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작전 변경
2월 말, 청주.
더 이상 못 참겠다. 유현은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던지고서 한참을 씩씩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천에서 오는 연락이 줄어들었다. 갑작스럽게 뒤바뀐 계획에 대해 아무리 물어도 명확한 답은 오지 않았다.
서천에서 청주로 보내진 사람들은 본부 센터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켈리를 유심히 관찰하며 보고를 올리는 데에 있었다. 또한 주변 대피소 상황과 더불어 변종에게서 보이는 변이 반응도 책임지고 보안 문서를 만들었다. 특히 유현은 켈리가 온 이후, 그녀가 연우를 독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연우의 곁을 돌며 정보를 가져왔기에 하는 일이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켈리의 계획을 어그러뜨리고 서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귀도가 켈리를 서천으로 잡아가면서, 남은 사람들은 서천에서 오는 지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보안 네트워크로 오는 연락은 날이 갈수록 띄엄띄엄 오기 시작했다. 서천의 상황이 어떤지도 잘 알지 못했다. 아무리 라미와 연우의 대화를 보내도 서천은 잘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원초적 문제였던 켈리가 사라졌으니 서천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만 남은 사람들에겐 하루하루가 더욱 무거워졌다. 막연한 기다림은 불신과 의심을 사람들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고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할 일을 끝내고 서천에 보고서를 보내는 사람을 찾아온 유현은 아직도 연락이 없다는 소식에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물건을 벽에 힘껏 던지다가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당장 연락할 수 있는 방법 있어요?”
“전화 같은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 지금 당장.”
“……전화는 여기서 들킬 수가 있는데.”
“다 필요 없어요. 여기서 계속 이렇게 죽치고 살 거예요? 돌아가야 할 거 아니에요.”
유현의 따끔한 말에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떨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유현은 굳이 그를 위로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긴장감에 휩싸인 방에선 유현의 거친 숨소리만이 떠돌았다.
“기유현 씨가 전화를 요청했습니다. 바로 받아주실 분 계십니까.”
“…….”
곧 연락이 되었는지 남자는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먼저 예의를 차렸다. 유현은 굳은 표정으로 남자에게 다가가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남자가 질겁하며 입 모양으로 안 된다고 소리 없이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아예 전화기를 통째로 든 유현은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전화를 바꿔주는 소음에 집중했다.
“여보세요?”
-장승이다.
“하, 장승님이라 다행입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바로 후발대 보내서 저희 돌아가게 해주세요. 여기서 언제까지 눈치 보며 있어야 해요. 할 만큼 다 했잖아요.”
-……상황을 모두 전달하기엔 위험이 너무 크다. 이곳 준비가 끝나는 대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이 기다리게 해놓고 더 기다리라고요? 도대체 언제까지요. 서연우 그 여자가 청주를 휘어잡고 있습니다. 정말 완벽한 백신을 만들었다고요.”
-심정이 어떨지는 잘 알고 있다. 우리도 일주일 내로는 출발할 거야.
“……장승님.”
-말해라.
“왜……, 직접 장승님께서 온다고 하십니까. 원래 저희를 데리러 오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잖습니까.”
-저번에 보낸 보고와 같은 내용이다. 서천의 변종들은 모두 처리했고, 임시 대피소로 쓸만 한 곳으로 갖춰둔 상태다. 그러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 것뿐이다. 그리고……, 서천의 병사들과 함께 청주로 갈 것이다.
“청주에 와서 뭐 하시려고요. 정체를 드러내는 것도 모자라 도대체 어떤 싸움을 하시려고 그럽니까? 저희는 이미 서천에서 버려진 것 같다고요. 장승님은 아니더라도, 삼승님께선 저희를 다 잊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독려하실 땐 언제고, 얻을 걸 다 얻으니 내팽개치는 게……, 저희를 이끄는 사람이 해도 되는 일입니까?”
-……삼승님의 뜻은 내가 직접 가서 알려주겠다. 시간이 길어지면 너희가 먼저 잡힐 수도 있으니 이만 끊자. 청주에 도착하기 전, 신호를 줄 것이다. 먼저 알려주지 않아도 서천 사람이라면 모두 알 테니 그때 본부의 문을 열어라. 그리고 열린 문 쪽으로 모두 뛰어와. 이후로 청주의 보고서는 하나만 보내면 된다. 다가올 봄에 대해서 변종과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 계획을 알아내 보고해. ……너희를 구하러 가는 것이니 걱정 마라. 곧 가겠다.
철컥, 무흠은 잠깐의 시간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유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가만히 유현을 응시하고 있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라고 하십니까?”
“……일주일 내로 출발한대요. 근데……, 하, 모르겠다. 이번에 보낼 보고서가 마지막이에요. 청주가 봄을 대처할 계획을 알아내는 것.”
“드디어, 저희……, 돌아가는 건가요?”
남자는 조금 울컥한 듯 젖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유현은 어떻게 그에게 무흠의 말을 전해줄까 하다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네, 그렇겠죠. 일단……, 다음 보고서 보낼 때 서천 사람들 소집 좀 합시다. 변동된 계획에 대해서 다들 자세히 알아야 하니까. 그리고 오늘 들은 얘기도 그때 제가 다 설명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유현은 집어던진 가운을 주워 한숨을 푹 내쉬곤 방을 나왔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낸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이곳은 워낙 인기척이 없어 들었을 사람이 없었겠지만. 다시 가운을 입은 유현은 느린 걸음으로 옆 건물로 이동했다. 라미와의 대화도 끝났으니 굳이 연우의 곁을 빙빙 돌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도대체 개인 사무실에서 무얼 하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서천도 알아차리지 못한 변수가 있을 수도 있다. 유현은 복잡한 심정으로 연구실에 들어왔다. 연구원들이 유현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웬일로 오늘은 지각했네?”
“너무 피곤해서.”
“그래 보인다. 근데 오늘 좀 조심해야 해.”
“왜.”
“우리 하나밖에 없는 유능한 인재께서 기분이 안 좋으시거든.”
“……왜? 요즘에 기분 좋아 보이시던데.”
“몰라. 오늘 출근하시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사무실 들어가시더니 아직까지도 안 나오고 계셔.”
여자 연구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유현은 연우의 사무실이 있는 곳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리가 알아야 뭘 도와주든 할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무흠의 이야기는 속을 더 답답하게 만들 뿐이었다. 왜 서천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지, 어째서 청주 이곳을 삼키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백신 때문이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지만, 정말 모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만큼의 리스크를 감당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 서천이 보였던 행동과는 맞지 않았다. 차라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얘기해주면 좋을 텐데. 유현은 자리에 앉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대어 있다가 눈을 감았다.
*
“배는 준비됐어. 짐은 내일 해 뜨고 싣자고.”
무흠이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저녁 회의 시간에 맞춰 들어온 그는 평소와 다르게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가장 먼저 알아챈 밤이가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를 들여다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어디 다녀오길래 입이 그렇게 삐죽 튀어나왔어?”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괜한 트집 잡지 마.”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무흠은 밤이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서 낙조에게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밤이가 곧장 으르렁댔겠지만, 오늘은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낙조는 펼쳐둔 지도에서 본부가 있는 청주의 위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위에는 여기보다 훨씬 따뜻할 거예요. 이미 깨어난 변종이 있을지도 몰라요. 혹시 모르니까 계획을 세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하긴, 다음 주면 3월이니까…….”
“차는 충분한 거예요?”
“간부들의 차가 위쪽에 있어. 큰 차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
“웬만하면 큰 차에 병사분들 타게 하고, 트럭 있으면 제가 거기 뒤에 탈게요. 그리고 위치는 중간쯤.”
“일직선으로 가겠다?”
“첫 대피소 발견하기 전까지는요. 대피소 상황을 봐야 하니까……, 청주 근처 대피소들은 괜찮다고 했는데, 아래쪽은 상황 잘 모르잖아요.”
낙조의 말에 무흠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해남에서 청주까지……. 길은 시원하게 뚫려 있으니 넉넉하게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을 테다.
“근데 왜 굳이 해남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밤이가 물었다. 간부들의 차가 그곳에 몰려 있는 것도 의아했다.
“내 고향이야. 그쪽에 차 숨길 곳도 많고.”
테이블 중앙에 앉은 귀도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는 며칠 전부터 회의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특별히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세운 계획에 반발하지도 않았다. 각자의 역할이 주어지면서, 그녀의 존재도 낙조 일행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해봤는데……, 한 번에 모든 사람들을 데려올 순 없잖아.”
잠시 정적이 돈 이후, 해화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것도 서울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제주로 오는 건……, 힘들겠지. 인천으로 가서 어찌어찌 공항 주변을 처리한 후 비행기로 이송한다면 좋겠지만, 어쨌든 한 번에 움직이는 건 힘들어.”
“완전히 아래쪽은 배를 타는 게 나을 것 같고.”
귀도가 해화의 말에 덧붙여 의견을 냈다. 지금까지 나온 말들은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기에 누구 하나 나서서 반박하지 않았다. 해화는 조금 고민하는 듯싶더니 청주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할 수 있다면, 청주를 완전히 무너뜨리지 말고 제 2의 임시 대피소로 만드는 것도 방법일 것 같아.”
그리곤 매직펜을 들어 크게 원을 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낙조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해화를 응시했다.
“주변만 어느 정도 처리하는 거지. 사실 배보다 비행기가 안전할 수 있으니까. 빠르기도 하고. 지방에서 사람들을 구해 청주에서 잠깐 쉰 다음, 인천으로 가는 거야. 휴게소 같은 느낌이지.”
“……정리만 빨리 끝난다면 그게 좋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위아래로 찢어지면 불안하기도 하고.”
낙조 또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별다른 의견 없이 동조했다. 낙조는 세성의 빈자리를 힐끗 바라보았다가 지도를 접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할게요. 내일 배에 짐 실어야 하니까 모두 빨리 주무시구요.”
낙조의 말에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서천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 내부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겁을 먹은 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복도에서 담소를 나누어도 무어라 탓하는 이 없다. 빈방에서 홀로 지도를 접고 있던 낙조는 다시 세성의 빈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세성은 사흘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전에 나타나 보이는 얼굴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찾아갔다가 괜히 세성을 더 힘들게 할까 싶어 일부러 그를 찾지 않았다. 낙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먼저 방을 나간 이들이 조곤조곤 담소를 나누면서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회의를 하는 방에서 뒤쪽으로 한참 가다 보면 삼승이 있는 방이 나온다. 세성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낙조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서 뒤돌아 그곳으로 향했다.
‘내일모레면 출발이니까……, 인사라도 해야지.’
걱정되기도 했고, 조금은 속상했다. 삼승에 대한 죄책감을 오로지 홀로 짊어지려고 하는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기에도 난감한 입장이었다. 삼승과 세성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모를뿐더러 세성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삼승을 지키겠다고 했는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삼승을 지키는 일을 오로지 세성에게 맡기지 않으려 했으나 세성이 완강하게 자신 말고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기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식사 시간 때마다 해화가 그를 찾아가는 건 알았다. 하루에 세 번을 찾아가면, 세성은 한 번 얼굴을 보일까 말까였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서 무슨 생각을 하며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낙조는 방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심란해지는 걸 느꼈다.
마침내 문 앞까지 왔을 때, 낙조는 지도를 든 손을 바꿔 쥐고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인기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 급해져 입을 열었다.
“세성님, 낙조예요.”
“…….”
“세성님,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힘을 실어 문을 두드리며 그를 재차 불렀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포기할 줄 모르는 낙조의 부름에 문이 열렸다. 낙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두 눈에 천이 감긴 채 누워있는 삼승의 모습이 가장 먼저 보였다. 세성은 그녀의 발치에 앉아 낙조를 바라고 있었다.
“회의 까먹었다고 혼내러 온 거냐.”
“반은 맞아요.”
생각보다 기운이 없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낙조는 세성의 곁으로 다가가 지도를 내밀었다. 그에게 계획을 말하기 위해 입을 떼려는데, 세성이 문득 먼저 입을 열어 낙조의 말을 막았다.
“고낙조.”
“……어, 예.”
“날 처음 봤을 때 애새끼라고 생각했었지.”
“…….”
“맞잖아? 난 그때도 네 속을 빤히 보고 있었으니까.”
“그때 얘기는 왜 갑자기 꺼내세요.”
“지금 네가 보는 내 마음은 어떻게 보이냐.”
세성은 삼승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낙조에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먹먹하게 젖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낙조는 지도를 꽉 쥐면서 고개를 저었다.
“알고 싶지 않습니다.”
“왜. 내가 죽고 싶어 하기라도 할까 봐?”
“…….”
“나는 어차피 죽게 돼 있어. 그냥……, 지금 날 찾아온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맞다면, 내 마음을 읽고 위로해줬으면 좋겠구나.”
그는 힘이 다 빠진 손을 들어 낙조의 팔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낙조는 무릎을 꿇고 앉아 세성의 손을 살포시 감싸 쥐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씩 포기하는 듯한 세성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졌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이곳에 자신을 스스로 가둔 것이겠지. 낙조는 굳이 그의 속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붙잡은 손으로도 느껴졌다. 차디찬 손끝이 얼마나 외로워하는지, 마음이 얼마나 황폐한지……. 감히 삼승의 존재가 그에게 어땠는지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자신을 살린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는 최악의 불행이니까. 낙조는 말없이 세성의 손을 쥐고서 손등을 쓰다듬었다. 삼승의 옅은 숨소리가 방안을 휘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