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16화]이런이런 빌런 빌라!
* * *
도미닉 경이 슈퍼 디럭스에게 납치당한 그 시각.
"아, 슈퍼 디럭스 어디 있냐고!"
"종료 시간이 2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본 사람이 없다는 게 말이야?"
나름 이벤트를 즐기려던 사람들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가차랜드 전체를 뒤진 사람들은 슈퍼 디럭스가 가차랜드에 없다는 사실을 유추해냈다.
도대체 슈퍼 디럭스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마음이 급한 몇몇 사람들은 벌써 같은 이벤트 캐릭터인 자베르 경감에게 달려가 슈퍼 디럭스의 위치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자베르 경감! 슈퍼 디럭스는 어디 있지?"
"그걸 왜 나에게 묻나, 시민?"
자베르 경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슈퍼 디럭스에게 수십 통의 전화를 걸어 봤으나 받지 않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내가 오늘 하루 할 일도 미루고 참가한 이벤트인데 당연히 물어는 봐야지! 적어도 손해는 없어야 즐기든 말든 할 거 아냐!"
"하. 알겠네. 기다려보게."
자베르 경감은 아예 드러눕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며 주머니에서 스마트 폰을 꺼냈다.
더 이상 지체되었다가는 분명히 클레임이 들어오리라.
그 말은 자베르가 받을 돈이 줄어든다는 뜻이고, 안 그래도 박봉인 자베르 경감에게 있어 이는 지진이나 토네이도 같은 자연재해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자베르 경감은 아랫입술을 꽉 문 채 슈퍼 디럭스에게 문자와 톡, 그리고 SNS계정에 DM을 보냈다.
이제 자베르가 할 일은 끝이다. 남은 건 슈퍼 디럭스가 이 문자들을 보기만을 기도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이건 3년 전, 이건 2년 전이라고. 봐! 앞머리가 약 0.7도 다르단 말이야! 어떻게 이걸 구분 못 하지?"
도미닉 경은 이 간악무도한 빌런, 슈퍼 디럭스의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슈퍼 디럭스는 아무리 봐도 똑같은 사진 두 장을 들고 그 차이점을 구분하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진의 차이는 거의 없어 보였고, 도미닉 경은 그나마 구분이 가능한 나뭇가지나 구름 등을 말했으나 슈퍼 디럭스의 마음에 차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좋아. 눈이 하나라서 그럴지도 몰라. 귀는 모두 멀쩡하니까 그럼 목소리를 구분해보자."
도미닉 경은 아찔해졌다.
또 무엇이 남았단 말인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사소해 보일지도 몰랐으나,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가차랜드에 도착한 이후 가장 큰 공포였다.
이미 300번이 넘게 슈퍼 디럭스의 굿즈와 사진, 그리고 말투를 들은 도미닉 경은 이제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까지 몰려 있었다.
제발 신이 있다면, 저를 구원하소서.
도미닉 경은 이 심각한 상황에 평소에 찾지 않던 신까지 찾아가며 기도했다.
"그러니까... 세계 최고 귀여운 슈퍼 디럭스 13탄이... 응?"
그 기도가 신에게 정말 닿은 것일까?
도미닉 경은 슈퍼 디럭스가 순간 움찔하며 멈춘 것을 보았다.
극히 짧은 순간이었으나, 도미닉 경은 지금까지와 다른 슈퍼 디럭스의 행동에 일말의 희망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맞다. 세상에."
슈퍼 디럭스는 마치 고대의 악마와 같은 사악함을 버리고 햄스터나 치와와 같은 작은 동물처럼 떨기 시작했다.
"나 일하는 중이었지? 세상에. 프로페셔널한 내가 왜..."
슈퍼 디럭스는 빠른 걸음으로 방 안을 돌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뽀작뽀작 소리가 점점 빨라지며 그의 심리 상태를 대변했다.
"지금 나가면 1시간 40분, 총 100분이 남으니까, 최소 만 명에게 노출하려면 대략 1분에 100명. 1초당 1.6명."
뛰어난 두뇌를 가진 슈퍼 디럭스는 순식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계산해냈다.
그리고 그 정도는 무리하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 여기에서 움직이지 마. 꼭 돌아올 거니까 기다리고 있어!"
슈퍼 디럭스는 으르렁거리며 위협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했으나, 3등신에 뽀작뽀작한 모습으로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먹은 듯싶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슈퍼 디럭스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는지 빠르게 지갑과 핸드폰을 챙기고 문을 열고 나갔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3등신의 몸이 되면서 키도 작아졌던 탓에, 손잡이까지 손이 닿지 않았다.
"아, 좀!"
짜증이 치밀어 오른 슈퍼 디럭스는 다시 신발장 옆에서 골판지 상자를 꺼내 대충 조립한 뒤 폴짝 뛰어 문손잡이를 돌렸다.
마침내 삐그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슈퍼 디럭스는 차마 문을 닫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이번에 사고 치면 3번째 경고였기에, 다음 성급 심사에서 페널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닉 경은 폭풍처럼 지나간 상황에 그저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이런 경험을 해 봤겠는가?
그러나 도미닉 경은 수많은 난관을 헤쳐나온 역전의 기사였고, 이런 당혹스러운 상황에 적응하는 것도 빨랐다.
"문이 열렸으니 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
지금까지의 압박감을 생각하면 이미 스톡홀름 증후군이 일어나 슈퍼 디럭스의 말에 순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의 강인한 정신력과 오랜 시간 단련된 현명함이 놀라울 정도로 괜찮은 계획을 꺼낸 것이다!
...그래. 솔직히 3등신의 삐약삐약 거리는 귀여운 캐릭터들에게서 무슨 압박감을 느꼈겠나 싶기는 하다.
아무튼, 도미닉 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슈퍼 디럭스는 자신을 소개하는 데 너무 심취한 나머지 도미닉 경을 묶어두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아니, 묶어 뒀어도 일자로 쭉 뻗은 통통한 3등신의 몸을 생각하면, 그냥 조금만 움직여도 스르륵하고 흘러 내렸을 것이었다.
뽀작뽀작하는 소리와 함께 문 앞에 걸어간 도미닉 경은 중간에 슈퍼 디럭스가 치워 놓았던 장비를 다시 챙겼다.
문은 여전히 활짝 열린 상태였다.
골판지 상자를 보아하니 바람도 불지 않는 모양이었기에, 문이 갑자기 닫힐 일은 없어 보였다.
도미닉 경은 문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슈퍼 디럭스가 하늘을 날 때 잠깐 보이기는 했으나, 너무 빠른 속도라 흐릿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름의 정찰을 마친 도미닉 경은 옥상의 구석에서 열려 있는 문 너머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는 것을 얼핏 보았다.
옥상엔 그다지 위험할 것이 없어 보였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니 도미닉 경은 용맹하게 방패와 칼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뾱. 뾱. 뽁. 뾱.
걸음 소리는 전혀 용맹해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정말 옥상엔 그 어떤 위험도 없었다.
"여긴 던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처럼 보이는군."
도미닉 경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키라면 평범한 계단이었겠으나, 키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은 데다가 3등신의 몸이 되어 버린 도미닉 경으로서는 한 계단 한 계단이 치명적으로 높았다.
"아무래도 두 손을 비워야 어떻게든 내려갈 수 있겠어."
도미닉 경은 엎드린 채 이 계단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해보려고 고개를 쭉 꺼내 틈새를 보았다.
이 계단은 성벽에 있는 계단처럼 직선적이지만 빙글빙글 도는 형태로 된 듯싶었다.
틈새 사이로 보인 공간은 꽤 깊어 보였으나 정확한 깊이는 가늠하기 힘들어 보였다.
"흐. 이런 곳을 내려가야 한다는 말이지."
도미닉 경은 행복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있어 위험은 모험의 다른 말이었고, 보험없는 모험은 그에게 있어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 방패를 등에 매어두는 것이 좋겠어."
도미닉 경은 지금까지 앞세웠던 방패에 끈을 달아 등에 매려고 노력했다.
노력했다고 말함은, 지금 그의 팔이 매우 짤막하고 통통했기에 등은 물론 정수리에도 닿지 않고 볼에나 간신히 닿는 길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팔을 뻗어 바둥거려도 방패가 등 뒤에 장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용을 쓰던 도미닉 경.
얼마나 오랫동안 바둥거렸는지는 모르겠으나, 멈춰있던 바람이 다시 불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었음은 확실하다.
도미닉 경은 마침내 이 장대하고 어려웠던 위업을 달성하고 말았다.
그래. 방패를 등 뒤에 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도미닉 경은 꽤 힘든 경험이었다며 스스로에게 뿌듯한 사이, 조금씩 불던 바람이 갑자기 세게 불더니 계단 쪽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이 행복함에 흐. 하고 웃는 그 순간, 쾅! 하고 문이 세게 닫혀 버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도미닉 경은 그 자리에서 폴짝 뛰고 말았다.
평소라면 그저 펄쩍 뛰고 놀란 것으로 끝이겠으나, 3등신의 통통한 몸은 예상보다 더 탄력있고 부드러운 탓에 땅에 떨어지면서 다시 한번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통. 하고 튀고 말았다.
"이건 생각 못했는데."
그래. 계단 쪽으로 말이다.
통, 통, 삐용, 띠용.
분명히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효과음은 귀여웠다.
도미닉 경은 뜻밖에 이 상황이 그렇게 아프지 않다는 사실과 나름의 속도감, 그리고 띠용거리는 귀여운 효과음이 합쳐져 무슨 반응을 할지 혼란스러웠다.
띠용, 통, 통, 데구르르.
도미닉 경이 계단을 굴러 내려가고 있을 때, 그 아래에는 도미닉 경이 차마 예상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마왕님! 놀라운 소식입니다."
"!"
마왕이라고 불린 볼이 빵빵한 이는 눈썹을 화난 것처럼 기울였다.
그는 플라스틱으로 된 왕좌에 앉아 급하게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껐다.
그리고 황급히 달려온 이에게 상체를 기울여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저... 아니, 듣고 나서 놀라시라는 뜻이었습니다."
"..."
3등신의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2등신인 이 마왕은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이 마왕은 감정기복이 심한 것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