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22화]나만의 작은 컨셉
* * *
"부럽군. 젠장."
도나텔로는 쿠노이치 히메를 데려간 다크 엘프, 라파엘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닌자라니! 자신이 아는 모든 스토리를 생각해 봐도 닌자가 나와 몰살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건 거의 없다.
그만큼 닌자라는 존재는 치트키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나저나 닌자라."
도나텔로는 북슬북슬한 수염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저들이 닌자라면, 우리도 그에 따르는 캐릭터성을 구축하면 되는 일 아닌가?
도나텔로는 도미닉 경을 슬쩍 바라보았다.
외눈. 도미닉 경의 가장 큰 특징.
"혹시 해적이 될 생각은 없소?"
성질 급한 도나텔로는 도미닉 경에게 직접 물었다.
도미닉 경은 해적이라는 말에 잠시 고민에 빠졌으나,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해봅시다."
도미닉 경은 페럴란트에서 기사로 있을 당시 해전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주군인 앨리스 백작 영애는 공훈을 세우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척박한 페럴란트의 특성상 배가 크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작은 배였기에 페럴란트의 기본적인 전술인 치고 빠지기에 유리했다.
빠른 만큼 멀미도 심하긴 했으나 그런 배에서 익숙해질 정도로 전투 경험이 풍부한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해적이 되는 것 정도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도나텔로는 급하게 동아리 창고에서 옛 유물들을 꺼냈다.
동아리 선배들이 회비를 모아 샀던 싸구려 의상들이었다.
먼지가 두껍게 쌓인 해적 세트를 찾은 도나텔로는 날아오르는 먼지에 콜록거리며 그 상자를 도미닉 경에게 건넸다.
"한 번 입어보시오. 사이즈는 걱정하지 말고. 가차랜드의 옷은 저절로 사이즈를 조절해주거든."
도미닉 경은 페럴란트 기사단의 예복을 벗고 해적 코트와 해골이 그려진 이각모를 썼다.
쿱쿱한 먼지의 냄새가 조금 거슬렸으나, 뜻밖에 옷 자체는 나름 편했다.
"괜찮군. 아니, 아주 어울리는구려."
도나텔로는 누가 봐도 해적처럼 보이는 도미닉 경의 모습에 만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이제부터 당신은 해적이오. 그러나 기사요. 해적 기사라는 뜻이지. 조국의 명을 받고 사략선을 움직이는 명예로운 해적 놈이 된 거요."
명예로운 해적 놈이라는 말 자체가 왠지 모순을 담고 있는 것 같았으나 도미닉 경은 지금 의상이 꽤 마음에 들었기에 계속해서 자기 옷깃을 매만졌다.
"영감이 막 떠오르는군. 좋아. 맵 컨셉이 막 떠오르기 시작했어..."
도나텔로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콘솔창을 띄운 도나텔로는 이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로딩해 그 안을 자신만의 색으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 시각, 쿠노이치를 데려간 다크 엘프 라파엘.
"아니, 그러니까 다시 한번 해봅시다. '반갑소. 쿠노이치 히메라고 하오.' 자. 해 보세요."
쿠노이치 히메는 뜻밖에 표정이 다양한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게임 안에 들어갈 스탠딩 CG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라파엘에게 있어서 이는 호재였다.
닌자 특유의 유연한 몸과 인술로 단련된 화려한 움직임은 라파엘이 생각하는 완벽한 CG, 그 이상이라고 생각해도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반.갑.소. 쿠노이치 히메.라.고. 하.오."
히메는 연기의 대가였다.
발연기의 대가.
긴장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연기를 못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히메의 대사는 누가 들어도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어색하고 이상했다.
"아니, 그 하... 그래요. 일단 잠시 쉽시다. 긴장하신 것 같으니까 한 시간 정도 쉬시고 다시 와주세요. 그동안 맵이나 만들어야겠습니다."
한숨을 푸욱 내쉰 라파엘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손짓으로 히메를 쫓아냈다.
히메는 자기 연기가 얼마나 엉망인지 알았기에 시무룩하게 밖으로 나섰다.
"도나텔로 씨가 일하는 동안엔 잠깐 쉬어도 된다고 하셨으니, 편의점이라도 다녀와야겠군."
도미닉 경은 문을 열고 동아리 방 로비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오래 걸릴 것 같았기에, 시간이 남는 김에 편의점에서 먹을 것이나 살 생각이었다.
도미닉 경이 가차랜드에 무난히 적응한 몇 안 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때, 옆 방의 문이 열리며 시무룩한 누군가가 나왔다.
쿠노이치 히메라고 했던가? 이국적인 도적의 모습을 한 그녀는 얼마나 상심했던지 머리 위에 '나 상심 했소.'를 표현하는 이펙트가 진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히메 씨라고 했소?"
도미닉 경은 기사였다. 그리고 기사는 상심한 여성을 앞에 두고 외면하지 못 하는 법이다.
너무나 시무룩한 모습에 위로라도 할 겸 건넨 도미닉 경의 말에 히메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너무 큰 충격에 빠져 혼란에 빠졌다.
"아이에에에에엑! 해적? 해적? 어째서?"
해적 리얼리티 쇼크!
히메는 유치원 시절, 봉사활동을 왔던 근처의 오빠들의 말을 기억한다.
'야, 해적과 닌자가 싸우면 누가 이기게?'
'닌자가 해적을 어떻게 이기냐?'
'뭐 임마? 해적 따위가'
유서 깊은 닌자 가문이었던 히메는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
그 뒤에 닌자가 더 강하니, 해적이 더 멋지니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당시 히메에게 있어 어른이란 옳은 말을 하는 지혜로운 존재였다.
어른이었던 오빠들이 닌자보다 해적이 더 강하다는 말을 했으니, 이는 사실일 것이다.
...라고 어린 히메의 의식과 무의식에 새겨졌다.
닌자 마을에서 히메의 몸과 마음은 점점 성장해 갔으나, 이미 본능의 영역에 새겨진 해적에 대한 두려움도 같이 커져 나갔다.
혼자서 계속 생각하다 보면 살이 붙고, 또 살이 붙고...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해적이란 독한 럼주를 마시며 브레스를 뿜어대고 크라켄 다리를 떡볶이처럼 씹어먹으며 닌자를 몰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닌자 마을엔 해적이 없었기에 트라우마가 발현될 일은 없었으나 오늘날 마침내 해적을 마주치며 지금까지 누적된 트라우마가 폭발한 것이다!
2성에 달하는 그의 성급도 소용없었다.
이는 본능적이며, 그녀 스스로가 만들어 낸 상성!
결국 히메는 그 자리에서 충격을 못 이기고 주저앉고 말았다.
도미닉 경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황당한 일이다.
갑자기 자신을 본 여성이 충격에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다니.
게다가 그냥 주저앉은 것도 아니고,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무의식적으로 깃발을 꺼내 들었다.
눈앞의 닌자는 같은 일하는 동료, 즉 아군이었고, 지금 그녀는 피해를 받은 것으로 처리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아이에에에에에! 자,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히메의 트라우마는 더 커졌다.
현재 도미닉 경의 깃발은 해적 스킨의 영향을 받아 깃발이 달린 작살로 보이는 상태였다.
히메는 그 깃대가 언젠가 보았던 트래지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어부가 청새치를 잡을 때 쓰던 작살과 겹쳐 보이며 마치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도미닉 경은 더 심하게 경기를 일으키는 닌자의 말에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잡아먹는다니, 그럴 일은 없소."
도미닉 경은 이제 땅바닥을 뒹굴기 시작한 히메를 진정시키기 위해 깃대를 들고 다가 갔다.
"히, 히익! 오지 마! 나에게 다가오지 말란 말이다!"
땅을 구른 탓에 묻은 먼지들과 공포의 영향으로 흐른 식은땀으로 엉망이 된 히메는, 기묘한 자세와 표정으로 소리쳤다.
"궭."
그리고 너무 큰 충격에 마침내 기절하고 말았다.
도미닉 경으로서는,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이봐! 내가 누굴 모셔왔는지 알면 놀랄"
하필이면 이때, 슈퍼 디럭스가 박살 난 문 너머로 들어왔다.
슈퍼 디럭스는 눈앞의 상황에 순간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해적 복장의 도미닉 경.
쓰러진 쿠노이치 히메.
도미닉 경의 손에 들려진 작살.
엉망진창으로 당해 쓰러진 닌자.
이내 무언가 결론을 내린 슈퍼 디럭스는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닌자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거야?"
"그, 오해요."
도미닉 경은 필사적으로 변명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지금, 이 상황에서 도출될 결론은 결코 명예로워 보이진 않았으니까.
"그, 죄송해요. 제가 해적에 트라우마가 있어서..."
잠시 후, 정신을 차린 히메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아직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지는 못했으나, 슈퍼 디럭스가 타준 코코아 한 잔이 나름 진정제 효과를 내었다.
"그, 아가씨가 해적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진 모르겠지만, 다 지나간 일이니까..."
슈퍼 디럭스는 히메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최대한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도미닉 경은 해골이 그려진 이각모를 벗은 상태였다.
"그나저나 이러면 큰일인데. 우리 쪽 컨셉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소."
비명 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도나텔로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참담하게 말했다.
"입에서 손 떼고 말해. 본심은?"
"잘만 섞으면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도나텔로는 슈퍼 디럭스의 말에 입에서 손을 떼었다.
도나텔로의 입이 기묘하게 뒤틀리며 웃고 있었다.
"해적을 두려워하는 쿠노이치. 그리고 해적이지만 여성에게 상냥한 기사. 나머지 하나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것만으로도 꽤 재밌지 않아?"
"과연."
슈퍼 디럭스는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정리해 보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공대 출신에 연애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나 미연시로 단련된 가락이 있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만일 팬이 생긴다면, 이런 케미를 좋아할지도 모르겠어."
슈퍼 디럭스는 무언가를 꾸미듯 사악한 웃음을 띠었다.
"그나저나, 누굴 모셔온 거야? 지금 계속 밖에 서 계시는 거 아냐? 실례일 텐데."
혹시 마지막 캐릭터인가? 아직 캐릭터를 고르지 못한 마지막 개발자, 뱀파이어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아 맞아. 그래."
슈퍼 디럭스는 황급하게 문밖으로 나가 언제 들어갈지 몰라 계단에 쭈그려 앉은 이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소란이 있어서요. 들어오셔도 좋습니다."
슈퍼 디럭스의 말에 계단에서 대기하던 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마지막 캐릭터가 동아리실 내부로 들어왔다.
"인사 프로토콜 실행. 반갑습니다 여러분. 코드 제로 백 입니다. 제로라고 불러 주세요."
은색과 금색으로 꾸며져 신성한 느낌이 드는 안드로이드가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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