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20화]나만의 작은 게임
* * *
"슈퍼 디럭스 씨."
도미닉 경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슈퍼 디럭스는 자신이 마치 문 뒤에 숨어 있는 도망자처럼, 도미닉 경이 도끼로 문을 부수고 그 사이에서 곁눈질로 자기소개를 하는 살인마처럼 느껴졌다.
"혹시, 이 확장성이라는 항목을 충족시키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겠소?"
슈퍼 디럭스는 이런 기분은 학창 시절 화장실에서 몰래 단무지를 뺀 김밥을 먹던 이후로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포식자의 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리에 있었던 이 유명한 빌런은
"저기, 슈퍼 디럭스 씨?"
헛. 하고 슈퍼 디럭스는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나 학창 시절에 대한 몰입이 심했던지 숨을 쉬는 것마저 깜빡한 탓이다.
"아, 그래그래.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지?"
슈퍼 디럭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슈퍼 디럭스는 혼란한 상태였다.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은 그런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눈치가 좋지 않았다.
만일 적이었다면 모르겠으나, 빌런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도미닉 경은 슈퍼 디럭스를 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다.
"확장성을 충족시킬 장소를 물었소."
도미닉 경은 슈퍼 디럭스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일단은 자기 호기심이 우선이었다.
슈퍼 디럭스는 도미닉 경의 말을 듣고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일단 규정대로라면 2성 진급은 게임 트레일러에 잠깐 나오는 정도로도 충분할 거야."
"트레일러라...?"
도미닉 경은 트레일러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게임 소개 영상 같은 거지. 저희 게임은 이런 느낌입니다, 하고 소개하는."
아. 선전 장교 같은 느낌인가?
도미닉 경은 시골 중에서도 시골 출신이었으나 도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징집되어가는 농노와 달리, 도시의 자유민들은 군대에 입대할 자유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도시의 군인 중에는 그런 자유민들에게 입대의 중요성과 군인의 명예에 대해 선전하는 선전 장교가 따로 있었다.
아무래도 그런 종류인 모양이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다르지만... 네가 그렇게 이해했다면 그런 거로 하자."
슈퍼 디럭스는 도미닉 경의 생각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라 따로 정정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가장 좋은 건 게임 관련 영상에 나오는 것이지만..."
슈퍼 디럭스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연말이라 대부분 벌써 이벤트나 게임 관련 공지를 다 끝낸 상태일 거란 말이지."
무엇보다 지금 추가적으로 인원이 필요하다는 구인 광고를 본 적이 없고.
도미닉 경은 슈퍼 디럭스의 말을 듣고 실망할 뻔했으나, 도미닉 경의 눈은 하나밖에 없는 만큼 두 개 분의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슈퍼 디럭스의 입꼬리가 슬쩍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었다.
"숨기고 있는 것이 있구려."
도미닉 경은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꺼냈다.
기선제압은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기선제압에 가장 좋은 시기였다.
"아, 아! 맞다! 나 저번에 이벤트 보상 안 주지 않았나? 지금 줄까?"
"숨기고 있는 것이 뭐요?"
슈퍼 디럭스는 한숨을 쉬었다.
도미닉 경을 그저 유순한 다른 뉴비와 똑같이 본 것이 잘못이었다.
이미 무수히 많은 수라장을 헤쳐 온 도미닉 경의 결단력은 마치 악어와 같아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슈퍼 디럭스의 탓이었다.
"젠장. 이거 비밀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슈퍼 디럭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낡은 츄리닝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고 고개를 까닥거렸다.
"따라 와. 마침 게임 만들고 있는 애들을 알고 있으니까."
도미닉 경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앞서가는 슈퍼 디럭스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무려, 이번에는 자기 발로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탑뷰 로그라이크로 해야 한다고!"
"쿼, 쿼터뷰도 좋지 않아?"
"2D 횡 스크롤! 더는 양보 못해!"
가차랜드에서도 가장 낙후된 골목의 안쪽에는 거의 다 무너져가는 건물이 있었다.
입구에 썩은 주목나무로 된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현판에는 3층 : 가차랜드 대학 인디 게임 동아리 가차업지(GACHA UP G)라고 적혀 있었다.
그 건물을 들어가 3층으로 올라가 보면, 끓어오르는 청춘의 열기를 감당하지 못해 싸우고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너희들, 다 좋은데 말이야."
그리고 세 사람의 너머에는 오색 천을 둘둘 감은 미라가 있었다.
그렇다. 4천왕 중 하나, 오색바람의 하네스였다.
"지금 우리 게임 시나리오랑 컨셉도 안 짠 거 알지?"
"무엇보다 개발자 외에 다른 직원도 없잖아. 일러스트레이터랑 작곡가 정도는 섭외하라고, 다들."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턱이 세 겹인 남자가 들어섰다.
돈 카스텔로. 탐욕으로 가득한 사천왕의 일원이었다.
그는 계단이 버거웠던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는데, 양손에는 편의점에서 산 에너지 드링크가 가득 든 봉투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자꾸 그러다간 지원도 끊어 버릴거야. 알겠어?"
돈 카스텔로는 빌런답게 세 명의 협잡꾼을 향해 협박을 날렸다.
뜻밖에 이 협박이 먹혀들었는지, 세 명의 개발자는 입을 다물었다.
"컨셉은 물론이고, 인터페이스와 조작 가능한 캐릭터 정도는 구해 오라고. 앞으로 3개월 남았는데, 언제까지 개발 준비 중이라고 말만 할 거야?"
돈 카스텔로가 투덜거렸다.
하네스는 그 말이 공감되었는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열정이 있는 건 알겠는데,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까진 서로 양보하자고. 다들 머릿속에 대단한 계획이 있는 건 알아. 하지만 일단 내고 나서 패치로 늘려 나가도 되는 문제야. 처음은 간단히"
"야, 뚱뚱이와 홀쭉이 있냐?"
하네스가 감동적인 연설에 시동을 걸려던 찰나, 쾅! 하고 문이 열리며 슈퍼 디럭스가 건들건들 들어왔다.
아이고. 14만 크레딧. 하고 돈 카스텔로가 박살난 문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야?"
중간에 말이 끊긴 미라 하네스가 슈퍼 디럭스를 노려봤다.
"오늘 성급 심사 있다고 안 했어?"
"떨어졌어."
슈퍼 디럭스는 대충 널브러진 의자 중 아무 자리에나 앉아 다리를 꼬았다.
문 너머에서 도미닉 경이 슬쩍 안을 보더니 은근슬쩍 입구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이쿠."
돈 카스텔로는 박살 난 문을 대신할 문짝의 가격에 대해 계산하는 동안 도미닉 경이 들어온 것을 보았다.
"이거, 또 보는구만."
돈 카스텔로는 마치 대부가 자기 충성스러운 고객을 대하듯 양팔을 활짝 펼치고 도미닉 경을 환영했다.
"그, 반갑소. 그나저나 여긴...?"
도미닉 경은 혼란한 틈을 타 몰래 있으려고 했으나, 들킨 김에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돈 카스텔로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여긴 인디 게임을 만드는 수많은 곳 중 하나지. 명문 가차랜드 대학의 숨은 보석, 동아리 가차업지에 온 것을 환영해."
가차업지는 가차(Gacha)랜드에서 나날이 발전(UP)해나가는 게임(G)을...
돈 카스텔로가 대충 이 동아리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으나, 도미닉 경은 돈 카스텔로가 한 말 중 하나가 신경 쓰였다.
"대학생? 사천왕이 대학생...인 거요?"
뚝.
돈 카스텔로는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으며 멋쩍은 듯 말했다.
"그래. 맞아. 아직 20대란 소리지. 얼굴은 40대지만 확실히 20대 대학생이라고."
괜히 무언가 찔리는지 돈 카스텔로는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이 놀란 것은 그의 나이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살던 페럴란트 차원에서는 대학이라고 하면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서관과 연구시설이 있는 곳.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교수들과 학자들이 있는 곳.
물론, 세상에서 가장 입학금과 등록금이 비싼 곳이기도 했다.
도미닉 경이 알고 있는 대학이란 그런 곳이었기에 이들이 대학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놀랐던 것이었다.
괜히 사천왕이 된 것이 아니었군.
도미닉 경은 그 정도로 유능한 인재였기에 그만큼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눈앞에 있는 이들을 내심 인정했다.
"그, 뭐. 아무튼. 여긴 왜 온 거야?"
하네스는 계속해서 자기 외모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돈 카스텔로 대신 슈퍼 디럭스와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너희 게임 만든다며?"
슈퍼 디럭스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혹시 캐릭터 안 필요해?"
"있으면 좋지."
하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게임 방향성조차 결정나지 않았다고. 3개월 뒤에 제출해야 하는데 말이야."
사실 이들은 같은 동아리이기도 했지만, 같은 학과에 다니는 동문이기도 했다.
프로그래밍 학과에 다니는 이들은 우연히 같은 수업을 들었다.
게임 제작 실습.
그저 게임이라는 말만 듣고 신청한 그들에게, 교수는 첫날 이렇게 말했다.
'이 수업은 실습이라 게임 제작해서 제출하는 것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로, 그리고 이 게임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제출하는 것으로 리포트를 대체합니다. 출석은 대충 다 한 거로 칠 테니 결과만 가지고 오세요.'
그렇게, 이들의 고통은 시작된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림을 그릴 사람도 음악을 제작할 사람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모인 건 어설프게 프로그래밍 할 줄 아는 넷과 돈으로 학교 다닌 사람 하나.
총체적 난국이 펼쳐진 것이다.
"아무튼, 아직 게임 자체를 만들진 못했어. 캐릭터가 필요한 때가 오겠지만, 지금은 아냐."
오색바람의 하네스는 슈퍼 디럭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슈퍼 디럭스는 번뜩이는 재치를 통해 하네스를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반대인 거지."
"반대?"
"게임에 맞는 캐릭터를 찾는 건 오래 걸릴 거야. 아니, 애초에 게임을 만드는 데 오래 걸리겠지."
하네스는 슈퍼 디럭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사람들 앞에서 뽐내며 화술을 단련해온 슈퍼 디럭스의 말에는 자신만만함이 넘쳐 설득력이 저절로 생겨났다.
"하지만 캐릭터를 먼저 구하고, 이후에 그 캐릭터에 맞게 컨셉을 조정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빠르지 않겠어?"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만큼 슈퍼 디럭스의 말에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캐릭터 하나로는 안 돼."
하네스는 마지막 보루라는 듯, 슈퍼 디럭스와 협상을 시도했다.
슈퍼 디럭스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협상을 한다는 것은 이미 거의 넘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좋아. 그럼 셋. 앞으로 둘 더 모으면 되겠지?"
"그래. 그래야지 세 명 모두 만족할 수 있겠지. 안 그래?"
가만히 있던 세 명의 프로그래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삐걱거리던 모든 일이 억지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며 모두가 나름 만족할 만한결과를 도출해냈다.
"잠깐, 캐릭터 섭외 비용은 누가 대고?"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은 돈 카스텔로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모두가 돈 카스텔로를 바라보았다.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만족스러운 거래가 성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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