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24화]나만의 작은 로그라이크
* * *
신이 있다면 말해주십시오.
도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우린 길을 잃은 듯 싶소."
"소인이 천장을 봤습니다만, 그마저 길이 끊어져 있더군요."
"인식. 최선의 상황을 위한 해결책을 검색합니다."
어두운 공간에 놓인 드럼통.
그리고 그 드럼통에서 폐자재를 태워 피어오르는 불길.
말라붙은 페인트가 쩍쩍 갈라진 드럼통을 사이로, 세 사람이 여기 있나이다.
"흐. 그래도 재밌지 않소. 이 정도 모험이라면 얼마나 큰 보상이 있을까!"
여기 육지의 상어라 불리는 해적 기사가 흥미롭게 미래를 바라보나이다.
"돌아가야 합니다. 주군이 제 보고를 기다릴 테니까요."
여기 이국의 쿠노이치가 자기 과거에 얽매이나이다.
"답변 : 현재 데이터로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습니다."
여기 고도로 발전한 안드로이드가 현실을 직시하나이다.
신이 있다면 말해주십시오.
과거, 현재, 미래...
도대체, 우린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시야가 멀어지며 세 사람이 점처럼 작아졌다.
주변에 불타오르는 불빛과 붉게 점멸하는 경고등 사이로 엉망이 된 실험실이 얼핏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그 사이로 헤드셋과 바이저를 낀 좀비들이 달려가는 것으로 영상이 끝났다.
"브라보! 브라보!"
오색바람의 하네스는 게임의 인트로로 들어갈 영상을 보고 감동에 가득 차 기립해 연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비록 스마트폰으로 찍어 화질은 좀 그랬으나, 어차피 제작 그 이상에 의의를 두지 않았기에 충분히 좋은 퀄리티였다.
"우리가 여기까지 하다니. 믿을 수 없는데."
도나텔로가 울먹거렸다.
"진짜 게임을 하나 만들어 버렸잖아."
개발자들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감동에 어쩔 줄을 몰랐다.
사실 지금 만들어진 것은 데모 버전으로, 1지역까지만 플레이 가능하도록 만든 상태였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제출용으로 밤을 새가며 플레이 가능한 상태로만 만든 것이다.
"진짜 나왔네요."
히메는 인트로를 보고 나서 도미닉 경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캐릭터를 쓰는 부분은 이미 다 끝났기에 도미닉 경은 다시 페럴란트 기사예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화면에 또 다른 내가 움직이는 건, 참 기묘한 일이구려."
이 게임과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감격했지만, 도미닉 경 만큼 이 놀라운 광경에 감동으로 벅차오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도미닉 경은 화면에서 움직이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모션 캡쳐, 상호 작용 대사, 심지어 잠수 시 전용 대사를 넣겠답시고 3시간 동안 혼자서 남았을 땐 미치는 줄 알았다.
"[게임] 폴더에 새로운 데이터를 축적합니다. 가차랜드의 기반이 되는 만큼 이 데이터는 유용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안드로이드 제로는 특유의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말했으나, 감정을 학습할 수 있는 인공 지능이 탑재된 그녀의 목소리가 언뜻 활기차 보이기도 했다.
"이제 남은 건 중간고사 제출하고, 남은 2지역을 만들어서 기말에 제출하면 되는 거지?"
지나친 야근으로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뱀파이어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어차피 과정은 돈 카스텔로가 찍고 있었잖아."
오색바람의 하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이 정도면, 충분히 과락은 면할 수 있으리라.
"어... 이 정도까지 해 오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학생들."
게임 제작 실습을 맡은 교수 안드레가 당혹스러운 듯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교수가 원했던 게임은 초창기 아케이드 게임처럼 공을 튀기거나, 그저 점프하며 동전을 먹거나 하는 정도였지, 이 정도로 제대로 된 게임을 만드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른 학생들이 제출한 게임은 대부분 플래시 게임 정도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네?"
하네스와 개발자들은 당황했다.
게임을 만들라고 하기에 만들었더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이 정도라면 이번 연말에 있을 연말 인디게임 축제에 내도 손색이 없겠어요. 세상에나. 교수생활 20년 하면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군요."
교수는 주머니에서 안경 닦이 수건을 꺼내 안경을 뽀득뽀득 닦기 시작했다.
하네스는 몰랐으나, 안드레 교수의 이 행동은 마음에 든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려는 일종의 루틴이었다.
"보자, 학생들의 이름이 하네스, 돈 카스텔로, 도나텔로, 라파엘, 그리고 레오나르도라고 했지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기말에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도 A 이상을 드리지요."
교수는 다시 안경을 쓰고 얼굴 하나하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혹시, 대학원 진학할 생각은 없습니까?"
하네스와 개발자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교수실을 나왔다.
도대체 지금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다.
게임을 만들래서 만들었더니, 갑자기 교수가 대학원을 권유한다니.
하네스를 비롯한 개발자들은 우연히 찾아온 기회에 정신이 없었으나, 돈 카스텔로는 다른 관점에서 정신이 없었다.
"연말 인디게임 축제에 내도 손색이 없다라..."
돈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돈 카스텔로는 지금까지 들어간 예산을 가늠해 보았다.
동아리실로 돌아가 장부를 보면 더 자세하게 알겠지만, 돈에 관해선 그 누구보다 명석한 돈 카스텔로는 거의 유사하게 들어간 돈의 액수를 떠올렸다.
300만 크레딧.
대체적으로 성좌들이 즐기는 게임 하나의 가격이 대략 5만에서 6만 크레딧이었다.
그렇다면 최소 5만으로 잡고 100장 이상이면 세금을 제외하고도 이익이 생긴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보다 못한 게임도 100장 이하로 팔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계산을 끝낸 돈 카스텔로는 같이 게임을 만든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거, 출품하자."
돈 카스텔로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개발자들이 모두 중간고사를 제출하러 나간 그 시각, 동아리실에는 세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세 사람 사이엔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제로는 원래부터 과묵한 안드로이드였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평소엔 과하게 활발하던 히메마저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다들 피곤하신가 보오."
이 침묵을 참지 못한 도미닉 경이 말을 이었다.
제로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내비칠 뿐이었으나, 히메는 화들짝 놀라며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그, 피곤하다니 무슨"
"전선이 낙후되어서인지 전기가 영양가가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히메의 호들갑은 제로의 말에 끊겼다.
"아무래도 기업용 선이 아니라 가정용 선인 것도 문제라고 추측합니다."
실제로 제로의 뒤에는 긴 전선이 이어져 벽에 달린 콘센트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최대치로 충전해도 하루에 4시간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탓이었다.
"역시 박사님이 옳았습니다. 실전 기동을 해 봐야 문제점이 눈에 들어온다고 하신 말씀을 삭제 불가 폴더에 저장합니다."
도미닉 경과 제로가 시시한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히메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째서일까? 해적 스킨의 도미닉 경을 본 이후로, 히메는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듯, 해적 스킨의 도미닉 경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도미닉 경을 보고 되살아난 것뿐이었으나 곱게 자란 히메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 리 없었다.
히메는 이 요상한 감각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으나, 한 가지 사실은 알았다.
이 감정을 알려면, 도미닉 경에게 말을 걸어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저기"
"우리 왔어! 이야, 이게 또 이렇게 되네."
히메가 말을 걸려던 그 순간, 이제는 고쳐진 문을 열고 동아리 부원들이 들어왔다.
히메는 자기감정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차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중간고사라는 일은 잘되었소?"
도미닉 경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일이 잘 풀렸겠다고 생각했으나, 혹시 몰라 물어보았다.
"중간고사는 물론, 기말까지 잘 될 것 같긴 해."
"그러게. 아. 맞다. 이 분들에게도 그거 말해야 하지 않아?"
"아. 그렇지."
개발자들은 오는 길에 급하게 뽑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여기 사인해 줄 수 있을까?"
하네스는 종이와 볼펜을 그들 앞으로 내밀었다.
거기엔 캐릭터 인센티브 계약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 시각, 슈퍼 디럭스.
"아니, 도대체 왜 내가 이런 일을 도맡아 하냐고. 캐릭터 섭외해줬지, 음악가 섭외... 는 내 광팬 덕분이었지만. 아무튼 이것저것 다 해줬는데 더 해 달라는 게 말이야?"
슈퍼 디럭스는 방금 받은 전화를 끊고 투덜거렸다.
'혹시 홍보할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어?'
돈 카스텔로의 전화였다.
돈 카스텔로는 다짜고짜 슈퍼 디럭스에게 홍보할 만한 유명인에 대해 물었다.
물론 적당한 사람을 여럿 알고 있었으나, 슈퍼 디럭스는 지금까지 도와준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겨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슈퍼 디럭스가 어떤 사람인가?
마음이 여리고 착해 주변의 부탁을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던가.
'도와주면 순이익의 10%를 주지.'
절대 돈에 마음이 흔들려서가 아니었다.
슈퍼 디럭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마음은 정한 상태였기에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눌렀다.
통화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바로 연결되겠지만, 슈퍼 디럭스는 망설이고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완전히 다잡은 슈퍼 디럭스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그래. 오랜만이야. 응. 응. 그래. 에이, 우리 사이에 뭐 필요할 때만 전화한다고 그래?"
어쩌면 이 결과물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할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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