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186화 (186/202)

186화. 머리를 짓밟고 심장을 깨물어라 (2)

이상할 정도로 내부는 조용했다. 갇힌 곳에서 벗어난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잔뜩 움츠리고 있던 낙조와 해화는 묘한 기류 속에서 걸음을 멈췄다.

“너무 조용한 것 같은데.”

“길을 잘못 들었나.”

“……다들 나간 건 아닐 거 아냐.”

해화가 걱정이 가득 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낙조 또한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아주 깊은 곳에 가두어 둔 건지, 한 길로만 나왔음에도 기억하고 있는 복도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혹시 나뉜 길은 없는지 재차 주변을 확인했다.

‘세성님이라면 어디에 계실까…….’

감시하는 눈길을 피해 깊은 곳까지 왔다가, 금세 사라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을 줄 알았다. 낙조는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생각에 빠졌다. 바삐 움직였던 서천의 병사들이 모조리 위로 올라가진 않았을 테지만, 지금까지 서천 내부인과 마주치지 못한 걸 다행이라고 여길 수 없었다.

“간부들 방을 먼저 찾는 게 낫겠어.”

“세성님이 대놓고 그곳에 계실까.”

“적어도 위로 올라가진 않으셨을걸.”

낙조는 확신에 찬 대답을 내놓고서 조금 더 걸음을 재촉했다. 해화는 괜히 이름 모를 시선이 달라붙는 기분에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낙조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에 갇힌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불길한 마음을 전해봤자 바뀔 건 없었기에 일부러 혀끝을 가볍게 깨물어 말을 참았다.

아직도 켈리의 피 냄새가 자신의 몸에서 풍겨 올라오는 듯했다. 마지막에 보았던 켈리의 눈동자가 선명히 떠올랐다. 빛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순간, 초점을 잃고 탁해지는 파란 눈동자. 곡소리가 울려 퍼지던 장례식장에서 오래 일했으나 항상 덮인 눈만 보았기에 숨이 꺼지는 찰나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담담하게 그 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녀가 정말 마지막까지 다다라 삶을 끝냈다는 걸 목격해야만 했으니까.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도 자각시켜야 했다.

“이런 곳이……, 있었나?”

문득 낙조의 중얼거림에 해화가 고개를 들었다. 뒤만 쫓아가다 보니 주변을 잘 살피지 못했다.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서 주위를 둘러보니, 해화의 눈에도 낯선 길들이 여러 갈래로 찢겨져 있었다. 항상 일직선이나 두 갈래로 갈라진 복도만 보던 서천에서는 처음 보는 길이었다.

“……꿈꾸는 것 같아.”

“널 혼자 보낼 수도 없고…….”

“없어도 돼.”

“뭘 없어도 돼, 맨손으로 어쩔 건데.”

“일단 뛰어서 너한테 데리고 올게.”

“……그러든가.

낙조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조금은 장난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힘이 조금 빠진 듯한 목소리에 해화는 총 일곱 개로 나뉜 길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길 끝엔 모두 다른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달려 있었다. 복도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으나, 문 너머의 공간조차 추측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건 시간 낭비와 마찬가지였다. 해화는 담담하게 서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작은 목소리를 내뱉으며 왼손을 뻗어 네 번째 길을 가리켰다. 낙조는 해화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다른 길과 딱히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복도였다. 해화는 그곳을 말없이 가리키다가 낙조의 오른손을 돌아보았다.

“릴리한테 물어봐.”

“어떻게.”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해화의 말에 낙조는 입을 다물고 해화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정쩡하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허공에 잠시 띄워둔 채 손끝이 절로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릴리,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느껴져?”

“나보고 알아서 하라며.”

“조용히 해 쫌.”

낙조의 손에 대고 말을 거는 해화에게 궁시렁거리자 곧장 구박이 돌아왔다. 투정 섞인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는 동안, 해화는 귀를 기울이듯 진지하게 표정을 굳힌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허리를 펴고서 말했다.

“네 번째 문 맞대. 그리고……, 엄청 큰 나무가 보인대.”

“지하에 나무가 어떻게 있어.”

“애 눈으로 본 거니까 그렇게 얘기한 거겠지. 일단 가자.”

해화는 낙조를 팔꿈치로 툭 건들고서 앞장서 걸어 나갔다. 낙조는 여전히 자신에게는 무덤덤한 오른손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곤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문 앞까지 도착했을 때, 먼저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나 소리를 죽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멀리서나마 바삐 움직이는 발소리들이 엉켜 들려왔다. 낙조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문을 살짝 열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곳은 지금까지 봤던 서천의 내부보다 조금 더 가라앉은 느낌이 가득했다.

‘병사들이 쓰는 곳인가.’

그럼 자신들이 사용하던 공간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거지. 낙조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을 품은 채 몸을 숙였다. 서천의 내부는 개미굴과 비슷했다. 하지만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문이 하나밖에 없다는 점이 달랐다.

‘문이……, 또 있을 수도 있잖아.’

순간 낙조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낙조는 오른손을 들어 천천히 벽에 가져다 댔다. 그리곤 온 감각을 모두 곤두세워 오른손 손끝으로 몰아 보냈다.

*

“반은 밖으로 나갔어.”

“왜.”

“밖에서 누가 불장난을 좀 했더라고.”

“말 안 해도 알겠네.”

“아마 제일 귀찮은 놈들만 안에 있을 거야.”

“그건 걱정 안 해. 은거지를 못 찾을까 봐 걱정인 거지.”

귀도는 세성의 설명에도 무심하게 대답하면서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소리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귀도와 겨우 발을 맞추며, 세성은 기억하고 있는 서천의 모든 길을 떠올려보았다. 삼승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둔 방은 적어도 일곱 개. 그곳에서 삼승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한 방은 자신조차 어디인지 모른다.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얽히고설킨 길을 단번에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몰려들었다.

“잠깐.”

빠르게 걸어가던 귀도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시선의 끝엔 바닥을 흠뻑 적신 핏자국이 있었다. 세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귀도는 천천히 문밖까지 빠져나온 핏자국을 향해 다가갔다. 이내 방 안까지 들어간 귀도는 작게 헛웃음을 쳤다.

“내가 한발 늦었네.”

“알았으면 빨리 움직이지.”

“장승은?”

“장승 걱정은 나중에 하지 그래.”

“길 안내나 제대로 해.”

“귀도.”

“왜.”

“삼승을 죽일 건가?”

흥미로운 듯 웃음을 짓고 있던 귀도의 얼굴이 세성의 질문을 듣고 단숨에 굳었다. 예측한 반응이었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귀도는 말없이 방을 둘러보다가 켈리의 시신을 돌아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빛 한 줄기 들지 않은 시선으로 서랍을 모두 뒤지다가 짧은 칼 하나를 꺼낸 후 일어났다.

“고낙조의 마지막 계획이 그거야?”

“고낙조의 계획엔 없는 얘기야.”

“그런데 왜 물어보는 거지?”

“그럴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세성은 먼저 방을 나와 아마 낙조가 향했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뒤따라 귀도가 칼을 쥔 채 방을 나왔다. 그녀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웃는 소리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그렇지, 아무리 죽이고 싶어도 삼승의 피가 멈추면 안 되니까.”

귀도는 곧 칼날을 위로 치켜세우고 다시 걸어 나갔다. 길을 찾는 건 서천의 깊은 내부까지 꿰뚫고 있는 둘에겐 손바닥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쉬웠다. 다만 은거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하나씩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세성은 품 안에 든 약병을 꺼내 매만져보았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일곱 개의 길로 나뉜 곳에 도착했다. 귀도는 단도직입적으로 세성에게 물었다.

“자……. 아닐 것 같은 길부터 말해봐.”

“첫 번째와 두 번째 은거지는 자주 가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 일곱 번째 은거지는 간부들도 알음알음 아는 곳이기도 해서 아닐 것 같아.”

“그럼 셋, 넷, 다섯, 여섯. 후보가 네 개나 있네.”

“중요한 건 그 남은 은거지의 위치도 확실하지 않다는 거다. 살살이풀, 숨살이풀, 피살이풀을 한곳에 모아 기르지 않으니까.”

“…….”

귀도는 가만히 남은 네 개의 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각각 흩어져 있는 풀을, 삼승은 어떻게 관리했을까.

삼승의 피를 먹는 풀들의 방은 삼승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직접 꺾어온 풀들을 간부들이 모아 작은 창고에 보관하곤 했다. 한곳에 모아서 기르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뺏기고 싶지 않은 풀은 무엇일까. 귀도는 삼승의 입장에 서서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귀도의 창백한 얼굴을 덮었다.

정적이 안개처럼 깔리는 사이,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던 귀도의 눈이 번득였다. 그녀는 곁에 있던 세성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기곤 손에 쥐고 있는 칼을 위로 치켜들었다. 강한 힘에 빨려 들어가듯 붙잡힌 세성은 귀도의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뜨자, 흰 천장과 벽이 빨갛게 물들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드러났다. 귀도가 칼로 난도질을 한 이는 간부는 아니었으나, 병사들을 통솔하는 이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은 몸에 몇 번 더 칼자국을 새기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하얀 얼굴에 튄 피를 대충 닦아내고서, 귀도는 세성에게 말했다.

“손 참 많이 가네. 조금 귀찮게.”

“……고맙다는 말도 하기 싫게 만드는군.”

“누가 해 달랬어?”

귀도는 퉁명스럽게 말을 받아치고서 몸을 움직였다. 뒤쪽에서 따라온 걸 보니, 낙조와 해화의 탈출도 확인했을 터였다. 소식은 이미 군데군데 퍼져 있겠지. 세성은 잠시 내려놓았던 긴장을 꽉 붙들고 문들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둘은 어느 병사의 비명이 터진 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여기까지 들어와서 괜한 고생을 하는구나.”

삼승은 수호를 향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수호는 바짝 독이 오른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었다. 심지어 호흡도 더없이 가빠져 숨통이 막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총을 들고 있는 팔도 아려오고 있었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쉼 없이 상대를 압도하는 삼승의 존재에, 수호의 머릿속에 떠다니던 모든 생각이 멈췄다. 어쩌면 그녀에게 모두 빼앗긴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수호의 계획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굴고 있었으니까.

“뭐가 중요해서 이런 고생을 하니.”

“…….”

“청주는 곧 무너질 거다. 날이 더 따뜻해지면 육지에 남은 변종들이 꽃을 피울 거거든. 청주는 그 모든 변종들의 힘을 막지 못해. 청주가 무너지면, 주변에 있는 대피소들도 하나둘씩 사그라들겠지. 작은 불이 꺼지는 것처럼…….”

수호는 왼쪽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냈다. 땀이 흘러 들어와 눈이 따가웠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이 턱을 타고 계속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삼승은 곧 기계에서 손을 빼냈다. 작은 바늘 자국이 손등과 손바닥을 가득 채운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수호에게 보란 듯 자신의 손을 보여주며 말했다.

“내 피만 먹고 자란 아이들이 과연 너희 말을 따를까?”

“……그게, 무슨…….”

“나뭇가지도, 뿌리도 자신의 적을 구분하고 공격하는 걸 보지 않았나? 풀들도 마찬가지야. 게다가 내 피만 먹으며 자란 아이들이……, 나를 공격하는 걸 가만히 두고 보겠냔 말이야.”

“저 풀들도……, 이미 변이됐다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변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똑똑하다는 거지. 그런 식으로 진화하는 거야. 적을 알고, 아군을 알아채고, 공격하고, 쟁취하고. 결국 살아남은 것이 표본과 역사가 된다. 살아남지 못하면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아.”

삼승은 바늘에 찔린 손을 뒤로 감추며 수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수호는 도망갈 곳도 없이 총만 쥔 채 몸을 덜덜 떨었다. 천장에서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여우비처럼 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람에 실린 물방울은 모두 수호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미 땀과 눈물에 젖은 수호는 자신의 코와 입, 귓구멍으로 들어와 몸 안을 적시는 물도 눈치채지 못했다.

총을 쥐고 있던 수호의 팔이 서서히 내려갔다. 삼승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털컥. 곧 수호의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조금 전만 해도 달달 떨며 삼승을 응시하던 수호의 눈동자가 탁하게 물들었다. 속을 보지 못할 정도로 묽어진 눈동자를 보고 나서야 삼승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금수호.”

“……예.”

“부모님을 구해야지. 구해서 함께 살고 싶지 않나?”

“……구해야 합니다. 저만 도망쳤어요, 비겁하게.”

“널 이곳까지 끌고 온 게 누구겠어.”

“……고낙조, 고낙조가…….”

“맞다. 가서 고낙조를 데리고 와. 그러면 곧장 너희 부모님을 내가 안전한 곳으로 모셔다 드릴 테니.”

삼승은 다정한 목소리로 수호에게 속삭였다.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수호는 삼승의 지시를 받고서 다시 눈을 깜박였다. 초점이 선명하게 잡힌 눈동자는 평소 수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수호는 아무 말도 없이 총을 다시 쥐고, 땀을 닦아낸 후 삼승에게서 뒤돌아 방을 나갔다. 삼승은 바늘 자국 위로 서서히 새살이 돋는 걸 내려다보았다.

삼승이 서 있는 방의 유리관 안엔, 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수호가 보았던 풀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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