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몰락 (1)
무전기를 든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수호는 떨리는 손으로 주파수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무흠이 일러준 주파수만 잘 맞춘다면 청주에 남은 서천 사람들과 연락이 닿을 테다. 다만 조금이라도 손을 어긋나게 움직인다면 전혀 관련 없는 다른 이에게로 소리가 새어나갈 수도 있었다. 마른침을 몇 번이고 삼켰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수호는 숨소리까지 죽인 채 무전기를 만지작거렸다.
청주 본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귀도는 이곳에 자주 온 사람처럼 길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해화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히 더욱 긴장되는 마음에 계속해서 창문을 내려 숨을 내쉬었다. 귀도는 정말 눈만 깜박이는 마네킹 같았다. 찬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헤집어도 무뚝뚝한 얼굴로 운전에만 신경 썼다. 해화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왠지 눈이 마주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으스스한 기운은 떨치기 힘들었다.
온몸이 과각화되어 껍질이 올라온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즘이었다. 손을 쥐었다 폈다 해보아도 크게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무흠은 간간이 낙조에게 괜찮으냐 물었고 낙조는 항상 그랬듯이 괜찮다고 대답했다. 괜찮지 않아도 청주엔 가야 하니까. 자신 하나 때문에 모두가 차를 다시 돌릴 일도 없을 테다. 낙조는 보이지 않는 바닥까지 가라앉은 눈을 하고서 정면을 응시했다.
낙조가 느끼기엔 몸을 휘감는 기류마저 바뀐 것 같았다. 기운이라는 게 엄청난 힘을 억지로 압축시켜 놓은 듯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그게 터질 것 같았고, 잘 알 수 없는 정복감에 머리가 아파 왔다. 이 또한 몸이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인지 묻고 싶었으나 대답해 줄 이는 없었다.
“후, 후. 28번 운송 차량, 북쪽까지 반 시진 남았습니다.”
마침내 주파수를 찾은 수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워낙 살벌한 분위기에 답을 기다리는 것조차 힘겨웠다. 수호는 다시 무전기를 쥐고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운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부러 대답 안 하는 걸 수도 있어요.”
“……그래. 우린 이대로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밤이가 맞장구치며 핸들을 꽉 쥐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녀도 이때부턴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잘 알아들었겠죠?”
“삼승이 28대라며. 그럼 알아듣겠지 뭐. 암호가 너무 구리긴 하지만 우리가 뭔 힘이 있냐.”
수호의 걱정스러운 말에 밤이는 픽 웃으면서 대답했다. 해는 산 뒤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빛이라곤 차의 상향등뿐이었다. 그마저도 제주와는 달리 어디서 변종이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다행히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온도가 낮아져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변종은 보지 못했다. 본부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밤이는 핸들을 꽉 쥐고서 앞을 노려보았다.
*
“방금 그거…….”
“하필 북쪽이야, 경비 삼엄한데.”
유현이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귀도가 켈리를 데리고 나가며 뚫고 간 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살생 이후 북쪽 문의 경계는 한층 더 심해졌다. 무흠도 이곳으로 오는 길을 알고 있을 텐데, 직책상 귀도의 말을 따랐으리라 생각하며 유현은 CCTV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북쪽으로 연결된 야외 적외선 카메라엔 잡히는 게 없었다. 다행히 모두가 잠들 시간이었다.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의심을 살 일은 없을 듯했다.
“내가 아까 말한 거 다 기억하죠? 일단 북쪽으로 달리는 거예요. 손에 뭐 하나씩 쥐고. 경비 안 만날 리 없으니까.”
“만약 누가 잡히면……, 어떻게 하나요?”
“구조대와 합류 후 꼭 구하는 걸로 합시다.”
“무조건이요?”
유독 겁에 질린 한 여자가 몸을 웅크린 채 물었다. 나이가 꽤 어려 보이긴 했으나 유현과 그리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이지도 않았다. 유현은 한숨을 꾹 삼키고서 대답했다.
“무조건이란 건 어느 상황이든 조심해야 하는 말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두가 살아남는 게 목표예요. 약한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잡혔다고 한들 배신할 생각도 말아요. 우리,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까. 다 알지 않아요?”
유현의 진중한 말에 모두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그는 뒤돌아 다시 CCTV를 확인하면서 몰래 챙겨온 망치를 꽉 쥐었다. 실험실과 여러 창고를 뒤진 끝에 모두가 무기 비슷한 것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비상용이긴 했으나 북문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시끄러워진 본부에서 단체로 몰려다니다가 걸리면 의심을 살 게 빤했다. 유현은 흰 가운에 달린 이름표를 떼고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빨리 와라……, 빨리…….”
이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빠른 속도로 북문 부근으로 진입하는 차량 세 대가 보였다. 생각보다 작은 차의 크기에 걱정이 되긴 했으나 문부터 여는 것이 우선이었다. 유현이 뒤를 돌아 본부의 시스템을 미리 해킹해둔 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렸고, 락이 걸려있던 관리자 권한이 해제됐다. 모두가 한 몸이 된 것처럼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유현의 곁에 있던 남자가 여러 개의 버튼 중 하나를 길게 눌렀다. CCTV 속 북문의 문이 서서히 열리는 게 보였다.
가장 먼저 반응이 온 건 경비병들이었다. 북문 부근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무전을 통해 북문이 왜 열렸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유현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대답을 삼킨 채 북문이 완전히 열리고, 구조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인원이었다. 무사히 그들과 닿기만 한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시스템 오류인 것 같습니다. 바로 닫겠습니다.
다른 시스템실에서 경비병들에게 무전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바닥으로 툭 처박히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 순간적으로 무전기를 붙잡고 ‘안 돼!’라고 소리칠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유현은 두 손까지 깍지를 껴 가면서 차가 빨리 북문을 통과하길 기다렸다.
*
“문……이, 닫히려고 하는데요?”
“눈치가 좀 늘었네, 그새.”
귀도는 해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속도를 거세게 높였다. 해화는 손잡이를 붙잡고서 이를 악물었다. 반쯤 열렸던 문이 다시 닫히는 걸 보면서,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조그마한 턱을 넘은 것처럼 차가 덜컹거리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귀도가 해화의 머리를 잡아 아래로 숙이며 말했다.
“넌 여기 있어.”
그녀는 뒤에 놓았던 권총을 꺼내 들곤 차에서 내렸다. 뒤이어 귀도의 차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밤이와 무흠의 트럭까지 완전히 멈춰 섰다. 주위에 있는 경비병들이 무전으로 어딘가를 향해 소리치고 있을 때, 귀도는 타겟의 위치를 완전히 파악한 후 방아쇠를 당겼다. 죽이지는 말라. 자신이 서천을 떠나기 전 세성이 간곡하게 부탁했던 말이었다. 일부러 종아리나 발목을 향해 쏘면서, 귀도는 남은 이들이 준비하고 차에서 내릴 시간을 벌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경비병들이 총을 겨누며 달려오고 있었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봐야겠네.”
귀도는 느슨하게 쥔 권총을 빳빳한 힘으로 고쳐 쥐었다. 그리곤 자세를 갖추고 자신에게 총구를 겨눈 이들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탕, 타탕. 불규칙적으로 발사되는 총탄이 귀도를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코앞에 놓인 경비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았다기 보단, 정말 공포를 느낀 사람이 내는 비명에 가까웠다. 귀도가 의문에 잠시 빠져있을 때, 어디선가 풍기는 풀잎 향에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온몸이 고동색의 나무껍질로 뒤덮인 낙조가 정면을 응시한 채 자신과 함께 뛰고 있었다. 손끝에서 퍼져나온 굵은 나뭇가지와 아직 못 다 핀 엉겅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귀도는 놀라지 않고 낙조의 모습을 한참 보다가 말했다.
“멋지네. 진작 이렇게 다니지 그랬어.”
“…….”
낙조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곧 잠잠했던 건물 내부에서 불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사이렌 소리가 광활한 본부 안을 울렸다. 한참 시끄러워지겠구나. 낙조는 자신들에게서 도망치는 경비병들을 쫓으며 기세 좋게 뛰어 올랐다.
*
켈리가 만들어낸 환각제는 정말 최고의 음식이었다. 그녀를 따르던 하수인들이 왜 그렇게 그것에 매달렸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연우는 반쯤 몽롱한 상태로 의자에 누워 피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더 이상 자신을 끌어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신을 탓하며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올라온 자리였다.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던지, 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한 손에 주무를 수 있는 자리에 올라온 것이었다. 누구보다 빨랐던 백신 개발 소식에 겨우 방어벽을 친 여러 나라에서 연락이 쏟아졌다. 연우는 소장의 간곡한 부탁을 무덤덤한 얼굴로 들었다. 지금보다 더 많은 백신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그녀의 머릿속에선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어진 지 오래였다. 연우는 웃으며 가능하다고 말했고, 대신 소장의 지위를 반쯤 건네받길 원했다. 소장은 치욕스러운 얼굴로 그러겠다고 답했다.
친부모의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한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부모의 얼굴은 양부모이며 그들은 자신을 한국에서 키우다가 성인이 된 이후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나라로 떠났다. 성장하면서 크게, 그리고 자주 부딪쳤던 탓이었는지 연우가 독립할 나이가 되자마자 그들은 연우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달아났다. 연우는 그들이 간간이 보내오는 생활비로 학교를 다녔다. 어느 순간 생활비가 끊겼을 때도 겁먹지 않았다. 완벽하게 연이 끊겼다는 것에 기쁘기도 하면서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들이 결국은 자신을 또 저버렸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퍽 안쓰러웠다.
누군가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항상 처음 들어보는 섬의 이름을 댔다. 부모 없이 혼자 잘 컸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고통에 가득 찬 성장 서사보다 보통 가정에서 누구보다 앞서서 자란 서사가 더 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해외에 계시는 부모님, 어린 나이에 연구원이 된 자신, 스스로 독립한 채 꿋꿋하게 살아남은 서연우. 성인이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서사는 더욱 완벽하게 쌓여갔다.
만약 양부모가 살아 있다면, 얼굴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이렇게나 크게 성장한 자신을 보여주면서 자신을 떠났던 그들을 비웃어 주고 싶었다. 외로웠다, 보고 싶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연우에게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켈리가 남긴 제조법대로 만든 환각제는 가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사용했다. 머리가 터질 것 같거나, 상황이 맘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그때마다 환각제는 따뜻한 품에 안긴 듯한 느낌을 주었고 다정한 목소리가 연우의 이름을 부르는 환상을 내뿜었다. 끊을 수 없었고 끊을 의지마저 없었다. 자신의 결핍을 유일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이해해주는 건 결국 환상이었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결핍이라는 걸 연우는 너무나 잘 알았으나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 완벽해야 했으니까. 그 누구보다 잘났고 자신을 따라올 사람은 없으며 전무후무한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이런 결핍이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몽롱해진 정신으로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고 있을 때였다. 불이 다 꺼져 있던 실험실과 사무실 불이 깜박거리더니, 곧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놀라움보다 자신의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연우가 수화기를 들어 시스템 실의 넘버를 누르기도 전이었다.
-코드넘버 제로. 코드넘버 제로. 긴급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긴급대피하시기 바랍니다.
여러 곳에서 기계화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함을 느끼며 수화기를 내려놓은 연우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약통을 챙기곤 자신의 사무실을 나왔다. 아무도 없는 실험실이 붉은 등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복도도 소란스러웠다. 느린 걸음으로 밖으로 나간 연우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뛰어다니는 걸 보면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누군가 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연우를 붙잡고 외쳤다.
“변종, 변종이 들어왔어요! 처음 보는 변종이에요. 그러니까 빨리, 빨리 벙커로 가세요!”
그는 말을 남기고 먼저 걸음을 뗐다. 변종? 벙커? 백신이 개발된 이후 주로 쓰지 않던 단어라 어딘가 어색하게 들려왔다. 연우는 다시 눈을 깜박거리다가 사람들이 한 번 지나갔을 즈음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변종이라면 백신을 만들기 위해 채집하듯 모은 것들이 이미 본부 안에 있다. 변이하는 바이러스를 연구하기 위해 죽이지 않고 남겨놓은 게 그것들인데, 그걸 매일 보는 사람들이 뭘 보고 저렇게 놀란단 말인가. 연우는 비척비척 계단을 올라갔다. 정보실이라면 CCTV로 모든 곳을 볼 수 있었다. 또 파도처럼 인파가 떠밀려 내려갔다. 그중에 연우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정보실에 들어온 연우는 이미 텅 빈 자리를 보고서 문을 닫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CCTV를 순차적으로 들여다보았다.
“…….”
몽롱하게 풀려 있던 연우의 눈동자가 점차 선명해졌다. 그녀는 한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거 고낙조 아니야?”
스크린에 가득 찬 이의 모습은 나무껍질로 뒤덮인 장신의 남자였다. 손끝에선 나뭇가지가 돋아나 이리저리 경비병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아무리 총을 쏴도 탄피는 껍질을 뚫지 못했다. 연우는 헛웃음을 치면서 멀리 있던 마이크를 끌어 자신의 앞으로 데려왔다.
“드디어 변종이 됐구나.”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마이크의 버튼을 눌렀다. 다른 여러 스크린 속에선 사람들이 뒤를 쳐다보며 도망가고 있었다. 연우는 도망가는 사람들을 무표정으로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아, 아. 알려드립니다. 벙커나 대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모두 대피하세요. 격리구역 A부터 G까지 문을 개방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격리구역 A부터 G까지 문을 개방할 테니, 조금이라도 빨리 몸을 숨기세요.”
연우의 목소리가 본부 내부 이곳저곳에 울려 퍼졌다. 조그마한 스크린 속 이곳저곳이 붉은 불빛으로 가득 찼다. 연우는 눈으로 낙조의 움직임을 좇으며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플라스틱 뚜껑에 덮여 있던 스위치들은 모두 ‘위험’ 표시가 적혀 있었다.
“내가……, 당신 올 줄 알고 선물을 준비해뒀었어.”
연우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낙조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A부터 G까지 모든 버튼을 눌렀다. 동그랗고 큰 버튼이 무게감 있게 눌리고, 연우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그녀의 눈은 곧 반대편으로 향했다. 격리구역에 달린 CCTV였다. 문이 하나씩 위로 올라가면서, 안에 바글바글 차 있던 변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우는 모든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한 후 복도에 사람들이 없는 것까지 체크하곤 격리구역의 입구를 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네 피를 사냥개들에게 먹였어…….”
그녀의 목소리는 얇게 떨리면서도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연우는 변종들이 앞으로 구르듯 뛰쳐나가는 걸 보면서 소리 죽여 웃었다. 변종의 울음소리가 연우가 있는 정보실에서도 선명히 들렸다. 낙조도 진동과 소리를 들었는지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방향을 찾고 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우습고 흥미진진해서, 연우는 제자리에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미소를 지었다.
너만 내 손에 들어오면, 난 세상에서 둘도 없는 제일의 사냥꾼이 되겠지. 그리고 모두를 수호하는 영웅이 되는 거야. 오로지 내 힘으로,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은 채. 아주 멋진 사람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데에 뿌리를 내리겠지.
연우의 불경스러운 웃음이 정보실을 에워쌌다. 그녀는 행복에 겨운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약통에서 알약을 손바닥에 와르르 쏟았다. 물도 없이 알약을 짓씹어 삼키고선 이내 손으로 입을 막고 웃기 시작했다. 광기에 가득 찬 시선은 오로지 한곳에 쏠려 있었다. 고낙조. 그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