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귀환 (1)
겨울 하늘은 매번 해를 서두르게 거둔다. 노을이 지는 풍경을 지켜보는 것도 시간을 잘 맞춰야 가능한 일이 됐다. 몇 번 홀로 해가 지는 걸 보고 온 지운은 떠날 때가 얼마 남지 않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밖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어디서 어떻게 덮쳐올지 모르는 변종의 부재는 두려움을 없애고 평온함을 되찾게 해주었다.
배에 모든 짐을 싣고 난 후였다. 조금 지친 탓에 곧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맨 뒤에서 쫓아오던 지운이 앞장선 낙조에게 말했다.
“우리 노을 지는 거 보고 가면 안 돼?”
지운에겐 소박한 일상 중 하나. 안전한 상태에서 다 같이 모여 나온 적이 없었기에 더욱 보고 싶은 노을일 수 있었다. 낙조는 간절한 지운의 얼굴을 보고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자리를 틀고 앉아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노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여기에 음악만 있으면 딱인데.”
아쉽다는 듯 밤이가 중얼거렸다. 지운은 자신이 노래는 꽤 한다며 혼자서 박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팝송 하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바다 냄새, 서서히 꺼져가는 석양, 지운의 작은 멜로디가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감각이 하나로 연결돼 몸에 있던 긴장을 녹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인지 노을을 보는 눈가가 많이 포근해져 있었다.
지운의 노래가 끝나고, 밤이와 낙조가 작게 박수를 쳤다. 쑥스러워하는 지운의 뒤에서, 해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계획대로……, 잘 될까?”
“벌써 초치는 소리할 거면 넌 들어가라.”
밤이가 가볍게 타박했다. 해화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미소 짓다가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모두 살아 있는 것도 대단한 일이잖아.”
“…….”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
“평생 모르고 지냈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었잖아.”
해화는 말을 마치고 다리를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위로 다시 올라가는 게 조금은 걱정이 되는 듯싶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제 청주에서 도착한 마지막 보고서 내용은 예상 밖이었으니까. 무흠이 저녁 회의 때 가져와 읽어준 말은 어쩐지 함정이 있는 것 같았다.
「백신 공급량을 늘리는 것에 몰두하여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 전무함. 백신에 대한 의존도가 크며, 지금은 식량 공급에 집중중임.」
봄을 맞이할 계획이 없다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백신 공급량을 늘리고 있다는 것에서 모두가 멈칫거렸다. 켈리가 백신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삼승이 몰래 어느 정도의 양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청주에 있는 동안 그 풀을 직접 키웠다고 하기엔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결국 밤이는 보고서 내용에 잇따라 퍼진 의심을 잡는 한 마디를 꺼냈다.
「켈리가 직접 만들었다던 약, 악어와 새에서 만든 약. 제조 방법은 그런 것 같은데.」
「그걸 대피소 사람들에게 놓으면 더 큰일 나지. 환각 작용이 엄청날 텐데.」
한시라도 빨리 올라가서 청주를 제압하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 나왔다. 출항 시간을 12시간 앞당긴 후 모두가 잠들려 했지만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아 맞다. 고낙조.”
잠시 침묵이 돌고,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지나갔을 때였다. 해화가 뭔가 생각난 듯 낙조를 불렀다.
“릴리가 힘을 남겨두고 간 것 같다고 했잖아. 그거 정확히 뭔지 확인해볼 수 있어?”
“아……, 힘을 써보라고?”
“응.”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 조금 물러나 있어.”
낙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꽤 먼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않고서 자리만 지키고 있던 무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중한 눈빛으로 낙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묵묵히 변하지 않는 신뢰를 보내주는 사람. 낙조는 고개를 돌려 다른 일행을 찬찬히 응시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 비슷했다.
오른팔의 소매를 걷고 신경을 손끝으로 모았다. 힘 조절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손끝에서 무언가 돋아나는 걸 느끼며, 낙조는 일부러 힘을 느슨하게 주었다. 느린 속도로 나뭇가지가 길쭉하게 돋아나고, 그 끄트머리마다 녹색의 줄기가 여러 개 몰려 있었다.
“…….”
릴리가 몸으로 들어오기 전에 보였던 나뭇가지는 맞았으나 끝이 달라졌다. 가시의 개수가 줄었다는 게 특히 눈에 띄었다. 낙조는 팔을 살짝 안으로 모아 끄트머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녹색 줄기 위로는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그리 위협적이진 않았다. 낙조의 반응에 일행이 하나둘씩 다가와 새로 돋아난 것을 관찰했다.
“이게 뭐야?”
“꽃인 것 같은데?”
“꽃으로……, 뭘 하지?”
“독이 있다거나…….”
모두가 한마디씩 거드니 곧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해화는 조심스럽게 꽃봉오리를 매만져보더니 무엇인지 알겠다며 입을 열었다.
“엉겅퀴야.”
“웬 엉겅퀴?”
“그건 잘 모르지만……, 붉은 엉겅퀴인 건 맞아. 가시를 가진 꽃이지.”
“…….”
“그래서 다른 식물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해.”
해화의 말에 모두가 일순간 말을 멈췄다. 꽃이 가진 가시……. 낙조는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릴리의 몸에도 이 꽃이 피었던 적이 있었을까. 자신에게 주고 싶은 게 이 꽃이 맞다면, 무슨 마음으로 준 것인지 궁금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낙조는 모두의 시선이 쏠린 자신의 팔을 다시 원래 모습으로 거두었다.
“릴리가 줬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생각나는데.”
“어떤 게?”
“엉겅퀴 꽃말이 ‘보복’이거든.”
해화의 말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자신에게 힘을 넘길 수 있을 만큼 자신을 믿었다는 뜻일까. 릴리 말고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할 질문이 가슴에 남았다.
릴리는 너무 어린아이였다. 아름다운 것만 보고 자라도 부족한 시간에, 자신의 피에 갇혀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자세히 지켜보았다. 삼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날 때까지, 릴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그동안 준비하고 있던 힘을 낙조에게 넘겼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이었다. 릴리의 사정을 안 이상, 아이에게 매달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아이의 이야기를 알아서 보내줬어야 했던 건데. 다 큰 어른이 왜 아이의 뒤에 숨으려고 했을까. 왜 릴리는 나를 지키려고 했을까……. 낙조는 주먹을 꽉 쥐고서 한숨을 털어냈다.
노을의 끝물이었다. 주변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이제 들어가서 짐 싸자. 곧 출항 시간이야.”
무흠이 먼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지운은 아쉬운 듯 끝까지 자리에 남아 있다가 일행의 뒤를 쫓아 달렸다. 노을은 바다에 삼켜지듯 녹아내리면서 이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
세성과 서천을 지키기로 한 세 명의 간부, 그리고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 모두 밖으로 나와 일행을 배웅했다. 한 명씩 인사는 못하더라도 고마운 마음에 허리를 숙였다. 세성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수척해져 있었다. 한 명씩 배에 오르는 걸 보면서, 낙조는 세성에게 다가갔다. 시선이 마주친 이후 낙조가 올 줄 알았는지 그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세성님. 저 진짜 가요.”
“그래, 빨리 가버려.”
“돌아올 때까지 잘 계셔야 해요.”
“네가 언제 올지 알고.”
세성은 오묘하게 낙조가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피해 갔다. 평소였다면 자신을 놀리기 위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좀처럼 거둬지지 않는 찝찝한 마음에 낙조는 세성의 손을 잡고 말했다.
“돌아왔을 때도, 지금처럼 나와서 마중 나오셔야 해요.”
“바라는 것도 많다.”
“세성님, 그냥 알겠다고 하시면 되잖아요.”
“니보다 삼백 살은 더 먹은 사람한테 버릇이 없네.”
“그만 놀리세요.”
“고낙조.”
“…….”
“그때 내 마음을 읽지 않았구나.”
지도를 들고 세성을 찾아갔던 저녁. 자신의 마음을 읽어달라 부탁했던 세성. 낙조는 차게 식은 세성의 표정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세성은 낙조가 붙잡고 있던 손을 빼낸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두려워. 뭐가 무섭길래 나보고 자꾸 뭘 하라 마라 말하는 거야.”
“계속 어딜 가시는 것처럼 말씀하시잖아요.”
낙조는 속에 있던 덩어리를 결국 참지 못하고 꺼내 보였다. 이 순간에도 세성의 속을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렬했다. 적을 공격할 때 속을 읽는 것과, 함께 있는 이의 속을 읽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었다. 특히나 상대가 대놓고 자신을 내놓을수록, 낙조는 불안에 휩싸였다. 자신이 상상하는 것을 비웃을 만큼의 감정이 깃들어 있을까 봐.
“어서 타라. 시간 늦겠다.”
“…….”
세성은 결국 낙조에게 제대로 된 대답 하나 주지 않았다. 먼저 뒤돌아 다른 이들과 돌아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낙조는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해화의 목소리에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 낼 수밖에 없었다. 갑판 위에 오르자, 해화는 저만치 멀어진 세성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빨리 돌아와야겠네.”
*
항해는 순조로웠다. 올 때만큼 파도가 거세지도 않았고 변이된 해초에 발목이 묶이지도 않았다. 낙조는 뜬눈으로 내내 아래층에서 누워만 있었다. 가끔 지운이 먹을 것을 들고 찾아와도 입맛이 없다며 돌려보냈다.
조각배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배들 사이를 뚫고 배가 멈춰 섰다. 오전 아홉 시 삼십 분. 낙조는 시간을 확인한 후 일행들과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짐이라고 해봤자 먹을 것과 무기, 그리고 혹시 몰라 챙긴 귀한 약초들이 다였지만.
모든 짐을 다 밖으로 빼내고서 수량이 맞나 확인하던 도중 지운이 허겁지겁 무흠에게로 달려갔다. 조금 거리가 있어 말이 들리지는 않았으나 심각한 일인지 무흠도 듣자마자 지운이 있었던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흠이 큰 소리로 일행을 모두 불렀다.
지운이 발견한 건 육지로 올라온 해초였다. 추위에 결국 얼어버리긴 했으나, 거의 반쯤까지 걸쳐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왜 위로 올라왔지?”
“……배고파서 올라온 걸 수도 있지. 바닷속에 더 이상 먹을 게 없으니까.”
한참 해초를 바라보던 귀도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얼어버린 해초를 직접 쥐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툭 던져버렸다.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해초가 힘없이 바다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쯤이면 웬만한 살아 있는 것들은 다 변이됐다고 봐야 해. 멀쩡해 보여도 의심하란 말이야.”
귀도는 정확히 상황을 파악하고 꿰뚫어 정답까지 내놓았다. 그녀는 곧 자리를 떠나 짐이 모인 곳으로 돌아갔다. 지운은 한참 해초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살아 있는 사람들이 식물처럼 변이될 가능성도 있을까?”
“가능성이 없다고 보기는 힘들지. 하지만 아직까진 본 적이 없으니까……, 근처 대피소부터 먼저 가보는 게 좋겠어.”
낙조는 무거운 한숨을 털어내고서 귀도를 따라 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귀도가 안내한 길은 무척이나 좁았다. 아무리 몰래 숨겨둔 곳이라고 하지만 차가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모를 정도였다. 그녀는 묵묵히 무거운 짐을 두 개나 들고서 앞장섰다. 점차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쯤, 그녀가 도착했다며 바닥에 짐을 내려놓았다. 뒤에서 지운이 헥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 대로 나눠 타. 고낙조 너는 트럭 타고 싶다고 했으니까 트럭 쪽으로 가.”
그녀는 일사천리로 일행을 나누어 알맞은 차에 태웠다. 마지막으로 무흠이 트럭 운전석에 앉게 되면서, 모든 준비가 끝나게 되었다. 각자 가진 무전기로 상황을 체크하기로 했다. 순서대로 귀도, 밤이, 무흠이 운전하는 차가 일렬로 서서 시동을 켰다.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 엔진 소리가 조금은 껄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귀도의 말대로라면 이곳에서 대피소까지는 30분 거리였다. 낙조는 해화가 차에 타기 전 준 담요를 몸에 걸치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천히 거리를 빠져나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주변은 살필 수 없을 정도로 시야가 빠르게 지나갔다.
해가 점점 머리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자욱하게 낀 안개가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아 햇볕을 기대할 순 없었다.
낙조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담요를 꽉 말아 쥐었다. 골목을 빠져나올 때부터 심장이 뻐근했다. 대피소에 도착하면 곧장 속을 게워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주변은 안개뿐이었으나 길이 뚫려 있는 탓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차 세 대가 빠르게 좁은 도로를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