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21화]나만의 작은 캐릭터
* * *
"젠장. 내가 왜 그때 가위를 냈을까."
동아리에서 가장 유능한 세 명의 프로그래머 중 하나인 드워프 도나텔로는 방금 전 있었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일단 나도 이 게임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임시 프로듀서로 임명된 슈퍼 디럭스는 음흉한 얼굴로 낙하산 인사를 꽂았다.
도미닉 경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는 무난해 보이는 기사 컨셉이었기에 어디에나 무난하게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기는 했다. 세 명 모두 동의했고.
그러나 세 명의 프로그래머 모두 캐릭터라면 여캐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남캐인 도미닉 경을 꺼려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도미닉 경을 데려갈 사람을 정했고, 치열한 심리전 끝에 걸린 것은 도나텔로였다.
도나텔로는 차라리 슈퍼 디럭스가 오기를 바랬으나, 슈퍼 디럭스는 한 문장으로 일축했다.
"내가 끼기엔 난 급이 너무 높아서."
젠장. 도나텔로는 반박하고 싶어도 슈퍼 디럭스가 얼마나 유명하고 인기 많은 사람인지 알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너무 분했다.
"그, 이제 뭘 하면 되오?"
도미닉 경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도나텔로를 보며 물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이 상황에 대해 잘 알 것 같은 이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다.
"끙. 일단 캐릭터성부터 조금 다듬어 봅시다."
도나텔로는 복슬복슬한 자기 수염을 매만졌다.
장인 정신이 투철한 드워프인 도나텔로는 어쩔 수 없이 넘겨받은 사람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나름 할 만하다고 여겼다.
무난하다는 것은 뻔하다는 말이었으나, 약간의 특이점만 넣어도 익숙한 맛에 자주 쓰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우선 당신은 외눈박이 기사요. 맞소?"
"그렇소."
도나텔로는 자기 공책에 [외눈], [기사]라고 적었다.
도나텔로의 지론은 캐릭터는 심플할수록 잘 먹힌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심플한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난한 특징이 아닌 정말 인상 깊은 특징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
도나텔로는 노트에 몇 가지 정말 특이한 특징들을 나열했다.
일단 외눈의 기사라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혹시 이걸 들어 보겠소?"
도나텔로는 회중시계를 건넸다.
회중시계는 이 업계에서 꽤 잘 먹히는 소재 중 하나였으니까.
"흠... 고장 난 것 같은데. 수리가 필요하겠소."
"그게 또 매력인 거지."
도미닉 경은 여기저기 고장 난 회중시계를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으나, 도나텔로의 처지에선 꽤 괜찮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무언가 결정적인 하나가 부족했다.
"끙. 이걸 어쩐다."
도나텔로는 볼펜을 코와 윗입술 사이에 끼우고 고민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것도 가능하오."
도미닉 경은 깃발을 꺼냈다.
페럴란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은 바람이 불지 않는 방 안에서도 펄럭이며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괜찮군. 컨셉에도 맞고."
도나텔로는 [깃발]이라는 특징을 적었다.
"하지만 그러면 시계와는 어울리지 않겠소. 돌려주시오."
도나텔로는 거의 뺏어가는 수준으로 시계를 낚아챘다.
"심플해... 너무 심플하다고..."
도나텔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특징이 지나갔으나 무언가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혹시 여자가 될 생각은 없소?"
"고양이나 강아지 수인이 되어 볼 생각은?"
도나텔로는 이제 무리수를 던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종류가 아니면 정말 눈에 띄는 특징을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에잇. 도나텔로는 갑자기 솟아오른 분노에 공책을 집어던졌다.
"어쩔 수 없지. 일단 캐릭터성은 그대로 두고, 하나하나 만들어 갑시다."
도나텔로가 손을 흔들자 동아리 방의 구석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도미닉 경은 그것이 코더가 버그 지대에서 쓰던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나텔로는 둔탁한 손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얀색 바닥과 벽이 생성되었다.
"일단 가닥은 로그라이크요. 로그라이크는 알겠지?"
"그게 뭐요?"
도나텔로는 숨이 턱 막혔다.
세상에, 가차랜드의 사람이면서 로그라이크를 모른다고?
"그러니까 하나의 목숨을 가지고 최대한 목적지까지 나아가는 뭐시기... 에잇. 해 보면 알 거요."
이 성질 급한 드워프는 제 화를 못 이겨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하얀 상자가 도미닉 경 앞으로 튀어나왔다.
"지금 그건 몬스터요. 일단 몬스터라고 치자고."
도미닉 경은 눈앞의 하얀 상자가 통통 튀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하얀 상자는 점점 크게 튀어 오르더니 마침내 도미닉 경을 향해 날아올랐다.
도미닉 경은 하얀 상자와 충돌하자 고통이 엄습했다.
아무런 소리도, 느낌도 없었으나 고통만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일단 사운드하고 그래픽이 없어서 좀 이상할 거요. 감안하고 플레이해 보시오."
"흐. 그렇단 말이지..."
과연, 몬스터는 몬스터라는 것일까?
도미닉 경은 이 기묘한 공격하는 하얀 상자를 노려보며 웃었다.
일이 아니라 전투라고 생각하니 고통이 가라앉으며 행복한 기분이 되었다.
검과 방패를 꺼내 든 도미닉 경은 하얀 상자를 베고, 때리고, 치고, 걷어찼다.
"모션은 좋군. 성좌들이 꽤 좋아하겠소."
도나텔로는 순수하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대체적으로 가차랜드의 사람들은 공격해 보라고 하면 그냥 무기를 붕붕 휘두르거나, 어색한 모션 하나 정도만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같이 일했던 사람은 허수아비만 치다가 왔는지 내려 베기 하나만 할 줄 알았는데, 무슨 기술이든 끝엔 하나로 통한다며 그럴싸한 변명만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다양한 모션을 보여주는 도미닉 경은 꽤 괜찮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었다.
"성좌?"
하지만 도미닉 경은 그런 칭찬보다 새로운 지식에 흥미가 있었다.
성좌라니, 마치 신령이나 정령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그, 가차랜드의 가치는 우리끼리만 정하는 것이 아니오."
도나텔로는 볼펜을 들어 도미닉 경의 모션을 프레임 단위로 기록하며 말했다.
"우리를 필요하는 성좌의 평가가 크지."
"그러니까 성좌가 뭐요?"
도미닉 경은 하얀 상자를 깃대의 끝으로 찌르며 되물었다.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 저 위에서 우릴 관찰하고 움직이는 이들. 그 정도만 알면 되오."
사실 그 이상은 나도 모르오. 중요하다는 것만 알지. 도나텔로는 그렇게 말을 끝냈다.
도미닉 경은 나름 흥미로운 전투와 새로운 지식에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가차랜드는 이렇게나 도미닉 경의 흥미를 충족시키는 곳이었다.
"그만! 되었소. 모션은 충분하오."
도나텔로는 패널을 조작해 하얀 상자를 없앴다.
장인 정신이 가득한 이 드워프는 프레임 단위로 분석된 모션에서 몇 프레임만 고치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만큼 도미닉 경의 움직임은 실용적이면서도 거침없었다.
"그나저나 모션부터 따긴 했다만, 게임을 어찌 만든다..."
기사와 로그라이크.
괜찮은 조합이었으나, 도나텔로는 오히려 그 무난함 때문에 고민이었다.
차라리 괜찮은 조합이 하나라면 모르겠으나, 무난한 선택지가 너무 많으니 선택조차 힘들 정도였다.
"일단 쉬고 하는 것이 어떻소?"
도미닉 경이 제안했다.
"산책이나 잠깐의 묵상을 하고 나면 꽤 괜찮은 결론에 도달하곤 하니까."
도나텔로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도미닉 경의 제안이 괜찮다고 느꼈다.
애초에 도나텔로와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사흘 동안이나 게임에 대한 논쟁을 이어나갔으니까.
"좋소. 그럼 나가봅시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까지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도미닉 경과 도나텔로는 방을 나섰다.
그 시각, 동아리 방의 입구에서.
"일단 로그라이크. 캐릭터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인 컨셉은 모아야겠지?"
"그래. 시점은 뒤로하고, 일단 컨셉을 생각하자고. 일단 난 무난하게 실험실이나 던전을 해 보고 싶은데."
도미닉 경과 도나텔로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계속해서 브레인스토밍을 통한 소재를 꺼내고 있었다.
"언데드."
"괜찮군. 사이버 펑크?"
"나쁘지 않아. 초차원?"
"초차원이라니, 자세히 이야기해 봐."
"다양한 차원이 섞여 버린 거지. 무엇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게."
"좋아. 그럼 사이버 펑크 좀비가 나오는 실험실 던전은 어때? 초차원 이론을 실험하다가 사고가 난 거지. 이 사고에 휘말린 다양한 차원의 사람들이 돌아가기 위해 실험실을 탐험하는 거고."
"괜찮군. 그럼 실험실의 지형을 미리 알 수 없는 당위성이 되겠어. 실험실로 한정될 테니 맵의 크기가 크지 않아도 좋고."
"용량 문제도 괜찮아질 것 같은데."
뜻밖에 문제가 되었던 시점과 캐릭터 문제가 해결되자 진도는 쭉쭉 나아갔다.
"이봐, 다들 뭐하고 있어?"
도나텔로는 집중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들어봐. 우리가 게임의 컨셉을 잡았는데"
도나텔로는 한참 동안 두서없는 말을 듣고는 무릎을 탁 쳤다.
"좋군. 그렇다면 로그라이크답게, 중간중간 장비 강화 지점을 넣는 거야. 처음엔 각자의 차원의 개성이 뚜렷하지만 점점 갈수록 개성은 그대로 두되, 사이버 펑크스럽게 변하는 거지."
"좋은데."
도미닉 경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그의 지식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단어들이 많았다.
대신 도미닉 경은 방패와 검을 정비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봐! 내가 새로운 캐릭터가 될 분을 모셔왔어!"
슈퍼 디럭스가 문을 박차고... 아니, 이미 박살 난 문을 넘어 들어왔다.
문 너머에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동아리 방 안을 들여다보는 여성이 있었다.
"들어오세요! 이래 봬도 다들 순박한 사람들이라 먼저 소개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슈퍼 디럭스가 쭈뼛쭈뼛 선 여성을 설득하자, 여성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방 안에 들어왔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외견.
검고 긴 생머리는 얼마나 긴지 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목이 늘어난 하얀 티셔츠와 후드티를 입은 여성은 소심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내 방 안을 모두 파악한 여성이 희미한 미소를 짓자, 갑자기 연기가 피어올라 시야를 가려 버렸다.
이내 연기가 걷히기 시작하자, 여성이 있던 자리에는 방금 전과 다른 모습을 한 이가 서 있었다.
단정하게 뒤로 묶은 머리 위에는 여우 가면.
망사와 천이 혼합된 이국적인 옷과 코와 입을 가리는 복면.
무엇보다, 쿠나이와 사슬낫을 장비한
"반갑소이다. 본인은 쿠노이치, 히메라고 하오."
닌자가 나타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