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200화 (200/202)

200화. 몰락 (3)

“다들 정신이 나갔나 보네.”

귀도는 아무도 없는 실험실을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한 번 훑어본 그녀는 손을 털면서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돌아다니는 개미 몇 마리쯤은 있을 텐데. 어쩐지 밀려오는 아쉬움을 참을 수 없었다. 몇 달 만에 돌아온 청주는 귀도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발전한 부분도 없는. 시간이 흐를수록 퇴화하는 공간이었다.

“생각보다 좀 많은데요…….”

냉동고에 담긴 백신의 수를 세던 수호가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흠은 주변을 경계하면서 수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의 말대로 저장해둔 백신은 가방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게다가 저온 상태에서 보관해야 하니 냉동고 자체를 들고 움직이지 않는 이상 백신의 상태를 완전 보장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동 수단도 필요하고, 아무래도 소장이랑 얘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다 어디로 숨은 것 같은데. 지나가는 군인 붙잡고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요?”

“똑똑한 머리는 왜 쓰려고 할 때 안 쓰이는지 모르겠군.”

“어차피 우리가 이기잖아요. 고낙조 씨 있는 한…….”

“고낙조한테 목숨 맡겨놨어? 그러다 죽으면, 죽어서 원망하게? 철 좀 들어라.”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그러고.”

“궁시렁대지 말고 일어나.”

수호는 말을 웅얼거리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백신의 위치는 확인했으나 이동 수단이 문제였다. 무흠은 허리에 손을 짚고서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등을 지고 있는 귀도가 고개를 돌렸다.

“장승, 꼭 백신을 다 가져가야 할까?”

“……무슨 말씀입니까.”

“켈리와 삼승의 이야기를 들었잖아. 어차피 자신들이 선택한 사람들만 살게 해주겠다고. 그런데 지휘관도 없는 곳에서 만든 백신이 과연 완벽할 수 있느냐 말이야.”

“…….”

쉽게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무흠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백신을 만드는 시간 동안 이룬 것이 없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고 하기에도 이상합니다.”

“시간을 끈 거지. 고낙조를 붙잡아둬야 했으니까.”

“……그럼 귀도님은.”

“어. 이거 두세 개만 챙겨도 돼. 완벽한 건 새로 만들어야 하고.”

귀도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수호는 다시 냉동고를 열어 자그마한 유리에 담긴 액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진짜가 아니다……. 그 말만 속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복도에서 여러 개의 발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가볍지만은 않은 소리였다. 무흠은 곧장 벽에 몸을 붙이고서 총을 꺼냈다. 귀도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닫힌 문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수호는 숨을 삼킨 채 책상 아래로 들어가 의자로 자신의 앞을 막았다.

철컥.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군복을 입은 이가 실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귀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총구를 들이대고서 소리를 질렀다.

“손 들어!”

“…….”

“다시 한번 말한다. 손 들어!”

벽에 기대어 있는 무흠은 발견하지 못한 건지, 그는 귀도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나가면서 소리쳤다. 귀도는 힘 빠지는 웃음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아직 소문이 안 났나?”

“마지막으로 명령한다. 불복종 시 발포―”

뻑.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귀도는 왼쪽 다리를 들어 총을 떨어뜨렸다. 다른 이들이 지원 사격을 위해 안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자신이 잡은 군인의 목을 팔로 조르곤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냈다. 군인이 거칠게 호흡하는 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잡힌 군인 때문에 쉽게 총을 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무흠은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를 붙잡고 총을 빼앗았다. 숨소리가 빠져나갈 새도 없이 조인 틈에, 무흠에게 잡힌 군인이 그의 얼굴을 보고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배, 백, 백무흠이다!”

그의 절규 섞인 비명에 실험실 안으로 들어온 군인들 모두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흠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총을 다시 쥐면서 마구잡이로 쏘기 시작했다. 무흠은 가볍게 책상 아래로 몸을 숨긴 다음, 장전하는 사이 그들에게로 다가가 빼앗은 총을 겨누었다.

“나보다 장승이 인기가 더 많네.”

순식간에 뒤바뀐 시선에 귀도가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상황 통제권이 어느 정도 자신 쪽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한 수호는 슬그머니 의자를 밀고 책상 밑에서 기어나왔다. 한심하게 쳐다보는 무흠의 시선은 뒤로한 채,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군인에게 물었다.

“소장님 어디 계세요?”

“…….”

“머리 터지고 싶지 않으면 말해요.”

수호는 말갛게 빛나는 눈을 깜박였다. 가만히 수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군인은 눈을 꼭 감고서 무전기를 수호에게 건넸다. 수호는 그것을 받아 들곤 무흠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거봐, 이렇게 하면 된다니까. 시선에서 느껴지는 우쭐함에 무흠은 발로 차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으나 겨우 참아냈다.

“너희가 다야?”

무흠과 귀도 사이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웅크리고 있는 군인들에게, 귀도가 물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무슨 뜻과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귀도에게 잡힌 군인은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대답했다.

“더, 더 있습니다.”

“근데 왜 안 보여?”

“소장, 콜록, 소장님 경호―”

“―죽을 팔자를 미리 깔고 계시네.”

귀도는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군인을 무리에 던졌다. 군인들은 귀도의 얼굴을 알고 있지 못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무흠이었다. 자신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그날을, 모두 잊지 못했다. 짐승을 삼킨 것 같은 눈빛을, 그 누구도 살려 보내지 않으려는 힘을 보았다. 힘없이 스러지는 변종들을 벌레만도 못하다는 듯 다루었던 몸놀림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시선에서 벗어났다간 뒷목이 썰릴 것 같은 두려움에, 모두가 꿈쩍도 않고 실험실에 모였다. 귀도는 손을 털어내며 무흠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머지는 내가 맡을게. 장승은 소장을 찾아가.”

*

당연히 잠겨 있을 거라 생각한 정보실은 쉽게 열렸다. 낙조는 경계를 풀지 않고 먼저 변종들을 안으로 들였다. 정보실을 비추고 있는 건 벽에 달린 수십 개의 스크린에서 나오는 불빛뿐이었다. 텅 빈 정보실에선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비척거리며 안으로 들어간 변종들은 가끔 컥컥거리며 소리를 낼 뿐,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진 않았다. 걱정을 가득 띈 해화의 얼굴을 뒤로하고 낙조가 먼저 발을 디뎠다.

“…….”

잘 숨었다고 생각했겠지. 낙조는 발을 딛자마자 코끝을 훑고 들어오는 냄새에 한숨을 흘렸다. 스크린과 기계 사이에 있는 틈에서 변종들과는 다른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낙조는 변종들을 제자리에 세워두고 천천히 그곳으로 향했다. 그의 그림자가 복도의 불빛에 비쳐 길게 늘어지며 정보실 안을 물들였다.

“이야아악!”

그림자의 머리가 구석에 닿았을 즈음, 어두웠던 틈에서 연우가 작은 주사기를 쥔 채 낙조에게 뛰어들었다. 해화와 지운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기에 그녀를 붙들거나 낙조를 물러서게 할 수도 없었다.

연우가 쥔 주사기의 바늘은 낙조의 왼쪽 눈알을 정확히 꿰뚫었다. 눈물을 닮은 핏줄기가 나무껍질로 뒤덮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연우는 아무 반응도 없는 낙조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겁을 먹은 듯 주사기에서 손을 뗀 채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움직임에 제자리에 박혀 있던 변종들의 고개가 일렬로 그녀에게 돌아갔다. 낙조는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눈에서 주사기를 빼냈다.

고통이 아예 느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주삿바늘 크기로는 낙조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그저 개미에게 물린 것처럼 따끔거리는 정도였다. 바늘을 뽑자마자 빠른 회복력으로 앞이 서서히 밝게 트였다. 낙조는 손에 쥔 주사기를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액체가 반쯤 남아 있었다.

“이게 뭐야?”

“……뭐긴, 변종 죽이는 거지.”

연우는 벌벌 떨면서도 웃음을 지어냈다. 이미 수많은 환각에 사로잡힌 그녀는 눈앞에 놓인 변종들과 낙조의 모습에도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곳에서 뭐라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한 게 없네.”

“뭐?”

“그렇게 악착같이 홍해화랑 내 피를 뽑아갔으면, 세계를 구할 약 정도는 만들어 놨어야지.”

“어디서 구르다 온 정보를 듣고 왔길래 그딴 말을 지껄여? 내가 다 했어! 내가! 이 서연우가! 다 했다고!”

그녀는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가슴을 퍽퍽 내려치며 외쳤다. 변종들이 꿈틀거리며 천천히 연우와 낙조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우는 묽은 눈동자로 낙조를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네 피는 내가 고심하다가 마지막에 사용했어. 그리고, 그 여자가 다 못 해낸 일도 난 해냈다고. 자헌, 자헌 박사와 함께 세상 사람들을 모두 구하고 역사적인 인물로 남겠지. 그러는 너는? 운 좋게 얻은 힘으로 너 하나 살리기도 척박하지. 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 언제까지고 네가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눈 깜박하면 끝이야.”

“말 다 했지?”

낙조는 무신경한 표정으로 물었다. 연우는 아무런 타격 없이 멀쩡하게 서 있는 낙조를 보고서 비소를 흘렸다.

“그래도 그새 일 꽤 겪었다고 옛날처럼 쫄진 않네. 그럼 뭐해, 독이 온몸에 퍼져서 곧 죽을걸.”

“안타깝네. 당신 소원 못 이뤄줄 것 같아서.”

“네가 뭘 안다고 기세등등해. 네가 뭔데 날 무시해!”

연우의 흰 자 위로 붉은 실핏줄이 터졌다. 악을 써가면서 낙조의 몸을 아무리 밀쳤지만 낙조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 자리에서 서 있었다. 한참 동안 낙조의 몸에 돋는 나무껍질을 두드려보던 연우는 벅찬 숨을 내쉬어가면서 이곳저곳 까진 손을 거두었다.

“당신도 결국은 똑같다.”

“……뭐?”

“삼승도, 켈리도……, 죽을 때의 모습은 다 날 실망시켰어. 당신도 그럴 것 같아서.”

“개소리하지 마!”

다시 연우가 손을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낙조는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살짝 꺾었다. 무시무시한 힘에 짓눌린 연우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변종들에게 외쳤다.

“뭐해! 당장 이 새끼 안 물어?!”

“…….”

“죽여버려! 내가 먹여줬잖아. 너희한테 고낙조 피를 떠먹여 줬잖아!”

낙조의 손아귀에 붙잡힌 후에도 연우는 굴하지 않고 온몸을 뒤흔들며 외쳤다. 목이 터져라 소리친 탓에 낙조의 명령에 눌려있던 변종 몇몇이 고개를 까딱이며 그르렁거렸다. 낙조는 다시 변종들을 향해 향을 내뿜고서 연우의 멱살을 잡아 아예 벽에 들어 올려 박았다.

“난 여기까지 오느라 몇 번이고 죽었어.”

“놔! 컥, 콜록. 같은 변종 새끼들이라……, 머리가 안 좋나?”

연우에게선 전혀 반성의 기미를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완벽하게 승리의 깃발을 쥐고 있는 쪽은 낙조였다. 낙조는 연우의 목에서 손을 떼어 내 그녀가 바닥에 고꾸라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곤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연우의 어깨를 발로 가볍게 짓눌러 바닥에 다시 내리꽂았다.

“잘 못 들었어? 난 당신 죽이려고 날 몇 번이나 죽였다고.”

“…….”

음산한 낙조의 목소리에 그제야 연우의 입이 다물렸다. 당장 눈앞에서 사신이라도 만난 듯 팽창한 눈동자는 낙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한 번 죽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내가 죽은 거에 비하면.”

“……고, 고낙조.”

“당신은 결국 끝까지 실수하는 거야. 나를 잡는 것도, 나를 만들려고 했던 것도 실패한 거지. 당신이 직접 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동안 착각하며 살았던 거야.”

“아니야…….”

“서연우 씨, 우리가 다정하게 인사할 사이는 아니니까.”

“아니야, 잠깐만, 아니야!”

연우는 낙조의 묵직한 손길을 느끼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낙조의 손바닥 안이었다. 낙조는 어깨를 발로 지그시 밟은 채 품에서 해화에게서 건네받은 독초를 꺼냈다. 이제 막 약에서 깨어난 듯 연우는 몸을 팔딱거리며 낙조에게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낙조는 아무 감흥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까워진 시선에 연우가 한 손으로 황급히 낙조의 손을 붙잡고 웃어 보였다. 눈물이 고여 있는 눈가를 볼수록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 똑똑한 거 알잖아요. 죽여서 도움 될 거 없을걸, 정말이야. 똑똑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 필요 없어. 더 이상 쓸모없으니까.”

낙조는 말을 마치고서 오른손에 힘을 모았다. 손끝에서 자연스럽게 나뭇가지가 투둑 소리를 내면서 길어졌다. 막 피어난 엉겅퀴가 가시를 드러냈다. 낙조는 엉겅퀴의 꽃잎으로 연우의 볼을 쓰다듬고선 곧장 날카로운 손끝으로 연우의 뱃가죽을 움켰다. 그리곤 피부조직이 보일 정도로 뜯겨나간 피부 위로 독초를 꽂고서 다시 살가죽을 덮었다. 연우는 끔찍한 고통에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낙조의 손목에 매달려 숨만 꺽꺽대며 겨우 쉬고 있었다.

“아, 니야……, 난……, 나는, 윽, 커윽…….”

“…….”

“내가, 내가 다……, 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숨을 띄엄띄엄 쉬어가며 말하던 연우가 이내 온몸을 기괴하게 뒤틀며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뱃속에 심어둔 독초가 피와 함께 지글지글 타고 있을 테다. 낙조가 연우의 몸에 심은 건 사람의 피와 닿으면 스스로 불타는 독초였다. 눈으로 보이진 않을 뿐 연우는 불타는 고통에 휩싸여 있을 것이었다. 낙조는 천천히 허리를 세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끊이지 않는 비명을 들으며, 고개를 돌리자 해화가 곁에 와 있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해화가 낙조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손을 잡아 왔다. 그리고 불이 꺼질 때까지, 낙조의 곁에서 연우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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