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릴리 (3)
1994년 1월 1일.
내가 일곱 살이 된 해다.
고낙조의 몸에 붙어 있으면서 고낙조가 아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됐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고낙조가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감정을 서로에게 나눠주었다. 고낙조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 내가 보여주는 것들은 지난 세월 동안 내 피가 어디를 거쳐 고낙조에게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다. 고낙조가 아는 단어들을 빌려 이걸 설명할 것이다.
이제 이름을 알았으니 저 여자를 켈리라고 부르겠다.
켈리와 처음 만난 것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아주 어렸을 때였다. 겨울이었다. 나는 한 번도 보지 않아서 몰랐지만, ‘눈’이란 게 내린다는 계절이라고, 보모는 말해주었다. 고낙조의 팔에 붙고 나서야 보게 된 눈은 보모가 말해준 것보다 그리 예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작았고 빨리 녹았다. 모양을 보고 싶었으나 고낙조는 눈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켈리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생각은……, 자헌 박사보다 무섭게 생긴 사람이 왔다는 거였다. 자헌 박사는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기르는 식물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 정도는 알았다. 켈리는 자헌 박사와 친해 보였다. 그렇다는 건, 켈리도 나를 식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켈리가 온 후 보모에게 유독 매달려 지냈다. 보모는 그곳에서 나를 유일하게 좋아해 주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내 손으로 내쫓았다. 자헌 박사는 보모를 나보다 더욱 싫어했던 것 같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오래 붙어 있거나, 보모가 나에게 새로운 단어를 알려줄 때마다 화를 내곤 했으니까.
자헌 박사는 내가 똑똑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몸의 모든 힘과 신체기관의 능력을 최고로 만들어놓고서 멍청하기를 바랐다. 나는 학습 능력이 좋았고 보모가 가르쳐주는 것 이상의 단어들을 깨우쳤다. 일부러 말을 하지 않은 건 자헌 박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보모가 끌려가고 난 후 모든 걸 얘기해버릴까 하다가, 이들의 손에 잡혀 나처럼 고통받을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지 않도록 입을 닫았다.
켈리는 자헌 박사와 항상 함께 다녔다. 처음엔 그 둘이 꽤 친한 사이인 줄로만 알았다. 자헌 박사 옆을 쫓아다니는 켈리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켈리는 항상 옆구리에 노트를 끼고 다녔다. 그리고 자헌 박사의 말을 틈틈이 받아 적었다. 가끔은 자헌 박사가 흥미로운 눈길로 켈리를 바라볼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켈리는 목소리를 아주 낮춰서,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자헌 박사에게 어떤 말을 전했다. 그때까진 의심이 가지 않았다. 죽고 나서야 그들이 무슨 작당을 꾸미고 있는지 알았다.
내가 죽고 나서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어느 순간 기억이 끊겼는데, 눈을 떠보니 나는 내 피로 가득 찬 통에 갇혀 있었다. 아무리 통을 두드리고 소리쳐 봐도 뚜껑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손이 통을 통과하면서 몸이 밖으로 내던져졌다. 꽤 높은 곳에서 떨어졌지만 그리 아프진 않았다. 내가 떨어진 곳은 항상 자헌 박사의 손에 이끌려 갔던 수술실이었다. 마지막에 보았던 초록색과 빨간색 풍선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그들은 수술대를 모두 치우고 그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가 웃고 있었다. 그들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손목에 채워진 핏줄기 때문에 다가갈 수 없었다.
나는 내 피에 붙들린 채로 허공을 떠다녔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곁에서 내내 지켜보았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눈을 한 사람에게 두고 따라다니다 보면 하루가 지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연구실 내의 사람들을 한 명씩 골라 쫓아다녔다. 사람들은 내 존재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보게 된 실험은…….
「얼마나 부풀리시려고요?」
「몇 톤은 돼야 하지 않겠나.」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피가 식기 전까지 그 정도로 부풀리는 건 불가능해요.」
「아니, 할 수 있다. 릴리의 피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하라는 대로 해.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내 피를 복제하는 일이었다. 켈리는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자헌 박사는 완강했다. 그는 직접 실험실을 통제하며 며칠 동안 내 피를 불리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우습게도 자헌 박사가 만든 계산은 척척 맞아 떨어졌다. 나는 순식간에 방 한 칸을 차지하고도 남는 내 피를 볼 수 있었다. 켈리는 연신 감탄하며 자헌 박사를 돌아보았다. 자헌 박사는 투명한 유리관에 갇힌 내 피를 보면서 만질 수 없음에 한탄했다. 그래 봤자 복제된 피였다. 나는 ‘진짜’ 내 피에 묶인 채 움직여야 했다. 자헌 박사 역시 복제와 원본은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내 피는 꽁꽁 얼려서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녔다.
이상한 기류가 느껴진 건 그때부터였다. 켈리가 자헌 박사의 곁을 조금도 쉬지 않고 지키는 게 이상했다. 박사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는 태도보다 보기 껄끄러운 말들을 했다. 굳이 내가 전하지 않아도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켈리에겐 아쉽겠지만 자헌 박사는 켈리에게 그리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관심은 오직 내 피에 쏠려 있었다. 켈리가 아무리 일상적인 말을 건네도 자헌 박사는 그런 켈리에게 할 일이 없냐는 둥 비아냥거렸다. 가끔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켈리에게 떠맡길 때도 있었다. 켈리는 그래도 자헌 박사의 일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기뻐하며 일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아도 켈리는 이상할 정도로 자헌 박사에게 헌신했다.
자헌 박사의 일을 대신 하게 되면서, 켈리는 다른 연구원들보다 일에 능숙해졌다. 프로젝트를 생각해낼 때도 켈리의 제안이 가장 좋다고들 했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복제된 내 피에 딱 맞는 식물을 찾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자헌 박사가 내 몸에 피웠던 식물은 식충 식물이었다. 보모에게 듣기론 나보다 앞서 수술을 받았던 아이들은 모두 실패한 식물이라고 했다. 그래서였는지, 자헌 박사는 그 누구보다 기뻐하며 나를 칭찬했다.
왜 하필 식충 식물일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으나 여전히 벙어리 흉내를 내야 했기 때문에 묻지 못했다.
켈리를 비롯한 연구원들은 내 피를 거름과 양분 삼아 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식물을 먼저 개조하기 시작했다. 물과 영양분을 피로 착각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햇빛과 바람, 온도가 모두 완벽하게 맞춰진 곳에서 식물에게 최면을 걸듯, 처음엔 물에 피를 아주 조금 섞어 흘려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피의 농도는 짙어졌고, 갈증이 심해진 식물은 피 맛을 끝까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켈리의 예측이 완전히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자헌 박사는 처음으로 켈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켈리는 정말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켈리가 환하게 웃으며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죽고 난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살아 있을 때도 켈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그런 모습을 마주하니 소리를 꽥 지르고 싶을 정도로 치가 떨렸다.
그 뒤부터 나는 켈리만 쫓아다녔다. 특히 켈리가 아무것도 못하는 밤이 되면, 그녀의 몸 위로 올라가 그녀를 짓밟고 뛰었다. 그래봤자 켈리에게 해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뒤척이거나 잠을 푹 못 자는 정도였다. 날이 갈수록 나는 켈리를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유리를 깨뜨리기도 하고, 가끔은 악을 지르듯 몸에 힘을 주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켈리는 나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이후부터 허겁지겁 약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무슨 약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로 켈리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내가 그 어떤 미친 짓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켈리를 괴롭힐 수 없다는 사실에 내 속엔 철저하게 뒤틀린 욕망이 뒤섞여 자라나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켈리와 나눈 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자헌 박사를 항상 그녀가 졸졸 쫓아다녔기에, 자헌 박사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 이상 켈리는 나를 따로 만나려 하지는 않았다.
자헌 박사를 향한 켈리의 과한 충성심이 어긋나기 시작한 건 켈리가 주도한 첫 실험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자헌 박사는 실험이 성공한 이유가 내 피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켈리의 얼굴은 정말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자헌 박사는 조금이라도 진실 된 마음으로 켈리를 칭찬한 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내 피에 쏠려 있었고, 켈리는 그때가 돼서야 그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자헌 박사가 자신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내 피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을 때, 켈리가 찾아왔다. 그녀는 두 번째 실험을 위한 것이라며 내 ‘진짜’ 피를 조금이나마 받고 싶다고 말했다. 자헌 박사는 복제된 피도 훌륭하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켈리는 물러서지 않고 ‘진짜’ 내 피를 받아야 실험도 빨리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며, 한 사람이 복용할 수 있는 양만 달라고 애걸복걸했다. 자헌 박사는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아주 작은 약병에 내 피를 붓곤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켈리는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자헌 박사의 연구실과 켈리의 연구실은 그리 멀지 않았기에 나는 팽팽한 핏줄기를 끌어당겨 그녀의 연구실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켈리는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내 피를 꺼내곤 미리 준비해둔 액체에 조금씩 피를 넣었다. 일정하게 섞인 피와 액체는 시간이 지나자 점점 끈적해졌고, 켈리는 그것을 잠시 냉동고에 넣어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다시 그것을 꺼냈을 때, 그것들은 보모가 가끔 내게 몰래 주던 젤리처럼 작아져 있었다. 켈리는 그것을 씹지도 않고 삼키고서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쯤 되면 알 수 있다. 자헌 박사는 켈리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 켈리는 자헌 박사의 인정과 사랑이 고팠다는 것. 그리고 켈리는 자헌 박사가 몰두해있던 내 피가 아니라 ‘나’를 질투했다는 것.
켈리는 상상 이상으로 미친 여자였다. 미쳤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내 피가 섞인 약을 며칠 동안 복용한 켈리는 밤에 다짜고짜 자헌 박사의 연구실로 쳐들어갔다. 여전히 내 피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던 자헌 박사에게, 그녀는 자신의 몸에도 식물이 나기 시작했다는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헌 박사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켈리는 소매를 걷어 억지로 몸에 욱여넣은 듯한 씨앗을 보여주었다. 피부를 금방이라도 뚫고 나올 것 같은 씨앗과, 겨우 꿰맨 자국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자헌 박사의 기분을 망가뜨리기 충분했다. 그는 당장 돌아가서 씨앗을 빼내라며 호통쳤다. 켈리는 멍한 얼굴로 자헌 박사를 바라보다가 외쳤다.
「죽었잖아요! 피도 다 만들었는데, 왜 혼자서만 과거에 멈춘 실험을 하고 계세요?」
「완벽한 복제에 성공했지만 릴리의 피가 다른 형태로 바뀔까 봐 매일 살펴봐야 해. 내가 이런 것까지 설명해줘야 하나?」
「제가 이끄는 실험에는 관심도 없으시잖아요. 복제에 성공한 이후, 우리가 같이 이루기로 한 목표는 대체 언제 이루시게요?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라고요.」
「그래, 네가 말한 그 목표……, 어떤 환경에서든 숨을 쉴 수 있는 호흡기관을 새로 만들자고 한 거 말이지. 말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 도움 될 만한 걸 찾아봐라. 그건 어느 정도 실험이 안정을 되찾으면 해보자고.」
「왜 말이 달라져요?」
「나도 그땐 네 의견에 동의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냐. 릴리의 피는 생각보다 엄청나. 우리가 상상 이상의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이 뒤바뀌는 속도보다 빨리 인간의 진화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나는 당신 때문에……!」
「켈리, 진정해.」
나는 곁에서 둘의 말다툼을 지켜보았다. 흥미가 생겼다. 어디도 가지 않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함께 붙들린 나도 도망칠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자헌 박사의 뒤에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켈리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으니까 상관없었다. 곧 켈리가 자헌 박사에게 달려들었고, 뒷걸음질 치던 자헌 박사는 켈리가 밀치자마자 창문 아래로 떨어졌다. 쿵,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켈리는 정신을 차린 듯 헉, 하고 눈을 떴다. 그리곤 황급히 방을 나갔다. 나는 굳이 그녀를 뒤따라 나가지 않았다.
자헌 박사가 죽은 이후 내 피는 어딘가로 옮겨졌다. 다른 연구소보다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조곤조곤 말소리가 들려 눈을 떠보니 사방이 하얀색으로 뒤덮인 방이 보였다. 그곳엔 켈리도 있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여자에게 내 피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삼승님밖에 없습니다, 이젠.」
「그래. 잘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평상시보다 다른 느낌이 들어 몸을 움직이려 했을 땐, 핏줄에 손목이 묶였을 때보다 더 강한 압박이 온몸을 조여오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맘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눈을 뜨자, 고낙조의 얼굴이 보였다. 평온하지만 모든 것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던 고낙조의 감정이 나에게 그대로 밀려왔다. 분노, 허탈, 우울, 괴로움, 자책……. 하나 같이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졌고, 나는 그의 불결한 의지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몇 배로 불어난 복수심으로 못 할 건 없다는 생각이었다. 고낙조만큼 불행한 사람이어야 내 피를 머금을 수 있구나, 란 생각도 들었다.
고낙조가 필요했다. 그래서 홍해화에게 동정을 샀다. 그녀에게서 산 동정으로 고낙조를 다시 구했다.
고낙조는 날 이해할 것이다. 몇 달 동안 우리는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며 살았으니까.
고낙조, 이제 이해가 가? 네 힘이 어떤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내가 왜 너에게 되돌아왔는지.
“고낙조?”
해화가 뒤에서 낙조를 불렀다. 낯선 낙조의 말투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해화를 등진 채 켈리에게 다가가던 낙조는 그녀의 턱을 움키고서 뒤를 돌아 해화를 바라보았다.
“나, 다 봤어.”
“뭘, 뭐를?”
“릴리……, 릴리가 보여준 것들.”
“…….”
“삼승과, 이 여자가 시작한 거야.”
낙조는 힘을 주어 켈리의 턱을 위로 잡아 올렸다. 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켈리의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허겁지겁 낙조의 손목을 쥔 켈리가 숨을 헐떡거렸다.
“당신이 직접 고안해낸 실험도 아니었네. 직접 죽인 사람의 말을 훔쳐서 세상을 이 꼴로 만들고.”
“닥, 쳐……, 커억, 켁!”
“릴리의 피를 먹으면 자헌 박사의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너도 참……, 너답다. 끝까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모습, 일관적이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더니, 확신이 들어.”
“……윽, 컥…….”
“하지만 넌 끝까지 실패했어. 네가 지금까지 시도하려고 했던 모든 게 끝날 거야. 내가 직접 그렇게 만들 거고. 너는 죽어가면서 이곳이 무너지는 것만 보면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낙조가 켈리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공기에 켈리가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연신 캑캑거렸다. 낙조는 싸늘한 시선으로 켈리를 내려다보다가 문을 닫고 잠갔다. 해화는 조금 겁에 질린 모습으로 낙조를 주시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 어떤 감정도 서리지 않은 얼굴은 해화에게도 두려움을 주었다. 낙조는 켈리의 주위를 천천히 돌면서 말했다.
“처음 이후로는 진짜 릴리의 피를 구하지 못해서 복제된 피만 먹은 거네. 살살이풀……, 같은 거랑 섞어서. 마약을 만들고.”
“……귀신 씌인 놈이 말이 많네.”
“내가 말하는 거기도 하고, 릴리가 말하기도 해. 그 이후로 한 번도 못 만나봤잖아. 릴리가 당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봤는지 알아?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 당신이 숨기려고 했던 것들도 알아.”
“……저리 가!”
켈리는 소리를 꽥 지르면서 낙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러나 낙조는 걸음만 멈출 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서 켈리를 가만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켈리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상태로 문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반쯤 갔을까, 낙조는 단 세 걸음으로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리곤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 다시 제자리로 끌고 돌아왔다.
“당신도 느껴봐.”
“살려줘……, 살려줘! 내가 다 잘못했어, 릴리, 릴리, 내 말이 들리니? 응?”
“내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아니야, 릴리, 나는 반대했어, 너를 죽이는 데에 반대했다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당신들 얼굴을 기억했는지…….”
“릴리! 릴리, 살려줘, 내가 다, 전부 다 얘기해줄게. 왜 너를―”
켈리의 발악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낙조의 오른손 검지에서 아주 가느다랗고 뾰족한 나뭇가지가 돋아나더니, 곧장 켈리의 왼쪽 어깨를 뚫었다. 삐죽빼죽 구멍이 난 곳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올랐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감싸는 켈리를 일으켜 세운 후, 낙조의 손가락은 켈리의 몸 이곳저곳을 뚫기 시작했다. 얼굴 위쪽은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그저 온몸에 구멍을 뚫을 뿐이었다. 피는 여기저기서 거센 폭포와 같이 쏟아졌고, 흰 바닥은 금세 검붉은 피로 물들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해화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벽 구석에 몸을 완전히 붙였다.
“꺽……, 꺼어억……, 꺽…….”
켈리는 두 손으로 목과 배를 붙잡은 채 헐떡거렸다. 조그마한 구멍으로 피가 질질 새고 있었다. 낙조는 발끝을 적시는 피를 보고서 발을 한 번 털어냈다. 지독한 쇠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낙조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간헐적으로 몸을 펄떡거리는 켈리의 얼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켈리의 새파란 눈동자 주위로 터진 혈관이 번개 모양과 비슷하게 뻗쳐 있었다.
“억울하면 내 얼굴 기억해.”
“꺼억, 헉……, 어어억…….”
“릴리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대. 어서 가. 안 붙잡을 테니까.”
낙조는 속삭이듯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석에 몸을 감추고 있던 해화를 바라보자, 그녀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천천히 낙조에게로 다가왔다. 켈리의 몸속 구석구석에 박힌 썩은 식물과 함께 그녀의 시간을 완전히 끝낼 때가 왔다. 해화는 괴로워하는 켈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