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머리를 짓밟고 심장을 깨물어라 (4)
어디를 가던 눈앞엔 낯선 방문과 복도가 끝없이 펼쳐졌다.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은 병사들은 각자 맡은 구역을 계속해서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지키고 있었다. 저 안에 중요한 무언가가 들었다는 건 확실했다. 낙조와 해화는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그들 곁으로 총을 든 병사 하나가 스윽 지나갔다.
“안에 삼승이 있을 확률은?”
“그럼 병사들이 더 많았겠지.”
“아무래도 좀 적지.”
낙조는 해화의 대답에 수긍하면서 다시 밖을 힐끔 바라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수만 다섯이었다. 타이밍을 잘만 노린다면 이곳을 정리하는 건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잘게 떠는 해화를 바라보면서, 낙조가 속삭였다.
“나갔다 올게.”
“미쳤어?”
“총 세 발까진 맞을 수 있어.”
더 말을 이었다간 해화에게 완전히 붙들릴 것 같아 낙조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몸을 움직였다. 문을 열고 조용히 복도를 밟으니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까 이 앞을 지나간 병사는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낙조는 습관적으로 오른손에 힘을 모으려 했다가 문득 릴리가 떠올라 손을 내려놓았다.
‘왼손은 익숙하지 않아도……, 뭐.’
싱거운 생각을 하면서 기둥 뒤에 몸을 숨긴 뒤 왼손으로 힘을 집중시켰다. 혈관이 울긋불긋 돋기 시작했다. 변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낙조는 뾰족한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들어찬 갈퀴를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병사 둘을 먼저 탐색했다. 그들은 문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서서 종종 무전을 치고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끝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조는 몸을 낮게 움츠린 후 왼손 손바닥을 바닥에 댔다. 손끝에서 퍼져나간 나뭇가지가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왼쪽에 서 있던 병사의 발끝까지 다가갔다. 병사는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에 주위를 살피다가 문득 바닥을 내려다보고 소리를 우악스럽게 질렀다. 기괴하게 뻗쳐 돋아난 나뭇가지 다섯 개는 사람의 손을 닮은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낯선 형태로 자신의 발목을 천천히 감싸고 있었다. 곁에 있던 병사가 황급히 다가와 발로 나뭇가지를 몇 번이고 밟았지만 끄떡도 없었다.
“빨리, 빨리 어떻게 좀 해 봐!”
“하고 있잖아, 하고 있는데, 씹!”
발목을 쥐는 힘이 거세질수록 병사는 겁에 질려 바닥을 긁으며 도망치려 했고, 남은 병사는 결국 총을 장전한 후 나뭇가지를 겨누었다. 낙조는 기둥 뒤에 숨어 그때만을 기다린 것처럼 단숨에 손가락 하나를 위쪽으로 꺾어 총을 쥔 병사의 목을 조금 깊게 베었다.
“억…….”
피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터졌다. 병사는 깊게 파인 목을 붙잡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 모습에 붙잡힌 병사는 소리를 꽥 지르면서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낙조는 그대로 쥐고 있던 병사의 발목을 완전히 으스러뜨린 후, 손을 거두었다. 병사의 비명을 듣고 몰려드는 녀석들의 수를 세야 했다. 낙조의 얼굴 위론 여유가 가득했다.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병사 세 명이 몰려들었다. 세 명밖에 없나? 병사들은 웅덩이처럼 고인 피와 기괴하게 꺾인 병사의 발목을 보면서 자신들끼리 소곤거렸다.
“이거, 씨……, 고낙조 아냐?”
“그 새끼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와?”
“밖으로 나갈 줄 알고 다 앞쪽으로 빠졌는데. 야, 무전 쳐.”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키 큰 병사 하나가 다른 병사에게 지시했다.
‘어림도 없지.’
낙조는 무표정인 얼굴로 눈을 깜박이면서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의 뒤쪽으로 뾰족한 나뭇가지를 세워 달려들었다. 차례대로 나뭇가지 끄트머리에 등이 박힌 병사들은 뒤를 돌아보려 목을 꺾다가 낙조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축 늘어졌다. 낙조는 가만히 서서 병사들을 먼지 털 듯이 바닥에 떨어뜨린 후 해화를 불렀다.
“나와도 돼.”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안에서 모든 소리를 다 들었을 테다. 해화는 착잡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 처참한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 죽은 거야?”
“죽기 직전.”
“그래……, 그래도 살려는 줬다 이거네.”
해화는 한숨을 가만히 내쉬고서 낙조를 바라보았다. 낙조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이곤 병사들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무전기부터 해화가 다룰 수 있는 총, 탄환, 그리고 카드키까지. 이렇게까지 꼭꼭 숨겨둔 건 무엇일까. 카드키를 패드에 대니 곧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열렸다.
“…….”
“이게 뭐야?”
방으로 들어선 낙조와 해화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눈을 찌푸렸다. 방 안엔 동면을 맞이해 바싹 마른 나뭇가지가 심어진 화분이 바닥에 넓게 깔려 있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혹시 몰라 벽을 쳐보았으나 소득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눈길을 끌만 한 건 조그마한 의자 하나였는데, 그 의자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낙조는 허리춤에 두 손을 올려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꽝이네.”
“릴리가 잘못 알았나?”
“분명 큰 나무가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어. 진짜 그랬다니까.”
해화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병사들의 피 냄새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낙조는 자신의 손과는 달리 앙상하게 메마른 화분 속 나뭇가지를 보면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
“자네는 밖으로 나가.”
“……아직도 할 일이 많나 보네.”
“삼승의 눈을 가릴 때까지 움직여야지.”
“…….”
삼승을 향하는 말에 귀도의 얼굴이 축 가라앉았다. 세성은 답답한 속을 치지도 못하고서 숨을 삼켰다. 어떤 마음인지는 대충 알 수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감정 같은 것을 소모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세성은 귀도를 문이 있는 쪽으로 밀며 말했다.
“어서 가. 밖에서 불을 지른 민간인을 찾아. 그리고 그들을 지켜. 병사들은……, 멋대로 해도 돼.”
“언제부터 세성이 나한테 명령을 할 수 있게 됐지.”
“그런 게 이제 중요한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됐지.”
귀도는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하고서 천천히 세성을 지나쳤다. 앞으로 걸어가던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뒤돌아 세성을 불렀다.
“세성.”
“시간 없으니 빨리 말해.”
“난 삼승이 죽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 세성도 그 사람을 끊어낼 방법을 생각해봐.”
귀도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남기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세성은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그녀의 말을 되새겼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세성은 마음을 다잡고 미로에 다시 몸을 던졌다. 밖으로 무사히 나갔다면 다행이지만, 낙조를 만나든 만나지 않든 삼승을 막을 방법은 자신에게 있었다. 삼승이 있는 곳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야 했다. 세성은 급하게 복도를 뛰어다니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왜 여기로 가르쳐줬지 그럼?”
“그냥 궁금해서? 애기니까.”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 이 길을 알려줬다고?”
아직 기운이 남은 목소리들을 들으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성은 서둘러 기둥을 돌아 깊은 방으로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란 듯 해화와 낙조가 동시에 숨을 허겁지겁 삼켰다. 둘은 멍하니 세성을 바라만 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깜짝 놀랐잖아요.”
“너희들은 이 상황에서 나 여깄소, 하고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생각보다 병사들이……, 좀 무식한 편인 것 같던데요.”
세성은 그제야 방 밖에 어지럽게 널려진 병사들의 몸을 보고 이마를 짚었다. 숨을 끊어지지 않았는지 미약하게나마 몸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낙조를 노려 보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순 없었다. 세성은 먼저 안쪽의 버튼을 눌러 문을 닫은 후 입을 열었다.
“서천엔 총 일곱 개의 은거지가 있다. 그중 세 개의 방은 삼승만이 들어갈 수 있어. 아마 그 세 개의 방 중 한 곳에 있을 거다.”
“알아요. 릴리한테 물어봤거든요. 큰 나무가 있다고 했는데.”
“……그 애가 여기라고 하든?”
“예. 근데 아닌 것 같아요. 여긴 병사 카드키로도 열리고, 작은 나무들밖에 없어요.”
허탈한 목소리로 낙조가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세성은 방 안을 가득 채운 화분을 내려다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그리곤 낙조의 손에 쥐어 주며 당부했다.
“큰 나무라고 하니 무엇인지 알겠다. 운이 좋았어. 일곱 개의 은거지 중 내가 삼승과 함께 만든 방이야. 그리고 삼승이 부탁을 하나 했었지. 자신의 휴식 시간에 간부들 몰래 밖에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달라고.”
“……네.”
세성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직까진 알 수 없었다. 일단 먼저 대답을 내놓고서, 낙조는 손에 들린 작은 병을 꽉 쥐었다. 세성은 모든 게 정리가 된 듯한 표정을 짓고서 해화와 낙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곤 작은 목소리로 하나씩 일러주기 시작했다.
“그 통로를 이 방 건너편에 숨겨두었다.”
“……벽을 뚫어야 한단 말이에요?”
“삼승만이 열 수 있는 문이니 힘을 써야지. 물론 경보가 울릴 테고, 삼승이 직접 이곳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니 벽으로 보이는 것은 건너편의 방으로 갈 수 있는 문이고, 그 문은 삼승만이 열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세성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출입구가 있다는 것까지, 완벽한 엄폐가 가능한 곳이었다. 낙조는 밖에 있을 일행을 생각하면서 입술을 씹었다. 당장이라도 세성과 함께 밖으로 나가고 싶었으나 사방에서 자신을 압박하는 기분이었다.
“늦지 않겠죠?”
낙조는 조그마한 약병을 꽉 쥐고서 세성에게 물었다. 세성은 세세한 설명 없이도 낙조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았다.
“귀도를 보냈다. 걱정 마.”
“……그 여자는 삼승을 아직―”
“―걱정 마라. 남은 얘기는 다음에 해줄 테니.”
세성은 단호하게 낙조의 말을 잘랐다. 선택지가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부서질 수 있는 벽이라면, 아예 천장 자체가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런 부분도 다 계산하고 말씀해 주신 거겠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인 세성을 등질 이유는 없었다. 낙조는 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세성에게 물었다.
“그럼, 이 약은 뭐예요?”
“독약이다.”
냉랭한 목소리로 세성이 대답했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면서 말을 덧붙였다.
“사람의 피부를 태울 만큼 강한 독약이지.”
“……태우다뇨?”
“삼승의 눈에 그 약을 뿌려야 한다.”
“죽이지는 않는다는 말이 이거였어요?”
“삼승의 무기는 눈이다. 인간의 감정까지 읽을 수 있는 눈을 계속 둬선 이기기 힘들다. 켈리보다 더할 거야.”
“…….”
세성은 마치 켈리와 낙조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분위기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주저할 시간도 없었다. 낙조는 왼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단단히 말아쥐었다. 최대한 천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밑부분을 깨기 위해 무릎 한쪽을 굽혀 앉았다. 세성과 눈을 마주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낙조는 망설이지 않고 벽을 내리쳤다. 한 번 만에 벽에 금이 뿌리처럼 뻗어나갔다. 낙조는 손을 들어 같은 부분을 쿵, 하고 찍었다.
파스스…….
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자잘한 안개가 올라왔다. 천천히 뜯어진 부분을 쥐고 껍질을 떼어 내듯이 벽을 찢기 시작했다. 무릎 정도의 높이만큼 벽을 뜯었을 때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흰 벽 위로, 투명한 유리관이 보였다. 낙조는 잠시 손에 쥔 조각을 내려놓았다. 자세히 잘 보이진 않았지만 투명한 유리관 안에는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게 문이에요?”
“…….”
세성을 향해 물었으나 세성 또한 심각해진 표정으로 가만히 그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낙조는 답답한 마음에 다시 자세를 잡고서 아예 윗부분을 향해 주먹을 꽂았다. 이미 갈라진 금이 쩌적, 소리를 내며 조각나 아래로 떨어졌다. 투둑, 툭. 크고 작은 조각들이 바닥에 쌓이고, 먼지가 한 움큼 올라와 코끝이 간지러워졌다. 낙조는 인중을 닦고서 서서히 걷히는 먼지더미 너머를 바라보았다.
“…….”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관 안에는 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삼승이……, 유리관에 몸을 가까이 붙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몸이 바싹 굳는 느낌에 낙조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했던 얘기가 들렸을까 싶어 함부로 입도 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삼승은 꽤 오랫동안 낙조를 물속 너머로 응시하다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제야 숨이 트였다. 세성이 말한 삼승의 ‘눈’이란 것이 얼마나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왜 물을 담아뒀을까. 낙조는 투명한 유리관 안을 넘실거리는 물을 보면서 생각했다. 삼승은 건너편에 자신들을 등지고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먼저 이곳을 넘어올 생각이 애초에 없어 보였다.
낙조는 천천히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모든 감각이 자신의 의지와, 릴리의 분노에 맞추어 소용돌이치듯 피를 뜨겁게 끓이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하게 솟은 핏줄은 맥박처럼 쿵쿵거리며 뛰었고 더욱 단단해진 주먹엔 조금의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낙조는 천천히 오른손 주먹을 들어 삼승의 뒷모습을 겨냥했다. 주저하지 않았다. 주먹이 유리관을 강타했고, 유리 파편이 이리저리 튀면서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안에 갇혀 있던 물이 울컥, 쏟아졌다. 삼승이 있는 방과 낙조가 있는 방에 물이 고였다. 완전히 벽이 허물어졌을 때, 삼승은 뒤를 돌았다. 그녀의 두 눈은 흰 자로 뒤집혀진 채 낙조를 끌어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