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32화]가차랜드 31
* * *
도미닉 경은 어제 난투로 인해 엉망이 된 옷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구도 수리는 크레딧으로 결제할 수 있었다.
처음 샀던 때처럼 말끔해진 예복을 입은 도미닉 경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멋지군. 도미닉 경은 자아 도취 상태에 빠졌다.
"얼마나 좋으면 그러고 있냐."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경비실.
도미닉 경은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그곳엔 낯선 이가 있었다.
푸른 경비복과 경비 모자를 장착하고 있었으나, 여섯 개의 뿔에 기괴한 역 삼각형의 상체, 가시가 돋아난 팔과 커다란 박쥐의 날개를 단... 도넛을 한입에 털어 먹는 악마였다.
도미닉 경은 순간 검을 뽑고 방패를 앞세웠다.
"나야, 나. 후배. 왈록이라고."
악마에게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일이 있어서 본 모습으로 나온 거야. 일이 끝나면 바로 갈 데가 있거든."
이 모습은 칼로리 소모가 심하단 말이지. 라며 도넛을 한 번에 다섯 개를 먹은 왈록이 말했다.
도미닉 경은 악마에게서 평소의 왈록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나, 도넛을 먹고 행복해하는 표정으로 왈록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왈록이라는 것을 알아낸 이상, 도미닉 경은 검을 뽑을 이유가 사라졌기에 태세를 풀었다.
그리고 갑자기 든 의문을 바로 내뱉었다.
"어딜 가시기에 그렇게 흉흉하게 하고 갑니까?"
"3지역. 오늘 빅매치가 열리거든."
3지역.
도미닉 경은 문득 자신이 3지역을 깨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본래 경기장에서 열리는 전투를 위해 스토리 모드를 깨려고 했으나, 가차랜드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깜빡 잊고 살았던 것이다.
"3지역은 도대체 무슨 기믹을 가지고 있습니까?"
도미닉 경은 한껏 자기 근육을 점검하던 왈록에게 물었다.
"3지역이라. 그러고 보니 후배는 아직 3지역을 안 가 봤지?"
왈록은 투박하게 크고 뾰족한 손톱으로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뭐랄까. 3지역은 하나야. 겉으론 1스테이지부터 6스테이지까지 구분하지만 사실 하나로 된 스테이지야. 그래서 잘만하면 3지역은 한 번에 깰 수 있어."
그러기가 쉽진 않지만. 왈록은 작게 덧붙였다.
"무엇보다 3지역 특유의 맛이 있어서, 한 번 맛들린 사람은 다시 3지역을 찾아가지. 나도 그렇고."
특히 빅매치를 경험하면 그 누구라도 3지역에서 빅매치가 다시 열리기를 바란다고.
도미닉 경은 이제 녹슨 칼날이 가득 달린 채찍과 해골로 장식된 대검을 들고 점검하는 왈록을 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3지역은 어떤 곳이길래 저 왈록이 저렇게 즐거워하는가?
도미닉 경의 감이 말했다.
이건 분명 즐겁고 행복한 곳이라고.
"그럼 저도 이번 기회에 3지역을 깨야겠군요."
"쉽지 않을걸, 후배?"
왈록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도미닉 경에게 조언했다.
"3지역 하나라도 깨면 대단한 일이지. 심지어 이번엔 빅매치라 더욱 힘들 거고. 이때만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몰릴걸?"
왈록도 이미 깬 상태지만 다시 참가하고 싶어 움직이고 있었다.
가차랜드에 왈록처럼 이 상황만 기다린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빅매치라고 하시는데, 빅매치가 뭡니까?"
도미닉 경은 계속해서 나오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대해 물었다.
"말 그대로 큰 싸움이지."
왈록이 씨익 웃었다.
평소라면 사람 좋은 미소였겠으나, 가시가 가득 달린 여섯 뿔의 악마가 짓는 미소는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3지역 자체는 항상 열려 있지만, 주기적으로 리셋이 된단 말이지. 그리고 이 지역을 관리하는"
왈록은 도미닉 경에게 말을 하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능글맞게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직접 알아보는 게 더 재밌을 수도 있겠네. 후배, 화이팅!"
왈록은 놀리듯 말하고는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얼마나 빠르게 사라졌는지, 도미닉 경은 차마 그를 잡지 못했다.
"어쩔 수 없나. 어차피 3지역도 깨야할 테고. 경험한다고 생각해야겠지."
한숨을 푹 쉰 도미닉 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거울을 보며 옷깃을 매만졌다.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옷이었다.
...
오랜만에 들어선 스토리 모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야, 진짜 기다리길 잘했어. 이때를 위해서 에너지를 모아 두고 있었다고!"
"난 3번쯤 재시도 가능한데, 너는?"
"난 진짜 열심히 모았지. 7번은 재시도 할 수 있을걸?"
"진짜 기대된다. 이번 배당은 어디로 기울까?"
"아무래도 반반 아닐까?"
스토리 모드에서도 3지역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각자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그 줄의 가장 끝에 섰다. 얼마나 줄이 길었던지 3지역 1스테이지를 누르는 버튼이 깨알만하게 보일 정도였다.
줄은 천천히 줄어들었으나 도미닉 경은 지루하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시간이 잘 갔으니까.
"설마 이번 매치업이 그렇게 될 줄은."
"그러니까. 이거 10년 만이던가? 저번 승리를 누가 했더라?"
"레드 아니었나? 레드를 이끌던 이가 누구더라..."
"뭐, 들어가면 기억나겠지. 성좌들의 닉네임은 외우기 힘들단 말이지."
스테이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이번엔 컨셉이 뭘까? 바로 이전 컨셉이 말이었지?"
"그때만 생각하면 엉덩이가 배겨. 온종일 말타고 다니는 놈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몸을 가진 거야?"
"수상전만 아니면 좋겠는데. 수중도 그렇고."
"난 하늘섬 기믹이 그렇게 싫더라. 뚜벅이들은 뭐하고 있으라고."
컨셉과 기믹에 대한 실마리.
"난 이번에 용병으로 들어가려고. 클랜장이 잠수 탔거든."
"저런. 우리 클랜 올래? 우린 부 클랜장이 둘이나 있을 정도로 크거든."
"생각해 보고. 애정이 깊은 클랜이라서 아직은 남아 있으려고."
용병과 클랜이 구분된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일종의 전쟁일까? 아니면 생존? 팀이 존재하니 팀 별로 무언가를 하는 것일까?
도미닉 경은 한참 동안 스테이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으며 나름 스테이지의 기믹을 유추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도미닉 경이 스테이지에 입장할 순간이 다가왔다.
"2성이시네요. 3스테이지는 클리어하지 않으셨고. 이런 분은 또 처음이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몰리자 돌발 상황을 대처하려고 파견 나온 GM이 도미닉 경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아무튼, 즐거운 하루가 되길 기원합니다."
도미닉 경은 GM의 인사에 고개를 숙여 화답하고는 스테이지를 선택했다.
활성화된 스테이지는 31 밖에 없었기에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도미닉 경은 언제 봐도 주변이 변화하는 이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번엔 꽤 큰 스테이지인지 로딩이 시작되었다.
로딩바가 뚝뚝 끊기며 아슬아슬하게 올라가더니 마침내 마지막 결승점을 넘었다.
도미닉 경은 새로운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대기실에 오신 용병 여러분, 환영합니다!"
단상 위에 선 요정과 그 뒤에 적힌 [RED]1.2 : 1.4[BLUE] 이라는 글자.
도미닉 경은 저게 무엇일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곧 요정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여러분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바로 그 매치업! 성좌 [백수 거인]과 성좌 [촉수의 탐구자] 사이의 먹고 먹히는 라이벌 싸움! 지금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도미닉 경은 이 상황을 이해하진 못했기에 요정이 더 설명하길 기다렸다.
"현재 여러분들이 보시는 것은 각각 레드팀과 블루 팀에게 걸린 배당률입니다! 성좌들께서 포인트 도박을 열어 신중하게 결정하신 비율이니 여러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여러분은 용병으로서 팀을 골라 참가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여러분은 질 것 같다면 상대에게 붙어 배신을 하셔도 됩니다. 대신, 이전까지 그 팀에서 얻었던 보상은 포기할 수밖에 없겠죠!"
다 아는 사실을 말하지 마라! 라고 야유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미닉 경은 요정의 설명을 통해 대략적인 스테이지 기믹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곳은 거대한 전쟁터였다.
두 성좌들의 싸움이 일어나는 거대한 전쟁터.
"저번 시즌까진 여러분께 전장의 상황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을 했습니다만..."
요정이 말끝을 흐렸다.
"이번에 블루팀과 레드팀 모두 정보 차단 및 교란 능력이 있는 능력자가 참가해 전장의 상황을 알려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 젠장. 이번에도 질척거리겠군. 너무 피곤하게 하는 거 아니야? 라는 야유가 들렸다.
"어쩔 수 없이 여러분은 여기 배당을 보고 원하는 곳에 가시면 됩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블루팀이 [백수 거인], 레드 팀이 [촉수의 탐구자]입니다. 시간 내로 선택하지 않으시면 스테이지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해 이번 시즌 동안 출입을 막겠습니다. 그럼, 시작 하겠습니다!"
용병으로 참여한 이들이 빠르게 각 진영으로 다가 갔다.
각 진영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푸른색을 터치한 이들은 대기실에서 사라졌다.
배당률 표 위에는 2분 17초가 남았다고 표시하고 있었기에, 생각할 시각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도미닉 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촉수보다는 거인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 파란 패널을 눌렀다.
그러자 장소가 또 한 번 바뀌며 로딩창이 나타났다.
로딩창이 끝나고 나서 다시 시야가 돌아왔을 때.
쨍그랑!
"어서 와라, 애송이 용병 놈들아. 블루팀 1스테이지 지휘관을 맡게 된 이반 스트렐치라고 한다. 잡것들."
곰 가죽으로 된 모자와 망토를 두르고, 밀납을 바른 듯 뻣뻣한 수염을 가진 자가 빈 보드카 병을 집어던지며 용병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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