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7화]세상에 나쁜 빌런은 없다.
* * *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웃으시는 게 더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
"윽! 심장에 나쁘군요."
"..."
"그, 그렇게 빨리 시무룩해지지 마십시오!"
"!"
도대체 무슨 이게 무슨 일일까.
흉흉한 기운을 내뿜는 3등신의 캐릭터들 사이에서 도미닉 경은 꽁꽁 묶인 채 상황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잠깐 시간을 3분 정도 돌릴 필요가 있다.
3분 전.
"익숙해지니 뭔가 재밌는데."
도미닉 경은 통통 튀어다니며 계단을 굴러 내려가는 상황이 꽤 즐거워졌다.
3등신의 몸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스피드와 통통 거리는 사운드의 기묘한 콜라보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대략 4층 정도를 내려왔을까?
도미닉 경은 마침내 일직선으로 된 복도를 마주했다.
통통 튀며 복도를 지나친 도미닉 경은 경로의 끝에 문으로 막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관성에 의해 속도가 붙을 대로 붙은 그로서는 도저히 멈출 방도가 없었다.
사실 이 재밌는 상황을 멈추고 싶지도 않았지만.
쾅! 하고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도미닉 경과 문이 부딪혀 문이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였다.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은 말랑말랑한 3등신의 몸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멈춰설 수 있었다.
"!"
"미리 놀라지 마십쇼. 무려 침입자가 있습니다!"
2등신의 마왕은 문을 부수고 들어온 외눈의 사내에게 놀랐으나, 이미 마왕을 놀리는데 정신이 팔린 늙은 마족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미닉 경은 지나친 구르기로 인해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어... 그러니까 지금이 놀랄 타이밍... 누구냐! 사천왕! 사천왕은 어디 있느냐!"
늙은 마족은 생각보다 담담한 마왕의 리액션에 의구심을 품고 마왕의 시선을 따라 고개들 돌렸다.
마침내 도미닉 경을 발견한 늙은 마족은 마왕이 앉은 플라스틱 왕좌의 옆에서 빨간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기둥에서 파란 버튼과 초록 버튼이 달린 장치가 튀어나왔고, 초록 버튼 2번, 파란 버튼 3번을 누르자 다시금 왕좌 아래서 독수리 모양의 조각상이 나오고...
아무튼, 그렇게 수십 개의 안전장치를 풀어낸 늙은 마족은 마침내 스마트 폰을 들고 사천왕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미닉 경은 도대체 앞에서 행한 그 비밀스러운 행위의 의미가 궁금했으나, 무단 침입을 한 건 자신이 맞기에 가만히 있었다.
"응. 그래. '폭풍의 템페스토'는 오늘 비번이고. '서풍의 제스토'는? 아. 오늘 부모님이 아프시다고? '순풍의 도미네'는? 병결이야?"
무언가 잘되어가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아, 탐욕의 돈 카스텔로랑 오색바람의 하누스는 있어? 그럼 걔네들 좀 올려보내. 그래. 천천히 준비해서 오라고 그래."
도미닉 경은 늙은 마족의 말을 들으며 사천왕이라는 인물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천왕이라고 하면 최고로 강한 4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통화에서는 4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 있었고, 심지어 바람 계열에 치중되어 있었다.
호기심을 참다못한 도미닉 경은 결국 늙은 마족에게 물었다.
"도대체 사천왕이 몇 명이나 되는 거요?"
"그, 오늘처럼 비번인 녀석들도 있고. 게다가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예비로 투입될 녀석들도 있... 그게 아니라 네놈! 감히 마왕의 어전에 침입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늙은 마족은 순간 도미닉 경의 물음에 답했으나, 이내 도미닉 경이 침입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버럭 화를 냈다.
"!"
"네! 침입자입니다, 마왕님!"
도미닉 경은 늙은 마족이 경칭을 쓰는 자를 보았다.
그는 2등신의 짜리몽땅한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랏빛이 도는 검은 긴 머리는 풍성하고 치렁치렁해 왕좌에 앉아 있음에도 땅에 끌릴 정도였다.
머리 위에는 불길한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 뿔이 솟아 있었는데, 몸보다 더 커 보였다.
서술만 보자면 마왕은 매우 불길한 모습이었으나, 도미닉 경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귀여운...꼬맹이군."
아니, 말로 꺼내버리고 말았다!
"!"
"귀엽다는 말에 기뻐하시면 안 됩니다, 마왕님! 꼬맹이가 말의 핵심입니다!"
"!"
마왕은 귀엽다는 말에 빵빵한 볼에 분홍빛 홍조를 띠었으나, 늙은 마족의 첨언에 자신을 놀리려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눈썹을 찌푸렸다.
"!!!"
"알겠습니다! 당장 저놈을 포박하겠나이다!"
늙은 마족은 당당하게 도미닉 경을 향해 다가왔다.
긴 소매를 걷어부치며 성큼성큼 걸어오던 늙은 마족은 마침내 도미닉 경의 앞에 섰다.
"으헉?"
아니, 서려고 했다.
늙은 마족은 마왕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자동차가 발아래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대가로, 늙은 마족은 그 장난감 자동차를 밟고 넘어지고 말았다.
"마왕님! 침입자가 있다고 해서!"
"으하하! 참모장, 일을 시킨 보수는 두둑하게 준비했겠지!"
오방색의 천으로 몸을 둘둘 감은 깡마른 미라와 턱이 세 개는 되어 보이는 뚱뚱한 남자가 박살 난 문 너머로 들어왔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아..."
"참모장! 네놈! 숨겨둔 한 수가 있었나 보군! 여기까지 숨어든 것으로 모자라 참모장까지 쓰러뜨리다니!"
"하지만 우리 뚱뚱이와 홀쭉이 콤비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지 말고 일단 나 좀 일으켜 세워줘... 숨을 못 쉬겠어..."
사천왕 오색바람의 하누스와 탐욕의 돈 카스텔로는 멋진 자세를 취하며 도미닉 경에게 경고했다.
이미 침입자에게 진 참모장이라는 인물은 관심 밖이었다.
도미닉 경은 걱정이라도 하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마왕과 멋진 포즈 대축제를 여는 사천왕, 그리고 허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참모장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기사다운 결정을 내렸다.
"항복."
도미닉 경은 카페테라스에서 이야기하던 궁수와 도적이 생각났다.
그런 고인물들도 쉽게 공략하지 못 하는 곳일 텐데, 1성인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에서도 항복한 기사를 대우해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네놈! 우리 비밀결사 '나.쁘.다'에 잠입하다니,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기사처럼 보이는걸 보니 '요.양.원.' 출신이냐?"
"그게 다 뭐요?"
"네 이놈! 발뺌하는 것을 보니 요한 양치기 원정대 출신이 맞구나! 네가 어떻게 우리 비밀 기지를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비밀결사 '나펠린 쁘띠 다우트'의 눈은 못 속인다!"
도미닉 경은 참모장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모장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입이 싼 인물이어도 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그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왕은 오랜만의 침입자가 반가웠던 듯, 방실방실 웃으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본 참모장이 마왕을 대신해 도미닉 경에게 말을 전했다.
"그나저나 통성명도 하지 못한 것 같은데. 라고 마왕님께서 네게 물으신다. 너의 놀라운 지략과 무력에 찬사를 보낸다고 하셨다."
"도미닉.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그런 당신은 마왕 같은데."
"!"
"마왕이라니! 이분은 마안의 마왕, 투 르 방(Teu le Vante) 공주시다!"
"마안의 마왕? 공주?"
도미닉 경은 마왕을 바라보았다.
굳센 의지를 표현하는 듯 눈썹이 올라가 있었으나, 긴 머리와 2등신의 작은 체구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나저나 마안이라니, 계속 보고 있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지 않소."
"!"
마왕은 순간 충격먹은 표정이 되었다.
"그럴 리가! 마왕님의 마안은 절대적이다! 하누스! 여기로 와라!"
"네. 참모장. 무슨 일입니까?"
멋진 포즈의 연발로 느슨해진 오방색의 천을 다시 감고 있던 미라 하누스가 늙은 마족의 말을 듣고 다가왔다.
"마왕님! 이 어리석은 필멸자에게 당신의 무시무시함을 보여주십시오!"
"!"
"아, 그건가요?"
하네스는 잠시 감던 끈을 매듭짓고 심호흡했다.
마왕은 눈을 질끈 감고 검은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그 기운이 마족의 기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생각보다 덜 무섭다고 생각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우리 마왕님에게 마안의 마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게 한 필살기!"
마왕의 몸이 기운을 따라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에 흐트러져 있던 장난감과 문의 파편들도 그 기운에 동조해 서서히 하늘로 떠올랐다.
아무래 봐도 마안과 관련된 이펙트는 아닌 것 같은데.
도미닉 경이 그렇게 방심한순간, 마왕의 무시무시한 공격이 도미닉 경을 덮쳤다.
"♡"
이 얼마나 무서운 공격이란 말인가.
마왕은 조랭이 떡 같은 손을 말랑말랑 인절미같은 볼에 가져다 대며 윙크했다.
참으로 심장에 무리가 가는 공격!
"크헉!"
찰칵. 하고 참모장이 그 모습을 찍었다.
이 무시무시한 공격에 감격한 참모장은 꼴사납게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미 하네스는 심장을 부여잡고 어디서 꺼낸지 모를 이집트 풍 관에 들어가 뚜껑을 닫기 직전이었다.
도미닉 경은 어이가 없었다.
귀엽기는 했으나, 강함과는 거리가 멀어보였기 때문이다.
"이봐, 친구. 그러려니 해."
이미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진 마왕과 참모장, 그리고 미라를 대신해 턱이 세 겹인 양복의 남자가 다가왔다.
"나도 돈을 많이 주니까 여기에 있기는 했지만, 대놓고 빌런이라고 말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은 없어."
애초에 비밀 결사라는 말이 멋지다고 대놓고 비밀결사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돈 카스텔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도미닉 경의 포박을 풀어 주었다.
"보아하니 뉴비 같은데, 길을 잃었거나 알 수 없는 버그로 여기에 온 모양이군. 그렇지?"
돈 카스텔로는 이빨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금으로 된 모든 이빨들이 반짝거리며 도미닉 경이 더 혼란스럽게 하는 데 일조했다.
"길을 잃었다면 그냥 계단 따라서 쭉 가면 되고, 버그로 왔다면 행정부에 건의해. 공무원들 늑장 대응에 좀 시각은 걸리겠지만,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돈 카스텔로는 졸부처럼 껄껄 웃었다. 그의 손가락 가득 달린 금반지가 반짝였다.
"혹시 이벤트가 끝나고 또 만나게 되면 그땐 제대로 우릴 소개하도록 하지. 지금은 때가 아니야, 뉴비."
돈 카스텔로는 친절하게 계단 아래까지 도미닉 경을 데려다 주었다.
심지어 도미닉 경이 정말 풀어 주는 것인지 의심하며 뒤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멀어질 때에도,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차랜드는 알면 알수록 이상한 곳이로군."
도미닉 경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이 깨달은 바를 입으로 내뱉었다.
그도 마침내, 가차랜드의 본질을 깨달은 모양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