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183화 (183/202)

183화. 릴리 (2)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낙조는 왼손에 잔뜩 힘을 주고서 온 신경을 손끝으로 모았다. 자신이 숨겨둔 생각을 모두 꺼내 보듯이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이윽고 손끝에서 불툭, 하고 튀어나온 나뭇가지와 갈퀴들이 한 번 오그라들었다가 다시 펴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해화는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낙조는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세게 쥐었다. 갈퀴가 덥석 자신의 살점을 움키는 게 느껴졌다. 오히려 굳게 다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감각조차 무뎌져서 뗄 때 그리 아프지 않을 수 있으니까.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하면서, 낙조는 손끝을 바짝 세워 오른팔 위쪽을 쥐었다.

나뭇가지가 마디마디 접히며 자신의 오른팔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왼팔은 오른팔을 공격하는 것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결국은 자신의 의식과 의지가 가장 위에 놓인 것처럼 느껴졌다. 낙조는 속으로 셋을 셌다. 셋이 되기 전에 왼손에 바짝 힘을 주었고, 셋을 세면서 오른팔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벽에 기댄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큽…….”

고통이라고 단순하게 이름 짓기엔 부족했다. 참아야 할 감각이 수도 없이 넘쳐나는 듯했다. 아주 작게 쪼개진 신경들이 하나둘씩 끊겨 나가는 느낌은 해초에 감겨 팔이 잘렸을 때보다 훨씬 끔찍했다. 그땐 자신의 팔이 잘린 줄도 몰랐으니까. 스스로 팔을 쥐고, 신체의 일부를 뜯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두둑, 하고 뼈가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까진 참을 수 있었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갈퀴에 감겨 단단하게 굳은 피부가 뜯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낙조는 아랫입술에서 피가 터지도록 입술을 깨물고 나뭇가지로 오른팔을 꿰뚫었다.

“헉, 허억……, 콜록, 컥.”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느라 새빨개져 있던 얼굴이 결국 기침을 토해냈다. 낙조는 갈퀴를 지나 흐르는 따뜻한 피를 느끼면서 나뭇가지를 더욱 깊게 쑤셔 넣었다. 왼손 손가락에는 따뜻한 피가 감겼고 오른팔에선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동시에 올라왔다. 헛웃음이 나올 새도 없었다. 낙조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버티다 못해 왼쪽으로 쓰러진 낙조를 보고 해화가 울먹이며 그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그때 유리벽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 소음도 없이, 유리는 천장으로 빨려 올라갔다. 해화는 약부터 급하게 챙겼다. 식은땀에 젖어 다급하게 호흡하는 낙조의 곁에 돌아오니, 낙조는 고통에 허덕이면서 꽉 막힌 신음만 내밀 뿐이었다.

“약, 약부터 먹을까”

“……하, 아……, 안 돼.”

낙조는 해화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그는 천에 싸여 있는 오른팔을 보면서 어질거리는 정신을 붙잡았다. 이대로 놓치면 시도는커녕 세성이 준 기회를 자신이 완전히 뭉개버릴 것만 같았다.

“홍, 홍해화.”

“응, 응. 말해.”

“내 손, 잡아.”

“……어”

“잡아당겨 봐.”

“…….”

“하아, 빨리.”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들어갔다. 내뱉고 후회했지만 허겁지겁 차오르는 숨 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낙조는 자신의 왼손에 꿰뚫린 오른손을 해화에게 내밀었다. 움직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금방이라도 핏덩이를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화는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낙조의 오른손을 쥐었다. 낙조는 고개를 들어 해화와 눈을 마주했다. 눈물이 가득 맺힌 눈에는 너무나 또렷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내가 릴리 말을 들어줘서 미안해.

읽으려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귓가에 스며드는 해화의 목소리에 낙조가 멈칫거렸다. 해화는 두 손으로 낙조의 손을 소중히 감싸쥐고서 눈을 감았다. 그제야 해화의 목소리가 끊겼다.

‘홍해화가 나한테 말한 건가.’

낙조는 동그란 정수리를 보면서 설핏 웃었다. 이런 상황에도 웃음이 나오긴 하는구나. 자조적인 웃음이긴 했으나 시간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차려졌다. 낙조는 해화를 향해 숫자를 던졌다. ‘셋’이라는 말이 떨어질 때, 해화는 눈을 질끈 감고 자신 쪽으로 낙조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동시에 낙조도 첨예하게 돋은 나뭇가지의 끄트머리로 살가죽과 모든 혈관을 끊었다.

“읍……!”

세상이 몇 바퀴나 굴렀는지 모른다. 눈앞이 몇 번이고 뒤집혔다. 낙조는 숨을 헐떡거리며 천에 싸여 있던 옛 오른팔을 붙잡았다. 해화는 낙조의 피에 뒤덮인 손을 움직여 그가 위치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곤 약병의 뚜껑을 열어 낙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거 맛없는데…….”

“여기 음식이 다 그렇잖아.”

낙조의 중얼거림에 해화가 눈물 하나를 툭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낙조는 해화의 젖은 눈매를 응시하다가 순순히 입을 벌렸다. 곧 쓰고 걸쭉한 액체가 혓바닥 위에 떨어뜨렸다. 아무렴 살이 찢기고 뼈가 꺾이는 고통보다 나았다. 낙조는 감흥 없이 액체를 삼키고서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이제 믿어야 하는 건 시간뿐이었다. 해화는 바닥을 흥건하게 피를 내려다보았다. 웅덩이처럼 고인 피가 몸 이곳저곳에 퍼져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코를 찌르는 지독한 쇠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낙조 앞에서 아픈 척을 할 순 없었다. 해화는 엉금엉금 기어 낙조의 곁으로 다가갔다. 낙조가 인기척에 감고 있던 눈을 들어 올렸다.

“붙고 있어.”

낙조의 말에 해화가 슬쩍 어깻죽지를 내려다보았다. 또렷하진 않았지만 살점이 서로 엉겨 붙고 있는 게 어설프게 보였다.

“기분 이상하지.”

“두 번째라 그런지 괜찮네.”

“……미안해.”

“아까도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해…….”

해화는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낙조의 오른손을 쥐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손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마치 갓 내린 눈을 한 움큼 쥔 것처럼 손바닥이 얼얼해지는 느낌에 해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릴리가 낙조를 반갑게 맞이하길 바랄 뿐이었다. 너를 버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네가 나빠서도 아니고, 싫어서도 아니라 널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게서 너를 지켜낸 것이란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해화는 빠른 속도로 붙고 있는 낙조의 오른팔을 잠시 바라봤다가 손을 꽉 쥐었다. 자신의 체온이 조금이라도 낙조에게 옮겨붙길 바랐다. 낙조도 조용히 그녀의 손을 쥐고 천장만 바라보았다.

“무전이 되지 않습니다!”

“뛰어! 뛰라고!”

난데없이 밖이 소란스러웠다. 세성이 말한 시간은 아직 다 가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해화가 놀라 움찔거리니, 낙조가 손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무거운 여러 개의 발소리가 방문을 지나쳤다. 발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온전히 조용해졌다. 낙조는 왼손 팔꿈치로 바닥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쥐고 있던 오른손이 점차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해화는 그제야 쥐고 있던 손에서 살짝 힘을 풀었다. 낙조는 고개를 돌려 해화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넌 뭐할 거냐”

“뭘”

“총도 없잖아.”

“세성님을 찾으러 가야지.”

“혼자”

“혼자 할 수 있어.”

해화는 굳건하게 말했다. 낙조는 어설프게 풀어진 손끝을 바라보다가 해화의 손목을 쥐었다. 한 손에 잡히고도 남는 손목 아래로 동맥이 잡혔다.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맥박 수를 세던 낙조는 이내 손을 놓아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심박수가 높으시네.”

“피 냄새 때문에 머리 아파서.”

“뭐, 그래.”

천천히 다리를 굽혀 자리에서 일어났다. 통증도 거의 멎어가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피가 원만하게 잘 돌 때까지 쉬어야 하는 게 맞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낙조는 문고리를 잡고서 잠시 고민했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누구를 먼저 찾는 게 나을까.

삼승은 자신이 파고드는 순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세성도 삼승의 속을 읽지 못했던 것일까. 삼승의 빈틈은 어디일까. 수많은 생각이 쉴 새 없이 오갔다. 문고리를 잡고 가만히 서 있는 낙조를 보고, 해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곧 십 분 다 돼.”

“근데, 어쩐지 안 올 것 같아.”

“어”

“아까 막 뛰어갔잖아. 사람들.”

“…….”

“밖에 무슨 일이 난 것 같거든”

낙조는 해화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살짝 열었다. 복도에서 쏟아지는 불빛이 낙조의 얼굴을 밝혔다.

“밖에서 소란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지. 변종도 없으니까.”

“……홍지운도 깡 많이 늘었다.”

“홍지운은 원래도 용감했어.”

둘은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다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입을 다물었다. 낙조는 문 뒤에 숨은 채 숨을 삼켰다.

“겨울에 웬 불이야”

“불이 문제가 아니랍니다. 위에 올라갔던 여섯 모두 무전이 끊겼습니다!”

“아까 간 애들은”

“마찬가지입니다. 올라가자마자 수신이 안 됩니다.”

“에라이, 또 변종 도진 거 아니야 주변에 대추까지 태웠다면서!”

“그게…….”

“넌 아는 게 아무것도 없냐!”

걸쭉한 목소리의 남자가 어린 목소리의 남자를 타박하며 문 앞을 지나갔다. 그림자가 문틈 새로 살짝 비췄다가 사라졌다. 간부구나. 낙조는 대화 내용을 듣자마자 알아차렸다. 자신이 아는 이는 아니겠지만, 삼승의 뜻을 따르는 이 중 하나일 것이라는 건 확실했다.

“불 질렀나 보네.”

“대단하다.”

“밤이 누나가 짠 계획일걸.”

낙조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고서 문을 완전히 열었다. 다시 고요해진 복도에 두 발을 딛고 서니 눈이 부셨다. 고작 하루였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갑작스럽게 빛이 쏟아지자 조금 어지럽기도 했다. 해화도 마찬가지인지 낙조의 팔을 붙잡고 잠시 비틀거렸다.

“어디부터 가야 할까.”

낙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른손이 꿈틀거렸다. 낙조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른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완전히 신경이 봉합됐는지 부드럽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검지는 정확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 네가 안내해라.”

낙조는 릴리에게 얘기하듯 중얼거렸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걷자, 방향을 짚던 손가락은 점점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단단한 주먹의 형태를 갖춘 오른손을 내려다본 낙조는 코앞에 놓인 문 하나를 두고서 잠시 고민했다. 릴리가 과연 삼승의 얼굴을 알까. 물론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알고 있다면 삼승의 얼굴이야 알고 있을 게 당연했다. 하지만 릴리의 한이 맺힌 숙적은 켈리였다. 릴리와 직접 대면하고 대화까지 나눈 사람. 릴리가 모를 리 없는 사람. 낙조는 허리를 살짝 숙여 귀를 기울였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낙조는 문고리를 내려다보다가 왼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넓은 방이었다. 창문만 없는, 평범한 가정의 거실 같기도 했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매만지던 낙조는 문득 눈에 들어온 약통을 발견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통 안엔 가지각색의 작은 알약들이 담겨 있었다. 해화도 알약이 눈에 띄었는지 곁으로 다가왔다.

“좀……, 이상하게 생겼네.”

“그지”

둘은 뚜껑을 열어 알약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낙조는 다섯 개의 꽃잎 모양의 알약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가지각색의 알약은 본 적이 있었으나 사탕처럼 만들어진 알약은 본 적이 없었다. 정말 사탕 같은 게 아닐까 싶어 코끝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알약에선 아무 향도 올라오지 않았다. 달콤하거나 시큰하거나.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냄새가 전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낙조는 쥐고 있던 것을 두 손가락으로 부쉈다. 금세 조각나 가루가 된 알약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알약 안에 특별히 무언가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손가락에 묻은 가루를 털어냈다. 의문이 걷히지 않은 상태로 뒤를 돌았다.

“…….”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은 채 방으로 들어오던 켈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낙조의 손에 묻은 흰색 가루와, 열려 있는 약통 뚜껑을 보고서 소리 없이 기겁했다. 두 눈이 기괴하게 커지면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모습에 낙조는 보란 듯 다른 알약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어떻게 나온 거야…….”

“그건 알 필요 없고.”

켈리의 눈동자는 꽃 모양의 알약에 꽂혀 있었다. 악어와 새에서도 약을 먹은 걸 본 적이 있던가. 낙조는 바래진 기억을 떠올려보려 했으나 시간 낭비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다시 켈리를 향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오른팔이 저릿저릿하더니 손끝에서부터 무언가가 빠르게 낙조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벌레가 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고, 사람이 손으로 간질이는 느낌이기도 했다. 낙조가 잠시 멈칫거리자, 해화가 곧장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하.”

몇 초도 되지 않아 낙조가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히며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병사들 모두가 밖으로 나갔는지 켈리의 곁엔 그 누구도 없었다. 부를 사람도 마땅치 않았는지 그녀는 제자리에 서서 문고리만 꽉 쥐고 있을 뿐이었다.

“삼승님, 삼승님!”

그렇지. 부를 게 그 사람뿐이겠지. 낙조의 서늘하다 못해 음기가 가득한 시선이 켈리에게로 닿았다.

“이름이 켈리였구나. 나는……, 릴리. 너무 만나고 싶었어, 켈리.”

“삼승님, 삼승님! 여기, 여기 고낙조가―”

문고리만 잡고 목이 찢어져라 외치는 켈리에게 다가가며, 낙조가 오른손을 튕겼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낙조의 눈동자가 크게 팽창했다. 릴리, 라는 이름에 켈리의 목소리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낙조의 목소리였지만, 말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켈리의 코앞에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켈리의 피를 뽑을 거야. 아주 아프게. 죽어서도 아플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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