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11화]가차랜드 23
* * *
"흐."
2지역 2스테이지를 막 끝낸 도미닉 경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역시 전투는 도미닉 경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비록 허수아비가 힘없이 쏘는 화살 때문인지 진짜 전투와는 느낌이 달랐으나, 어쨌든 전투는 전투인 셈이었다.
도미닉 경은 깃발을 매만졌다.
까마귀가 앉은 말라 죽은 참나무 문양이 하얗게 새겨진 갈색의 깃발.
페럴란트의 기사였던 그에게 있어서 이 깃발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이제 23을 깨야할 텐데..."
도미닉 경은 새롭게 열린 23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도미닉 경이 깼던 스테이지는 처음과 그리 다를 바 없었으나 이번 스테이지의 설명은 조금 달랐다.
[23 적합성 검사 I☆☆☆]
☆0/5명 이상에게 적합함 판정을 받는다.
☆총합 0/20점 이상을 받는다.
☆클리어
지금까지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얼마나 안전하게 깼는가를 기준으로 뒀다면, 이번 스테이지는 궤를 달리 했다.
"적합성 검사라. 도대체 무엇일지 감도 잡히지 않는데."
도미닉 경은 한참 동안 그 문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미닉 경의 짧은 생각으로는 결론을 낼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일단 부딪혀보는 수밖에 없었다.
"뭐, 어렵기야 하겠어."
도미닉 경은 안일하게 생각했다.
전투 이외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는 그의 성격상, 이번 스테이지는 덜 행복할 가능성이 높았다.
스테이지를 선택하자 다시금 풍경이 바뀌었다.
이전까지의 풍경이 훈련장, 혹은 야외를 기준으로 삼았다면, 이번 스테이지는 달랐다.
화려한 예술품으로 가득한 공간이었으니까.
"세상에."
도미닉 경은 화려한 공간의 반짝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제국의 황궁이 이런 느낌일까?
규격화 된 초상화와 정물화, 그리고 풍경화들은 하나같이 그 가치를 증명하듯 황금으로 된 액자 속에 있었고, 화분 하나, 가구 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가난하고 삭막한 페럴란트에서도 가장 열악하다는 전장에서 살아온 도미닉 경에게 있어,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심리적인 압박이 들 정도였다.
"어머, 어서 와용."
문득 도미닉 경은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질 좋은 옷감으로 지어진 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중년의 여성이 있었는데,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 중매를 서려던 귀족 부인과 그 느낌이 비슷했다.
두꺼운 화장으로 주름을 숨긴 눈앞의 여성은 높게 말아 올린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는데, 얼마나 그 높이가 높은지 천장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였다.
"여기 오는 분은 오랜만이넹. 역시 오늘 출근하길 잘한 것 같앙."
중년의 귀족 부인은 즐거운 콧소리를 내며 도미닉 경에게 다가왔다.
도미닉 경은 순간 검을 뽑아 들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이내 그녀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아차리고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반갑소, 부인.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라고 하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인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도미닉 경은 부족한 머리를 쥐어짜내어 기사 시절 배웠던 예법을 기억해냈다.
그 예법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중년의 부인은 콧소리 가득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어머 어머, 예의 바르셔랑.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지만 이런 분은 드문데 말이죵. 그냥 남작 부인이라고 부르세용. 남편 성이 바론이라 합치면 남작 남작 부인이 되어 버리거든용. 그냥 부인이라고 부르셔도 되구용."
"그렇소, 남작 부인? 그렇게 부르리다."
남작 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은 더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소리가 더 심해졌다.
"그나저나, 이번 스테이지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겠소이까?"
"어머, 내 정신 좀 봐. 너무 오랜만에 이런 멋진 기사님을 봐서 깜빡했네용."
남작 부인은 우아하게 걸음을 옮겨 자주색 커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옆에 달려 있던 끈을 당기자, 커튼이 열리며 마네킹들이 가득 나타났다.
"적합성 검사는 당신이 가차랜드에서 얼마나 개성이 넘치는지 판단하는 곳이에용."
남작 부인은 우아하게 한 바퀴를 뱅글 돌더니 마네킹 하나를 톡 건드렸다.
그러자 마네킹에는 새로운 옷이 나타났는데, 도미닉 경은 그 옷이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의 옷 중에서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더 깊이 들어가자면 당신의 개성을 드러내 당신의 후원자를 얻는 곳이기도 하죵."
"후원자?"
"일러스트레이터, 작곡가, 스토리 작가. 뭐든 좋아용. 당신의 개성이 강할 수록 그들의 영감을 자극하겠죵. 혹은 그냥 마음에 들 수도 있어용."
남작 부인은 다른 마네킹들도 손으로 건드렸다.
다양한 양식의 의상과 장비들이 나타났다. 가끔은 후광이나 날개처럼 특별한 것들도 나타나곤 했다.
"가차랜드에서 가치라는 말을 자주 들으셨을 거에용. 그 가치는 무엇일까용? 바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먹히는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느냐, 혹은 사람들이 싫어도 쓸 정도로 유용한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로 판가름 나죵."
남작 부인은 이 환상적인 패션쇼에 넋이 나간 도미닉 경에게 원단을 가져다 대며 설명을 이어갔다.
"키우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키우는 게 무슨 소용인가용? 애정이 가득한 캐릭터를 키우는 것이 더 생명력이 오래가지 않겠어용? 덧붙여 스킨도 더 팔 수 있는 캐릭터라면 얼마나 좋을까용!"
손으로 금전을 의미하는 동그라미를 그린 남작 부인은 또 다른 색감의 원단을 대조했다.
그러고는 박수를 치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도미닉 경은 캐릭터성이 나름 괜찮아용. 조금만 더 꾸미면 반짝반짝 할 거에용. 세계 최고의 미소년이니, 혹은 여자보다 아름다운 남자니 하는 수식어도 좋지만 각자가 가진 매력을 더 드러내는 것만큼 캐릭터성에 좋은 것도 없어용."
도미닉 경은 남작 부인이 건네주는 의상을 받았다. 그러자 그의 옷이 페럴란트의 기사복에서 제대로 된 갑옷으로 바뀌었다.
"어머나, 풀 플레이트가 어울리는 사람 많지 않은뎅! 역시 기사라서 그럴까용? 아니면 이 매력적인 외눈 덕분에 시너지가 일어나는 걸까용? 아무튼 이건 킵해 두죵! 머릿속에서 영감이 마구 떠오르고 있어용!"
남작 부인은 계속해서 의상을 도미닉 경에게 던졌다.
도미닉 경은 당황하면서도 그 옷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이 스테이지를 깨려면 캐릭터성을 증명해야 했고, 도미닉 경 스스로가 생각하길 자신은 패션에 센스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해적, 킵. 성기사, 킵. 장교? 어머나. 이거 멋지네용! 이것도 킵."
남작 부인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이렇게나 다양한 옷이 어울리는 사람은 드물죵. 거기에 알기 쉬운 컨셉과 특성이라니! 사랑 받기 좋겠어용!"
남작 부인은 이렇게 다양한 컨셉이 어울리면 스킨 팔기에도 좋다고 덧붙였다.
"예술가의 후원으로 창작물이 만들어지면 수익의 일부를 당신이 가져가용.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는 건 덤이구용!"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남작 부인은 대략 300여 개의 의상을 입혀보고 나서야 더 이상 의상을 넘겨 주지 않았다.
도미닉 경은 기진맥진했다. 이런 기분은 마족들이 길들인 지옥의 늑대들과 싸울 때 이후로 처음 겪는 탈력감이었다.
남작 부인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이내 도미닉 경에게 의상을 던졌다.
그 의상을 받아 든 도미닉 경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입었던 의상이 화려함에 그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 의상은 심플함의 극치였다.
사슬 갑옷과 그 위를 덮는 문양이 그려진 천.
서코트라고 하던가. 이런 옷을. 도미닉 경은 기사다운 그 옷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아쉽게도 저는 옷만 다뤄서 장비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는 몰라용."
남작 부인은 아쉽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기사다운 기사라는 컨셉 하나만으로, 당신은 사랑받을 수 있을 거에용. 믿어 주세용.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봤는데 말이죵."
남작 부인의 격려에 도미닉 경은 환하게 웃었다.
지치고 힘들긴 했지만, 마음에 들어 행복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좋아용. 이제 심사를 합시당. 이번엔 이례적으로 당신이 입었던 컨셉 샷과 지금의 모습 모두를 보낼 거에용. 마침 시간도 늦었으니 딱 좋네용. 그분들은 쉽게 잠들지 못하시는 분들이라서용."
남작 부인이 무언가를 조작하자 다시 자주색 커튼이 닫혔다가 열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엉뚱하게도 커다란 화면이 나타났는데, 거기엔 이런 글과 시간이 적혀 있었다.
[심사 중입니다.]
[심사한 순서대로 공개됩니다.]
[02:00:00]
2시간에서 시작한 카운트다운은 매초마다 1초씩 줄어들었다.
도미닉 경은 저 시간제한이 무엇인지 궁금했으나, 남작 부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2시간 동안, 가차랜드의 모든 예술가들에게 당신의 정보를 보낼 거에용. 그럼 그중 마음에 들거나, 혹은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당신에게 심사평을 보내죵. 1인당 5점 만점으로 계산할 거에용."
도미닉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걱정도 있었다.
미달이 되면 다시 해야 하나?
"걱정하지 마세용. 가차랜드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는 수만 명을 넘어가니까용. 그리고 대개"
남작 부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광판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이렇게, 금방 보내주곤 하니까용."
[일러스트레이터 : 메메로스]
[기사다운 기사. 탱커다운 탱커. 심지어 깃발까지? 오랜만에 유려한 갑옷을 그릴 만한 캐릭터.]
[다만 아쉬운 점은, 눈이 하나라는 점을 어필하려면 투구를 그리지 못한다는 점?]
[평점 : 4/5]
도미닉 경은 전광판에 적힌 평가를 바라보았다.
"꽤 후한 점수를 주시는 듯 하오."
"당연하죵. 당신이 그만큼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에용."
다시금 전광판에 새로운 화면이 떠올랐다.
[작곡가 : 에픽 앤더슨][4.6/5]
[라이브 2D 제작자 : 애플파이][2/5]
[원화가 : 요루히 아사츠키][3/5]
자신을 평가하는 다양한 예술가들의 리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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