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202화 (외전) (202/202)

外傳, 추신. 꼭 영웅이 아니어도 돼

쉽게 잊히지 않는 악몽이 있다. 몇 년이 지나도 악몽에 갇힌 순간만큼은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으며 다시 그곳에 갇힐까 봐 눈을 감지 않는 날도 있을 수 있다.

밤이는 백신 개발팀으로 들어가 서천의 풀을 이용하여 변이 바이러스가 세포에 전혀 침입할 수 없는 약을 만들었다. 삼승의 피를 뽑아 만드는 풀들은 하루에 캘 수 있는 양이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백신 개발 초반엔 시간이 생각보다 더 필요했다. 어떤 짓을 해도 풀은 두 배로 늘어나거나 하는 실험에 성공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 때, 한국은 교신이 닿는 외국에 백신을 운송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던 만큼, 타지에서도 나름 변종을 막을 방법이라거나 임시 백신을 만들어놓긴 했더랬다. 비감염자도 많이 속출해냈긴 했으나 낙조만큼의 능력을 가진 이가 없어, 또 이런 일이 일어난 원인을 몰랐기에 땅굴만 파고 있었다.

낙조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새들이 돌아왔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새들은 오랫동안 내지 못한 울음소리를 지저귀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흘렀을 때 동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에게 어디에 있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을 아무리 조사하고 관찰해 봤자 드러나는 사실은 없었다. 모두 몸에 흙을 묻히고 있었고 오랫동안 잠들어 탈수 상태로 발견됐다.

안전하다는 상태가 지속되니 사람들의 움직임도 재빨라졌다. 가끔 육지로 올라가 주변을 탐방하던 군인들은 변이 식물과 변종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고 보고했다. 모두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밤이는 더욱 바빠졌다. 연락할 수 있는 시간도 정해져 있었고 그마저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는 전화로 얘기할 때면 항상 바쁘다, 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먼저 전화를 끊진 않았다.

마침내 한국의 변이 식물이 거의 힘을 잃었을 있을 무렵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힘을 못 쓰는 변이 식물은 군인들이 상대했다. 그렇게 다시 빼앗겼던 땅을 되찾기 시작했을 때, 밤이는 처음으로 휴가를 받았다. 그녀는 쉬는 날에도 일찍 일어나 몸가짐을 정돈하곤 해화를 찾아갔다. 해화의 꽃가게는 다행히 보수를 많이 해야 하는 상태는 아니었다. 다 시든 꽃들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있던 해화는 밤이의 등장에 잠시 말을 잃고 있다가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꽃 사러 왔는데.”

“망하기 전에 잘 왔네요.”

“왜 망해?”

“사람들이 꽃을 무서워하니까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근데 꽃은 잘못 없잖아.”

“그죠. 지금 있는 꽃도 제가 직접 가져온 거라 몇 송이 없어요.”

“아무거나 줘.”

밤이는 그래도 깨끗한 내부를 둘러보면서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말했다. 그새 머리가 많이 긴 해화는 두꺼운 고무줄로 머리를 묶은 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녀가 직접 가져온 꽃은 코스모스였다. 계절이 벌써 그렇게 됐나 싶어 밤이는 코스모스를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2년 됐네.”

“뭐가요?”

“우리 만난 거.”

“그러게요.”

해화는 굳이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코스모스를 깔아두고 한 송이씩 다듬는 해화의 모습을 보면서, 밤이는 그동안 묻지 않았던 질문을 꺼냈다.

“야.”

“네.”

“너 진짜 나 싫어했어?”

“…….”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싫어하지는 않고, 무서워했죠.”

“무서워한 건 또 뭐야.”

“그냥…….”

아무리 캐물어봤자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 밤이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가위가 어긋나게 자란 잎사귀를 자르는 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가만히 서서 해화의 손을 보고 있던 밤이는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어.”

“아……, 아침부터 운이 안 좋군.”

무흠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전에도 몇 번 찾아온 적이 있는 듯, 해화는 무흠의 얼굴을 잠깐 확인하고서 작게 웃었다. 밤이는 실소를 터뜨리면서 곧장 대답했다.

“할 짓 없는 양반인 거 티 내지 말지?”

“그러는 그쪽은 친구 없는 거 티 내지 말든가.”

주거시설 복구를 위해 몇 번 만난 적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둘은 서로를 이겨 먹기 위해 조금도 쉬지 않았다. 오히려 보는 이들이 그들을 말렸던 적도 있었으니까. 여전히 서로에게 발톱을 숨기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둘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는 많이 포근해졌다.

“오늘은 무슨 꽃이 들어왔나.”

“코스모스 내 거니까 저리 꺼져.”

“누가 댁 거 뺏어간대?”

“하, 홍해화. 재수 없는 손님 좀 바꿔줘.”

결국 밤이가 해화를 대화에 끌어들였다. 해화는 오랜만에 만져보는 얇은 종이들을 고르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중사님 건 미리 만들어뒀어요.”

“야!”

“거봐. 친구 없는 거 티 내지 말라니까.”

해화의 대답에 반응이 두 갈래로 완벽히 갈라졌다. 해화는 그저 얇은 미소를 지은 채로 보관해두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 무흠에게 내밀었다. 무흠은 자연스럽게 그 꽃을 받아 들고선 밤이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비죽 들어 올렸다.

“……진짜 죽이고 싶다.”

“해보든가.”

“중사님, 오늘도 거기 가시게요?”

말싸움이 길어질 것 같음을 느낀 해화가 슬쩍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여전히 씩씩대는 밤이를 내버려두고서, 무흠이 고개를 부드럽게 돌렸다.

“익숙해져야 하니까.”

“어딜 가는데.”

“댁은 주변 사람들에게 신경이나 좀 써.”

“이게 진짜.”

“세성님 뵈러 간다. 됐냐.”

무흠의 대답에 밤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세성의 무덤에 찾아가지 않은 게 자기 하나뿐이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물론 일부러 찾아가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변명하기엔 염치가 없는 듯해 밤이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시간 있으면 같이 가든가.”

“……나도 갈 데 있어.”

“오래 걸려?”

“아니.”

“그럼 내 차 타고 가.”

무흠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밤이는 해화가 자신의 코스모스 다발을 만드는 것을 지켜보며 잠시 생각했다. 이들에겐 말해도 되겠지. 어차피 자신의 모든 면을 다 봤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의 사람들인데. 그녀는 눈을 가만히 깜박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사 지내는 것도 도와줄 거면 가고.”

“누구한테 가는데.”

“전남친.”

밤이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꽃다발을 묶는 해화의 손이 잠시 멈칫거렸다는 걸, 그녀는 보았다.

“오래전에 죽었어. 좋아하지도 않던 산에 들어가서 객사했지. 그때부터 이미 시작하고 있었던 걸 거야. 켈리 그년의 계획. 왜 하필 걔였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이 다 풀렸으니까 술이라도 한 잔 주고 오려고.”

“나쁠 거 없지. 하루에 제사상 두 번 차린다고 문제 있나.”

“꽤 쿨하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나?”

“나한테 점수 따려는 줄 알고.”

“적당히 미쳐라 송밤이.”

무흠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먼저 가게를 빠져나갔다. 밤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해화에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해화는 리본의 길이에 맞게 끝을 잘라 주곤 다발을 건넸다. 예쁘네. 밤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해화는 조용히 웃는 소리를 냈다.

“아. 너 아직도 거기 나가냐?”

해화는 제주로 다시 내려갔을 때부터 서천 사람들과 함께 망자들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처음엔 몸이 망가지도록 집중하여 서천은 끝까지 도움 되는 게 없구나, 생각했는데.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보니 일상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에 밤이가 물었다. 해화는 잠시 주춤거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 있는 곳만 가요. 이제는 정말 얼마 없어서.”

그녀가 안내해야 한다는 망자들은 아직까지도 자신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 저승으로 가는 길을 찾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해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덧붙였다.

“아마 낙조 덕분일 거예요.”

“걔는…….”

밤이는 한마디 거들어대려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한숨을 푹 쉬고, 주머니에 넣어 두고 있던 지갑을 꺼내자 해화가 두 손을 들어 밤이를 말렸다.

“아 그냥 가져가요!”

“뭐래. 나 나중에 잡혀가 이러면.”

“보는 눈도 없잖아요. 그리고 아직 완전 오픈한 것도 아닌데.”

해화는 카운터 밖으로까지 나와 밤이를 뜯어말렸다. 얘가 왜 이래! 밤이는 평소답지 않게 자신을 힘으로 밀어내는 해화를 보고서 질겁했다. 그때 누군가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밤이와 눈을 마주치고서 어, 하며 큰 소리로 박수를 쳤다.

“와, 송밤이 누나가 여기까지 뭔 일이래!”

지운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머리를 정돈하며 외쳤다.

“오늘 여기서 무슨 정모 있냐?”

“그러게요.”

밤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해화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전거를 타고 왔는지 쇼윈도 밖으로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지운은 밤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뭐 하자고.”

“오랜만에 봤는데 또 섭섭하게 이런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지운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밤이는 픽 웃으면서 지운과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지운은 캐쥬얼한 옷차림에 가벼운 항공 점퍼를 입고 있었다.

“오늘 중사님이랑 데이트 가? 밖에서 기다리던데.”

“어, 데이트 가.”

“헐 진짜로? 진짜? 언제부터? 뭐야 나만 몰랐던 거야?”

기겁하며 손으로 입을 막는 지운을 가게 안에 두고서, 밤이는 해화에게만 인사를 건넨 채 밖으로 나갔다.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충격먹은 얼굴로 가게에 남은 지운은 해화를 향해 돌아보며 눈치를 줬다.

“언제부터래? 어?”

“뭐래, 나도 몰라.”

“아니 모를 수가 있어 누나가?”

“모른다니까.”

해화는 두 손을 들면서 천천히 남은 꽃들을 정리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운은 홀로 이리저리 중얼거리며 둘의 접점을 찾으려 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아, 하고 입을 터뜨렸다.

“나 오늘 수호 형 만난다.”

“금수호 씨? 요즘 자주 만나네.”

“어. 그 형이 되게 똑똑하더라고.”

“넌 그걸 이제야 알았냐?”

“아니, 알고야 있었는데 게임도 잘해. 진짜 미친 사람이야.”

지운은 그러고도 혼자 계속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주머니에서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해화가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자, 지운은 내심 우쭐해하면서 말했다.

“내가 오다가 누나 생각나서 특별히 사 왔다.”

안 그래도 의심스러운데, 저렇게 말하니 더욱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해화는 몸을 일으켜 봉투 안을 확인해보았다. 까만 봉투 안엔 흰 종이봉투가 들어 있었고, 그 안엔 병아리 모양의 작은 빵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양을 보아하니 이 주변에 있는 가게에서 사 온 모양이었다. 가끔씩 퇴근할 때 몇 번 사 들고 갔던 걸 기억하고 있던 건지도 몰랐다. 해화는 으이구, 하며 지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지운은 아프다고 하면서도 헤실헤실 잘도 웃었다.

“거의 다 끝난 것 같은데.”

잠시 침묵이 돌고, 지운이 중얼거렸다. 해화는 못 들은 척 꽃을 매만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끝난 거나 다름없지. 사람들도 잘 살아가고 있잖아.”

“…….”

“갑자기 다들 보니까 괜히 생각나네.”

지운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해화는 손을 씻고 앞치마에 닦아내곤 카운터 앞에 서서 지운에게 말했다.

“안 가? 약속 늦겠는데.”

“아아 알았어. 잔소리 안 할게.”

지운은 슬쩍 해화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마저 가게를 나가자, 잠시 시끄러웠던 내부가 금세 조용해졌다. 일상은 복구됐지만 꽃가게를 직접 찾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 나무를 찾는 손님은 더욱 그랬다. 해화는 조용히 식물 영양제를 챙겨 필요한 나무 화분에 꽂으면서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

예고 없이 눈이 내렸다. 눈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 이곳은 별 탈 없이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게 앞에 소복이 쌓인 눈을 치우며 해화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있는 가게 주인들 모두 빗자루를 들고 나와 눈을 쓸고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오고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때의 재앙은 잊지 못할 악몽처럼 남았고 사람들은 가끔 슬퍼한다. 해화가 올리는 기도의 횟수 또한 줄었다. 서천 사람들은 각자 지역으로 나뉘어 남은 일을 도맡아 했다. 삼승의 숨은 여전히 온전했다. 가끔 그녀 생각을 하면 해화는 마음이 착잡해진다. 백신이 필요 없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으나, 여전히 서천에선 삼승의 피를 뽑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풀을 거둔 이후엔 그녀의 몸에 꽂힌 호스를 모두 빼낸다고 들었다. 그녀는 저승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을까.

하나씩 안에 있던 나무와 꽃을 밖으로 빼냈다. 무거운 것도 있었지만 매일 하는 일이었다. 작은 꽃다발을 여러 개 만들어 쇼윈도 안쪽에 진열해두고, 늦잠을 잔 탓에 거른 아침을 챙길 생각이었다. 근처 빵가게에 가서 샌드위치를 살까 싶다가 갑자기 또 불어오는 눈바람에 마음을 접었다.

‘기껏 치워놨더니 또 쌓이네.’

꽃을 찾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비록 누군가를 추모하는 소비이긴 했으나 점점 기념일이라거나 의미 없이 꽃을 사는 사람들도 가게를 찾았다. 해화는 꾸준히 넌출월귤을 관리했다. 세성의 무덤에 심은 넌출월귤은 큰 변화 없이 잘 자라주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힘들 만큼 눈이 쌓였다. 해화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빗자루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목도리, 귀도리, 장갑, 패딩, 부츠 등등 온몸을 막고 나가긴 했어도 뼈를 시리게 만드는 바람까진 어쩔 수 없었다. 오들오들 떨며 눈을 치우고 있을 때였다.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던 길목에서 누군가 먼 곳에서 걸어오는 듯한 인영이 보였다. 그게 중요하랴, 해화는 얼른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빠른 손길로 가게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 인영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온 줄도 모를 만큼.

“…….”

빗자루에 쓸려나가는 눈이 한곳에 쌓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거리를 두고 눈을 치운 해화는 숨을 한숨 돌리며 허리를 겨우 폈다. 얼마나 굽히고 있었다고, 그새 뻐근한 허리에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던 탓에 땀이 이마에 살짝 맺혀 있었다. 해화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몸을 돌렸다.

“…….”

눈을 가득 쌓아둔 곳 옆에,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모를 이가 해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정갈한 모습으로 꼿꼿하게 서서 엷은 미소를 지은 채 해화가 먼저 입을 떼기만을 기다렸다. 해화는 쥐고 있던 빗자루를 바닥에 슬그머니 내려놓고서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어쩌면 환각일지도 모르는 눈앞의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넌출월귤 보러 왔습니다.”

“…….”

“생각보다 잘 키우셨네요.”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단단해졌고, 낮게 깔려 있었다. 몸에 깃든 추위를 모두 녹일 만큼 따스한 어투에 해화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는 그에게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낯빛이었다. 그가 두른 목도리 위론 눈 알맹이가 몇 톨 쌓여 있었다. 해화는 그것들을 손으로 털어주고서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그 앞에서 눈물을 먼저 보이는 건 자신이 세워둔 계획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고생했어.”

“응.”

“기다리고 있었어.”

“나도.”

언제나 곁에 있었다는 듯 다정한 목소리가 해화를 가득 껴안았다. 해화는 너른 품에 안기면서 숨을 들이켰다.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던 흙과 풀내음이 온몸에 들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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