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머리를 짓밟고 심장을 깨물어라 (3)
환각을 일으킬 수 있는 시간은 잠깐뿐이다. 환각에서 깨어나면, 자신이 세뇌한 명령만이 머릿속에 맴돌겠지. 비척거리며 나간 수호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삼승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쉽게 내어줄 수 없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켜왔는지 서천 사람이라면 모두가 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능력을 아끼지 않았다. 선량하고 자비롭게 기회를 베풀었다. 끝끝내 자신을 이겨 먹으려고 했던 이들은 세월이 흘러 아예 서천을 떠나게 됐다. 겨우 잠잠해졌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켈리는 그 틈을 노린 것처럼 자신에게 선악과를 내보였다.
식물의 기능을 이용한 인체 개조. 좋게 말하면 새 품종을 만들어 재배해보자는 이야기였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삼승이 모를 리 없었다. 켈리의 계획은 겉으로 봤을 땐 흥미로울 수 있으나 위험 요소가 많았다. 켈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모든 설명을 마친 후, 그녀는 삼승에게 속삭였다.
「시대 교차가 이뤄져야 해요, 삼승님. 우리가 아무리 서천을 지킨다고 해도 언젠가는 도둑맞을 수도 있어요. 아예 이곳이 들켜서 삼승님과 서천 사람들 모두 잡혀가서 꼼짝없이 생체 실험이라도 당하면요?」
삼승은 켈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서천꽃밭이 가진 뜻과도 어울리지 않고, 사사로운 욕망이 너무나 비대했다. 뱀심이 가득한 켈리를 서천에 오래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삼승은 곧장 귀도의 친조부인 큰심방에게 전했고, 그는 오랫동안 허공을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삼승이 선택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른 후 그 어떤 것도 뒤바꿀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큰심방은 켈리가 그에게 무엇을 물어볼 때마다 곁을 내쳤다. 삼승이 간사하게 입을 움직였다고 생각한 켈리는 삼승을 직접 찾아와 따졌다. 자신의 계획을 왜 큰심방에게 전하냐고. 그녀가 화가 난 이유는 삼승이 생각한 이유와 달랐다. 켈리는 자신이 직접 세운 인간개조 계획이 새어나갔다는 점과, 큰심방이 그 계획을 빼앗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삼승이 차분하게 그럼 왜 자신에게 제안했느냐고 묻자, 켈리는 파란 눈동자를 번득이면서 대답했다.
「그런 큰일을 하려면 삼승님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이 움직여야 하니까요.」
「애초에 서천의 힘을 이용하려 들어 온 거냐.」
「미지의 세계를 알기 전과 후는 다르잖아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살아야죠. 구식적인 방법으로 서천을 언제까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약육강식 법칙은 변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절대로.」
「지금까지 지킬 수 있었던 이유를 몰살하지 마라. 네 지식은 너만의 것일 수 있지만, 서천은 공공적으로 쓰이는 곳이 아니다.」
「그럼 왜 숨어 살아야 해요? 밖에 멍청한 놈들이 떠들어대는 걸 보고만 있고. 아픈 사람들 전부 구해주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목을 매요. 살아 있는 한 생명은 끊임없이 진화해요. 진화의 시작을 우리가 해낼 수 있다니까요?」
켈리는 당돌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서천 안에서 이루어낸 일들도 많았다. 큰심방은 열정적인 학자가 들어왔다며 기뻐했다. 모두가 켈리는 서천에서 간부의 위치까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삼승 또한 켈리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켈리가 삼승에게 독사과를 보여준 것이었다. 삼승은 켈리를 간부의 위치로 올리지 않았고, 자신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한 켈리는 그대로 서천의 기록들과 함께 도망쳤다.
그 이상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켈리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는 소식이 하나둘씩 밀려올 때쯤, 서천 내부도 함께 혼란스러워졌다. 삼승은 침묵을 지켰다. 조금씩 서로 갈라서는 듯한 간부들은 세성이 저지했다. 귀도를 데리고 서천에 온 건 켈리가 주인이라는 ‘악어와 새’를 발견한 후였다.
가끔 생각하곤 했다. 그때 정말 켈리를 죽였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하고.
귀도를 시켜 켈리에게 경고를 준 이후, 켈리는 잠시 조용해진 것 같았다. 삼승의 불안함은 내심 커져만 갔다. 서천에 숨어 있던 켈리의 수하들을 모두 처리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를 껴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숨기는 사람처럼 전전긍긍했고 가끔 켈리가 자신에게 내밀었던 ‘진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삼승은 언제나 건강해야 했다. 규칙적인 식사와 균형 잡힌 식단, 업무 시간과 휴식 시간을 정확히 지켜가며 몸을 지켰다. 차기 삼승이 되었을 때부터 지켜온 일들이었기에 그리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던 일상에 의문이 끼어든 건 그때부터였다.
켈리의 말대로 몸의 기능을 식물이 도맡는다면, 어떤 환경에도 견딜 수 있고 위험을 미리 감지하여 스스로 진화할 줄 아는 인간이 된다면……. 자신이 지켜온 일상이 단번에 바뀔 수도 있었다. 그동안 서천꽃밭을 위해, 이름 없는 병을 앓는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던 일상은 단숨에 자신의 희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평 한 번 안 하고, 물질에 대한 욕망 하나 없이 수십 년을 ‘버텼다고’ 생각한 게 발단이었다.
삼승은 서천 밖으로 나와 ‘악어와 새’ 우편함에 직접 편지를 넣었다. 단 하루라도 자신의 일상이 어긋나면 안 되는 삶에 속박되어 있었기에 휴식 시간을 이용해야 했다. 켈리와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암호 같은 것을 만들어 짧은 시를 지어 연락을 주고받았다. 켈리의 계획은 몇 년 사이 더욱 발전해 있었고 성과도 보이는 중이었다. 한 번은 켈리가 편지에 적어 물었다. ‘정말 내 일을 도우려는 이유가 뭐예요?’
어떻게 답을 할까 고민하다가 두 문장을 적어 보냈다.
「서천이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나를 통제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어.」
차기 삼승이 나타난다면, 아직 어린 나이일 사람에게 꽃밭에는 절대 발을 디디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을 뒤엎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로 살고 싶었다. 서천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서천의 모든 면이 비뚤게 보이기 시작했다. 어째서 삼승의 피로만 자라나는 걸까. 왜 하필 다른 액체도 아니고 사람의 피일까. 도대체 왜……. 그런 생각으로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난 건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어지럼증과 여러 번의 구토를 하고 난 후 삼승은 귀도와 함께 밖으로 나가 병원을 찾았다. 간부들은 서천 안에서 약을 짓겠다고 했지만 삼승은 휴식 시간을 이용해 서천을 빠져나왔다.
「최근에 스트레스 심하게 받으신 적 있나요?」
의사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삼승에게 물었다. 귀도는 삼승의 뒤편에 서 있었다. 삼승은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대답했다.
「아니요.」
「흠……, 신경성 위염인데, 환자분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일일 수도 있어요. 당분간 좀 푹 쉬시고. 약 드릴 테니까 사흘 동안 잘 챙겨 드세요. 그래도 안 나으면 다시 오세요.」
처방전을 받았지만 약국엔 가지 않았다. 다시 서천으로 돌아온 후, 삼승은 간부들이 지은 약을 먹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들었고 새벽녘에 눈을 떴다. 속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바이러스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다. 죽음과 삶 중간에 있는 것으로 세포에 들러붙어 악착같이 증식한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바이러스가 수두룩했다. 치료제로 사용할 풀을 만드는 게 서천이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귀한 세 가지의 풀은, 삼승의 피를 먹고 자랐다.
삼승은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생각했다. 숨살이풀, 살살이풀, 피살이풀 모두……, 자신의 피에 기생하여 사는 풀들이 아닌가. 가장 귀하다고 여겨지는 풀. 자신의 건강을 살피는 듯하지만 모두 그 풀들이 건강하게 자라지 못할까 봐 자신을 걱정하는 것도 안다. 그럼 자신은 건강한 피를 생산하고 반납하는 개체밖에 되지 않는다.
끝내 자신의 삶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삼승은 켈리의 요구를 들어주며 서천 내부의 일을 종종 알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삼승은 네모난 상자 안에 갇혀 산다는 생각에 괴로워졌다. 홀로 조용히 키운 괴로움은 증오가 되었고, 하루라도 빨리 켈리의 계획이 실현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그동안 자신에게서 뺏어간 시간을 보상받는다는 생각이었다. 살살이풀, 숨살이풀, 피살이풀은 세계 여러 곳에서 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에게로 보내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발신자 불명의 소포.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없는―존재를 숨겨야 했기에 답조차 없는―얼굴도 모르는 그들이 다 사라지길 원했다.
누군가에겐 지옥이었을 그날 밤, 삼승은 서천을 감싸고 있는 수풀 사이에 서서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들으며 조용히 웃었다. 자신이 머리 꼭대기 위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신은 모든 걸 계획할 수 있다. 인간의 생사까지 책임지는 내가 신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생명일 것이다. 삼승은 소리죽여 웃으면서 피에 젖은 새벽을 만끽했다.
“이제 다시 시작하면 돼.”
삼승이 물로 가득 찬 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유리 위로 손을 얹은 후 이마까지 기댔다. 차가운 물의 온도가 생생히 전해졌다. 손끝을 세워 유리를 긁다가, 다시 팔을 내렸다.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생각에 도취해 있을 때쯤 고낙조라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켈리는 자신들의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라고 덧붙였다.
「어쩌면 삼승님의 피가 아닌, 고낙조의 피로 그 귀한 풀들을 기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삼승은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더 이상 수많은 바늘이 꽂힌 기계에 손을 넣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이제 그곳에 자신은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겠지.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그깟 피가 뭐라고, 자신은 수십 년이나 이렇게 살아왔는데 살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삼승은 눈이 뒤집어지기 직전의 상태로 기뻐했다.
신체의 장기기관에 각기 다른 식물이 기생하였는데도 잘 살아 있다는 말은, 거의 모든 약초에 사용할 수 있는 피라는 말이 된다. 어쩌면 자신이 손을 쓰지 않고도 더 많은 약초를 만들어내, 노화를 완전히 멈추어 오랜 삶을 지속시킬 수도 있을 테다.
“그래, 이제 다 됐다……. 거의 끝났어.”
삼승은 수호에게 세뇌시킨 문장을 다시금 떠올렸다. 고낙조를 데려와. 단호하면서도 너무나 황홀한 말이었다. 서천에 스스로 걸어들어왔을 때부터 얼마나 기뻤는가. 최근 자신과 켈리의 계획을 망칠 일들을 벌이긴 했으나 결국엔 잡았으니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삼승은 뒤돌아 닫힌 문을 응시했다. 저 문이 열리고, 고낙조가 걸어 들어오길 기다려야 했다. 얼른 그 순간이 오기를. 그녀는 뱀심 가득한 눈으로 입가에 고인 침을 삼켰다.
*
아수라장이었다. 세성은 말도 없이 찾아와 무흠이 갇힌 방을 열어주고서 다시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누구를 찾아갈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무흠은 내심 안도하며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시간은 좀처럼 가지 않았는데, 먼 곳에서부터 큰소리와 여러 개의 발자국소리가 겹쳐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의 간격은 조금씩 좁혀지더니 이내 완전히 멎었다. 무흠은 그제야 밖으로 나와 복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흰 복도와 바닥, 천장. 그리고 모두 열려 있는 문. 사람은 없었다.
낙조와 해화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다. 이제 무흠이 믿을 사람은 세성밖에 없었다. 그가 둘을 풀어주었다고 해도, 둘이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갔을지 확신하기 힘들었다. 문이 하나밖에 없는 서천은 감옥과 같았다.
무기고로 향하던 도중 무흠은 바닥에 떨어진 무전기를 주웠다. 운이 좋았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알 수 있었다. 병사들 대부분은 밖에 나가 있는 듯했다. 반복하여 들리는 단어는 ‘불’이었다.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지 어지럽게 서로를 부르는 외침이 섞여 들렸다.
무기고 근처까지 온 무흠은 아직 남은 병사들이 내부를 뛰어다니는 걸 보고 작은 방에 몸을 숨겼다. 무전기를 끄고선 문틈으로 누가, 어느 방향으로 지나가는지 속속들이 확인했다. 웬만한 병사들을 직접 통솔했기에 그들의 동선을 추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침내 무기고를 지키는 병사가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문을 박차고 나갔다. 당황한 병사들이 총구를 들이밀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무흠의 얼굴을 확인한 병사들은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나에 대해 어떤 명령이 내려졌지?」
「그게……, 장, 장승님, 일단 돌아가세요.」
「쏘라고 했나?」
「장승님, 저희는 진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쏴도 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흠은 양손으로 두 개의 총구를 잡고 위로 올렸다. 탕, 탕! 병사들이 아우성치며 무흠의 힘에 떠내려갔다. 한 놈의 배를 걷어찬 후 다른 놈의 머리를 후려치고서 무흠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무기고 안에 남은 총은 몇 개 없었다. 많이들 빠져나갔군. 불이 얼마나 심하게 났다는 거야. 가만히 생각하던 무흠은 밖에서 불이 어떻게 났을까,를 생각하다가 밤이와 수호, 지운을 떠올렸다. 실소가 절로 새어 나왔다.
「담력체험도 아니고…….」
장전을 끝마치고서 다시 반대쪽으로 돌 생각이었다. 낙조와 해화를 마주하기 전까진 긴장을 풀기 어려웠다. 둘이 아니라면 세성이라도 만나야 했다. 누구도 더 이상 이곳에 남겨둘 수 없었다.
곳곳 기둥이나 문 뒤에 몸을 숨겨가며 움직이던 차였다. 반대쪽에서 누군가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까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숨을 죽이고 그림자가 지나치길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어쩐지 걷는 모양새부터 시원찮던 사람은 익숙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흠이 문틈으로 그를 앉은 채 올려다보았다.
“데려와라…….”
멍하니 넋이 빠진 듯한 수호의 얼굴이 눈앞에 들어온 순간, 무흠은 생각할 시간도 없이 문을 열었다. 큰소리가 났지만 수호는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하며 힘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무흠이 최대한 작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손목을 붙잡자, 수호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무흠을 바라보았다.
“고낙조…….”
“너, 여기서 뭐 해.”
“고낙조 씨, 어디 있어요?”
수호의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어딘가 기분 나쁜 낌새가 흘러나왔다. 무흠은 아무 말 없이 수호를 붙잡은 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은 분명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와는 달리, 그의 시선은 또렷했다. 무흠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숨었던 방으로 수호를 끌고 들어오려 했다. 그러자 수호가 온몸에 힘을 주며 버티면서 말했다.
“고낙조 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
“이따가 해.”
무흠은 수호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힘으로 무흠을 이길 수 없었기에 수호는 안으로 질질 끌려갔다. 무흠은 완전히 방문을 닫고서 불을 켰다. 수호는 얼굴을 힘껏 찌푸린 채 무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팔을 놔주지 않으면 소리라도 지르겠다는 듯, 눈매에 번진 분노가 선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디 있다가 왔어.”
대화가 통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흠은 물었다. 어떤 대답이라도 들어야 목적지를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호는 입을 꾹 닫은 채 무흠을 노려보기만 했다. 저절로 수호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점점 고통이 거세지자, 수호는 몸부림을 치면서 대답을 토해냈다.
“삼스……, 삼승, 아아, 아파요!”
“삼승? 삼승을 만났어?”
“아파, 아파요. 아 좀 진짜!”
수호는 큰소리로 외치며 반대쪽 손으로 무흠을 밀쳤다. 꿈쩍도 하지 않은 무흠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가 그대로 수호의 멱살을 쥐어 벽으로 밀쳤다. 목이 졸리는 느낌에 수호가 컥컥거리며 무흠의 팔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숨통이 막히는 공포는 수호를 무력화시켰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던 수호의 고개가 옆으로 꺾이며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무흠은 수호를 바닥에 눕히고서 맥을 짚었다. 조금 빨리 뛰긴 했으나 맥박엔 이상이 없었다.
“씨발…….”
무흠은 바닥에 주저앉아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무리 보아도 부모가 자신이 어릴 적 썼던 독초에 중독된 모습과 같았다. 지속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만, 명령을 스스로 거부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길 때까지가 어려웠다. 기절은 시켰지만 다시 눈을 뜰 때까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갑갑해졌다.
무흠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내며 입술이 찢어져라 물었다. 입술 새로 붉은 피가 고였다. 밖은 여전히 조용했으나, 이 고요한 침묵을 삼승이 이끌고 돌아다니는 듯한 기분에 오한이 들었다. 무흠은 닫힌 문을 노려보며 총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