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185화 (185/202)

185화. 머리를 짓밟고 심장을 깨물어라 (1)

병사들은 개미처럼 몰려들었다. 다행인 점은, 벌떼처럼 나오진 않는다는 거였다. 수풀에 숨은 밤이는 병사의 머리가 빼꼼 보이기만 해도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속수무책으로 앞쪽의 병사들이 쓰러지면, 뒤따라 나오던 병사들은 금세 당황하며 주변을 훑는다. 수호와 지운이 뒤쪽에서 그들을 차례대로 제거하면 한 무리를 완전히 소탕하게 된다.

문제는 남은 탄환의 개수였다. 얼마 남지 않은 탄환 수에 비해, 병사들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왔다. 불은 조금 사그라들었으나 안으로 투입할 틈이 보이지 않았다. 밤이는 작게 욕을 읊조리면서 무전기를 쥐었다.

“후, 후. 야, 이번에 끝나고 한 텀 쉴 때 금수호 씨가 안으로 들어가.”

-제가요?

“얼마나 더 몰려들지 모르는데, 길 아는 사람이 들어가야지.”

밤이는 인중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꽤 오래 엎드려 있느라 온몸이 뻐근했다. 수호는 고민하는 듯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결의를 다진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괜찮겠어요?”

곁에서 남은 탄환을 세던 지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호는 몸을 낮추고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야죠.”

숨을 죽이고 있던 수호는 밤이가 살짝 손을 들어 앞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내자, 황급히 몸을 숙인 채 입구를 향해 뛰어들었다. 아직 불에 휩싸인 곳을 피하느라 조금 더뎌지긴 했지만 다행히 병사들과 마주치진 않았다. 서둘러 안으로 내려가 열려 있는 방안에 몸을 숨긴 수호는 다시 위로 올라가는 듯한 병사들의 발소리를 듣고 있다가 고개를 밖으로 내뺐다. 안에 있던 병사들 대부분이 나간 듯 보였다. 인기척 하나 없는 복도로 몸을 내밀고서 자신이 아는 길을 향해 달렸다.

‘빠져나갈 구멍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깊게 들어가는 곳이 되겠네.’

조금은 신세 한탄일 수 있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수호는 총을 바짝 쥐고서 걸음을 내디뎠다.

‘지름길이라곤 했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돌아가는 게 맞겠지.’

텅 빈 방에 몸을 옮기면서 수호는 계획을 비틀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알아낸 길이라고 해서 이곳 사람들이 그 길을 모를 리 없다. 이런 비상사태에선 그런 지름길을 그들이 먼저 선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겁도 없이 길에 뛰어들었다가 아무런 수확 없이 붙잡히는 것보다야 안전을 선택하는 게 맞았다. 수호는 가쁜 호흡을 정리하며 천천히 서천의 깊숙한 곳으로 발을 움직였다.

*

켈리의 피는 방안의 바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녀의 피로 축축하게 젖은 발끝과 바지 밑단이 거슬렸다. 낙조는 간간이 몸을 꿀렁거리는 켈리를 내려다보다가 자신의 오른팔을 들여다보았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켈리를 찔렀던 손은 다시 온전한 형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켈리의 혼을 꺼내 보낸 해화가 막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 낙조는 그녀를 불러 물었다.

“릴리, 계속 느껴져?”

“…….”

낙조의 질문에 가만히 그의 팔을 응시하던 해화는 고개를 들어 낙조에게 말했다.

“아직 여기 있어.”

“어쩐지.”

“삼승이 남았으니까.”

“…….”

“왜?”

“계획대로라면, 삼승은 죽이면 안 돼.”

낙조는 복잡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해화는 천천히 죽어가는 켈리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삼승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거야?”

“그렇다기보다……, 나에 대해, 그러니까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내가 대응하기 쉽지 않은 거지.”

“어떤 식인데?”

“켈리를 막 깨웠을 때……, 삼승의 마음을 읽으려고 집중하니까 오히려 나한테 말을 걸더라고. 내가 마음속을 읽으려는 걸 알아챈 거지. 그리고 내게 직접 말도 전했으니까……. 나를 제어할 방법을 알고 있는 거야. 움직이지 못하도록.”

“그것 때문에 삼승을 못 죽이는 건 아니잖아.”

“……살살이풀 같은 귀한 풀은 삼승의 피로만 재배할 수 있어. 삼승을 죽이면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미 살아 있는 풀조차 다 죽을 수도 있어.”

낙조의 말에 해화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얼마 남지 않은 듯, 켈리의 눈동자에선 서서히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빛조차 들지 않는 눈동자. 해화는 장례식에서 수없이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의 곡소리를 떠올렸다. 결국 당신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가는구나. 모든 걸 억압한 죗값은 이렇구나.

“저승에는 당장 못 갈 거야.”

“켈리?”

“응. 릴리가 잡아두고 있어서.”

“……릴리는 삼승을 꼭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직은 모르지. 근데 지금은 네 몸이랑 붙어 있잖아. 네가 물어봐.”

“나 낯가려서 그래.”

해화는 낙조를 가볍게 흘기고서 뒤를 돌았다. 복도까지 퍼진 켈리의 피는 발을 뗄 때마다 밑창에 달라붙을 만큼 꾸덕거렸다. 늪을 서서히 파헤치고 나오듯 방을 벗어나자 한숨이 흩어져 나왔다. 낙조는 마지막으로 온몸에 구멍이 뚫린 켈리를 돌아보았다. 퍼석거려 보일 정도로 건조한 파란 눈동자는 먹구름에 먹힌 것처럼 탁했다.

“신발 벗어.”

“나도 그 생각했거든?”

“쉿.”

“……짜증나.”

“아까 미안하다고 울던 사람 어디 갔냐?”

“닥쳐 좀.”

낙조는 해화와 속살거리며 짧은 대화를 끝마치고서 신발을 벗었다. 켈리의 핏자국이 낭자한 신발로 돌아다니는 건 자신들의 위치를 속속들이 다 밝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다행히 켈리의 피는 농도가 짙어 뚝뚝 흐르진 않았다. 대충 벽에 신발을 문지른 후 깨끗한 복도 위를 밟았다. 조금 빨리 걸어도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가?”

“세성님.”

“……귀도에게 갈 줄 알았는데.”

해화는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고서 낙조의 뒤를 따랐다. 간부들의 방은 그리 멀지 않았다. 더 이상 따뜻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서천의 내부를 둘러본 낙조는, 음산한 기운이 몰려드는 곳을 향해 발을 뻗었다.

*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용케 왔네.”

“눈치챘으면 빨리 나와. 아마 삼승은 너부터 찾을 것 같으니까.”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네…….”

귀도가 갇힌 방문을 열어주며 세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의 모든 간부가 빠져나간 듯 소리가 암전된 것처럼 고요했다. 귀도는 하루 사이 더 야윈 얼굴로 방을 나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정리한 그녀는 느리게 호흡하면서 세성보다 먼저 몸을 움직였다.

“어디로 가려고.”

“당신이 나한테 온 걸 보니 켈리는 고낙조한테 맡긴 모양인데……, 삼승이 갈만 한 곳을 찾아야지.”

“삼승이 만들어둔 은거지가 한두 개여야지.”

“그 엄청나게 많은 방을 만들어준 데에 당신도 한몫했잖아?”

“…….”

갇혀 있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귀도가 내뱉는 말끝엔 전부 가시가 박혀 있었다. 악의적으로 누군가를 해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어느 곳으로 휘두르든 그 가시에 찔릴까 싶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세성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서 귀도가 가는 방향을 향해 함께 걸었다. 품에 넣어둔 약병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삼승을 잠재워야 한다. 세성의 머릿속엔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허억, 허억…….”

서천의 굴이 이렇게 깊을 줄은 몰랐다. 수호는 목표 지점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빨리 뛰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주위를 살폈다. 모든 병사가 빠져나간 건 아닌지, 주위를 돌아다니는 이들이 종종 보였다.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다는 건 자리를 비울 만큼 중요한 게 있다는 거겠지.’

이미 생각은 모든 정답을 찾아냈지만 막상 몸으로 움직이려니 쉽지 않았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걸 몇 번이고 닦아냈다. 수호는 창고 비슷한 방에 몸을 숨긴 채 숨을 길게 내쉬면서 조금 열어둔 문틈으로 그림자 하나가 지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 앞까지만 가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잔뜩 긴장한 탓인지 총을 쥐고 있는 손이 달달 떨렸다. 조준은커녕 방아쇠조차 당길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다. 차라리 방망이 같은 거라도 들고올걸, 이라고 생각하면서 수호는 주변이 조용해지길 기다렸다.

몸을 숙인 채 대각선으로 이어진 기둥 쪽에 다가가던 중이었다. 모든 곳이 흰색이었기에 그림자조차 들키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림자가 길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빛 아래로 몸을 움직였다. 문 앞엔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둘이 서 있었다. 분명 무장을 했을 거란 수호의 생각과는 달리, 그들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다.

‘바깥 상황을 모르나?’

아니면 이곳까지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거나. 수호의 목 뒤에 맺힌 식은땀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문을 지키고 있는 남자들의 무전기는 잠잠했다. 둘은 조금 풀어진 자세로 제자리를 돌거나 건너편 복도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엄마 말 듣고 태권도 검은띠는 따놨어야 하는 건데.’

괜한 핑계를 생각하면서 수호는 달려들 틈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둘을 한 번에 제압할 수는 없을 거란 생각에 몸이 멈칫거렸다. 총을 쏜다면 소리를 듣고 근처에 있는 병사들이 몰려올 수 있다. 복잡한 생각이 서로 얽히고설켜 수호를 괴롭게 할 때였다. 분명 잠잠하기만 했던 복도에서 낮은 굽의 구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호는 사각지대에 몸을 틀어박고서 입으로 손을 꾹 닫았다.

“삼승님.”

“이곳엔 내가 있을 테니 너희도 밖으로 나가보렴. 불이 생각보다 꽤 크게 번진 모양이야. 간부들에겐 다른 풀들을 미리 챙겨두라 일렀으니 밖으로 나갈 길을 미리 확보하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보니 삼승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말에 병사 둘은 품에서 권총을 꺼내더니 재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걍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뒤질 뻔했네…….’

수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숨을 소리 없이 길게 내쉬었다. 삼승은 병사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가만히 문 앞에 서 있다가, 보안 패드에 손바닥을 올렸다. 삼승의 신원을 인식한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고, 수호는 문이 닫히기 직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총구를 겨눴다.

“움직이지 마!”

수호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삼승은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 수호와 마주 보았다. 그녀는 수호를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더니 완전히 몸을 돌려 세웠다. 수호의 등 뒤로 문이 서서히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운이 좋은 아이구나. 운이 좋은 녀석들은 귀찮기도 하지만.”

“다가오면 쏠 거야!”

“쏴도 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잖니?”

삼승은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자신을 정확하게 겨누고 있는 총구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 오히려 수호가 몸을 움츠렸다. 겁을 먹고 있는 쪽은 수호였다. 삼승은 시선을 올려 다시 수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아주 천천히, 수호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녀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총구가 흔들렸다. 수호는 삼승이 다가오는 속도에 맞추어 뒷걸음질 쳤다. 등 뒤에 차가운 문이 닿았을 때, 그는 삼승의 여유 가득한 표정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너, 이곳이 어딘지는 알고 온 거니?”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풀이 있는 곳.”

“그 정도로 알고 왔구나.”

삼승은 수호를 당장 위협한다거나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무런 의도 없이 묻는 말에 수호는 총구를 놓치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몇 번 끄덕거리더니 다시 뒤를 돌아 방 안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 삼승은 종종 뒤를 돌아 수호에게 손짓했다.

그저 몸을 대피하는 좁은 방인 줄 알았던 곳엔, 작은 문 하나가 더 딸려 있었다. 수호는 삼승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꽉 막힌 숨을 어디에 내뱉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삼승은 천천히 작은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좁은 복도가 길게 나 있었다. 정말 치밀하게 짜놓은 땅굴처럼.

“이곳까지 온 보람이 있어야지. 특별히 보여주는 거니 잘 봐.”

“…….”

“혹시 모르잖니. 네가 마음을 바꿀지도. 누가 더 의로운 일을 하는 건지 잘 생각해.”

삼승은 복도를 걸어가며 말했다. 당장 등에 총알이 박혀도 그녀는 멀쩡하게 다시 일어날 것 같았다.

복도 끝에 이어진 곳은 원형의 방이었다. 방의 천장은 건물 2층 높이만큼 높았다. 벽은 전부 유리로 막혀 있었는데, 유리 안엔 처음 보는 모양의 이파리를 가진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수호는 그것들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서천에서만 난다는 풀들. 저것들이구나.

삼승은 수호가 풀에 시선을 두고 있을 때 천천히 유리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그녀의 온도를 인식한 시스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바닥이 반으로 열리더니 손 하나를 넣을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있는 기계가 올라섰다. 삼승은 그곳에 자신의 오른손을 넣고서 수호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뚝, 뚝, 후두두두둑…….

자연광처럼 만들어진 인공 햇빛을 받고 있던 풀들 위로 빨간 피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수호는 삼승의 피를 맞자마자 기지개를 피듯 이파리를 살랑거리는 풀들을 보면서 숨을 다급하게 삼켰다. 엄청난 위압감이 온몸을 내리눌렀다. 삼승은 수호와 눈을 마주친 채 씨익 웃었다.

“내 손 안에 스스로 기어들어 온 걸 환영한다,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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