 선호하니까 후반으로 갈수록 우리가 유리해지지."
적이 방어를 원한다면, 오히려 우리가 이득을 모두 챙길 수 있다. 스트렐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사람이 바뀐 듯 구는 스트렐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보나, 용병? 보아하니... 기사 같은데."
"그렇소."
스트렐치는 광대뼈가 하늘에 닿을 듯이 웃었다.
"기사라. 낭만을 선택한 이가 여기 또 있었군."
"그나저나, 얼마나 여기에 있었던 거요?"
도미닉 경은 스트렐치의 비범함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순식간에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건 하루 이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소."
"수백 번."
스트렐치는 궐련을 쭉 들이켰다.
필터도 없이 독한 연기를 그대로 머금은 스트렐치는 한숨과 같이 연기를 뿜었다.
차가운 공기에 피어오른 입김과 섞여, 스트렐치의 얼굴을 반쯤 가려 버려 그의 표정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수백 번을 싸웠지. 난 전쟁광이거든."
그의 밀랍칠한 듯 뻣뻣한 수염이 고슴도치처럼 일어났다.
"나 같은 전쟁광은 이런 대 전투를 끊지 못해. 절대로."
도미닉 경은 자욱한 연기에 그의 표정을 보지는 못했으나, 그의 목소리에 담긴 자학과 떨림, 그리고 환희와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싸우다 죽는 거지. 그보다 더 좋은 것? 싸우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 싸우는 거고."
스트렐치의 손에 끼워진 궐련은 이미 끝까지 타 그의 손에 화상을 입혔으나, 전쟁의 짜릿함에 도취된 스트렐치는 뜨거움과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도미닉 경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행복함을 느낄 때처럼, 저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도미닉 경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저런 전쟁에 미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튼, 이제 곧 시작하겠군. 탐색전이."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오?"
도미닉 경은 스트렐치의 옆에 서서 전장을 바라보았다.
눈이 무릎까지 오는 설원에서 사람들은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 것으로 생각했다.
"탐색전이 끝나면 성좌가 포인트를 통해 전쟁을 확대하지."
스트렐치는 잠깐의 시간 동안 도미닉 경의 물음에 대답하기로 했다.
방금 비웃었다고 생각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말을 나눠보니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무엇보다 이렇게 열심히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각 지역마다 고지라고 불리는 곳이 있어. 그곳을 점령하면 성좌에게 포인트가 들어가지. 성좌는 그 포인트를 통해 2스테이지, 3스테이지 등을 끌어와 전쟁을 확대시키거나, 신의 힘을 사용해 우리의 전투를 지원하지."
"에너지가 충분하다면, 죽어도 일정 시간 후에 다시 들어올 수 있어. 이날을 위해 에너지를 모아두는 녀석들도 많으니 주의하도록."
"백수의 거인은 빠른 전쟁 확장을 통해 고코스트의 지원군으로 전장을 장악하는 것을 좋아하지. 다만 그 성향 때문에 초반에 고지전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고지전에서 굴러간 스노우볼 때문에 전쟁 확장도 늦어져 지는 경우가 많아. 저번에도 그랬지."
"반면 촉수의 탐구자는 계몽이라는 신의 힘으로 낮은 등급의 병사들을 일시적으로 높은 등급으로 진보시킬 수 있어. 저번에 우리가 진 이유도 그 때문이었지. 초반에 병력의 질이 차이가 나는 바람에 전쟁 확장도 늦어지고 포인트도 모이지 않아 그대로 지고 말았던 거야."
오랫동안 이 전장에서 살아온 스트렐치는 말하면서 점점 더 많은 지식을 풀어냈다.
도미닉 경은 그 말들을 하나하나 경청했다.
"이제 곧 시작이군. 성좌 인터뷰가 끝나면 바로 시작이니, 자네도 이제 자리로 돌아가. 후퇴해도 추방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싸우라고."
스트렐치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ALL) 곧 성좌 인터뷰가 시작됩니다. 인터뷰가 끝나는 즉시 탐색전이 시작되니 양 팀은 준비를 마치십시오.]
스트렐치의 시간 감각은 정확했다.
도미닉 경은 바로 앞에 뜬 시스템 창과 스트렐치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최전방으로 향했다.
최전방에는 반투명한 막이 있어 더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도미닉 경이 그 반투명한 푸른 막이 신기해 손을 대어보니 눈앞에 경고 창이 떠올랐다.
[본인이 [전진배치], [척후병], [기습의 대가]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팀에 [전술의 대가], [전략의 대가] 특성을 가진 인원의 허락, 혹은 명령이 있어야만 이 막을 넘을 수 있습니다.]
과연. 아쉽게도 도미닉 경은 그 어떤 특성도 해당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ALL) 성좌 인터뷰를 시작합니다. 부작용과 부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부득이하게 공지로 표현하는 점, 양해바랍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BLUE) 백수의 거인 : 이날만을 기다렸다. 너에게 설욕할 날을.]
지평선 너머에서도 상체만 보이는, 하늘에 닿을 듯한 거인.
그 거인은 백 개의 손과 오십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목 늘어난 티셔츠와 후드가 달린 검은 패딩을 입고 있었다.
[(RED) 촉수의 탐구자 : 이게 누구신가. 백수 아니신가? 그래, 저번에 내가 이겼던가, 졌던가?]
반대편 지평선에서 땅과 하늘을 지탱할 만한 기둥처럼 보라색과 녹색이 섞인 촉수가 올라오더니, 흐물거리는 촉수 끝에서 해와 달보다 큰 눈이 나타나 비웃음을 날렸다.
성좌의 크기를 보니, 부작용과 부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채팅으로 대화한다는 게 왜 필요한 일인지 절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RED) 촉수의 탐구자 : 아, 그렇군. 내가 이겼었지. 너무 사소해서 기억할 가치도 없었던지라. 미안하네.]
[(BLUE) 백수의 거인 :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꿈틀거리는 지렁이 같은 놈.]
[(RED) 촉수의 탐구자 : 뭐어라고? 패배자의 말이라 안 들리는데?]
[(BLUE) 백수의 거인 : 상대 전적은 내가 우위에 있다. 최근 전적만 패배일 뿐. 너는 예전으로 돌아가 내게 패배할 것이다.]
성좌들의 기 싸움은 치열했다.
그러나
[(RED) 촉수의 탐구자 : 풋. 최근 전적 1승 너 개 못하잖아. 푸흐흐하하하핫!]
아무래도, 성좌의 기 싸움도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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