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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82화 (182/202)

182화. 릴리 (1)

“허억, 헉, 헉…….”

깊은 물에서 가까스로 헤엄쳐 나온 듯 해화가 두 눈을 뜨며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낙조와 세성의 시선 모두 해화에게로 깊이 꽂혀 있었다. 둘은 그녀가 스스로 입을 뗄 때까지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해화는 세성의 품에 안긴 오른팔을 가만히 응시했다. 입술이 달달 떨릴 정도로 오한이 들었다. 어떻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세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요?”

“걱정 마라. 1분도 채 안 되었으니.”

“…….”

“신소미야.”

세성이 안타까운 듯 해화를 불렀다. 그녀는 유리벽 너머 낡은 오른팔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낙조를 응시했다. 누가 보아도 겁에 질린 모습에 낙조는 손을 들어 해화의 어깨를 토닥였다.

“괜찮아.”

“……고낙조의 몸이 필요하대요.”

해화는 낙조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여전히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녀는 말을 토해내듯 고백했다. 낙조는 담담하게 해화의 말을 들었다. 그리곤 세성의 품에 안긴 오른팔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성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저 팔이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키셨어요?”

“…….”

“이렇게 될 줄 알고 계셨어요?”

낙조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렇게 묻는 낙조 또한 이런 운명을 피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세성은 바닥에 천으로 감싼 오른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낙조화 해화의 시선이 따라 위로 움직였다.

“지금 당장 대답이 듣고 싶어?”

“…….”

“듣고 싶다면 해주마.”

“아니에요.”

낙조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세성에게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다. 세성의 마음을 읽는다 한들 자신이 완벽하게 그의 계획까지 알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면 알수록 스스로를 철저하게 가두는 사람이니까. 낙조는 유리벽 하나를 두고 완전히 갈라진 공간에서, 차분히 세성을 바라보았다. 주먹을 쥐고 서 있는 그가, 그래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싶었다.

―너를 이렇게까지 내몰려고 하지 않았어.

세성의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웅웅 울렸다. 생각보다 차분하면서도 많이 쇠해진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에게 집중된 힘을 끊어내기 전까지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을 놓쳤다. 조금의 정적 이후, 세성은 몇 마디를 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된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구나.

―내가 이만큼이나 쓸모없는 존재였다는 걸 이제 깨달았어.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어린 것들을 도와줄 힘조차 없어. 그동안 나는 서천에서……, 삼승의 꼭두각시 노릇에 장단만 잘도 맞춰줬구나. 삼승이 숨기고 있던 머리를 들여다보지도 못했으면서 이 책임을 애꿎은 사람에게 넘기다니. 그걸 지켜만 봐야 하는 게 업보인가. 지금까지 잘못된 곳에 힘을 보탠 내가 책임져야 하는 끝인가.

‘업보’라는 말에 낙조의 눈이 깜박였다. 세성이 모든 걸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능력을 잃기 전까진 언제나 당당했던 세성이 보는 ‘끝’은 무엇일까. 그래서 능력을 잃기 전, 그는 이 순간도 보았을까? 아니면 미미하게 남은 능력이 세성을 벌주기 위해 자신까지 끌어들인 것일까. 낙조의 머릿속은 쉬지도 않고 돌아갔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자, 둘의 눈치를 보던 해화가 입을 열었다.

“고낙조.”

“……어.”

“괜찮아?”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는지 해화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낙조는 황급히 고개를 젓고서 대답했다. 그리곤 세성을 향해, 하나뿐인 정답을 얘기했다.

“문 열어주세요, 세성님.”

“…….”

“그래도 살살이풀은 가져오셨죠?”

애써 웃어 보이며 그에게 혼잣말하듯 물었다. 세성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뒤를 돌아 텅 빈 벽을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하자 낙조는 해화에게 말했다.

“내가 오른팔을 뜯고 저 팔을 다시 붙이자마자 약을 먹여줘.”

“……할 수 있겠어?”

“그럼, 다른 방법 있냐?”

“그냥 세성님이 문 열어주면……, 네 힘으로…….”

힘겹게 말을 이어가던 해화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대로 세성이 문을 열어주고, 팔을 떼지 않은 채 삼승과 맞붙는다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죽진 않겠지만 해화나 세성은 잡히는 순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게다가 삼승이 꾸며놓은 이 계략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조차 안 되는 지금 시점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낙조의 힘으로 목숨을 부지한 게 모두 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으니까.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무너지거나 넘어졌다. 무너지고 나서야 왜 무너졌는지 알 수 있었다. 학습이 되지 않도록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변형됐다. 마치 낙조의 몸에 깃든 식물 세포처럼. 변이는 매 순간 함께했다. 죽고 사는 이들 모두와.

“사실 저게 진짜 내 팔이잖아.”

“…….”

낙조는 건너편 바닥에 놓인 옛 오른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해화는 차마 볼 수 없는지 몸을 웅크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 팔은 삼승이 만들어준 거고. 어떻게 생각해보면 잘 된 거지. 릴리 복수하고, 릴리 보내주고……, 원래 내 팔도 되찾고.”

“이렇게 힘들고 아픈 일들이……, 왜 항상 너한테만 일어나는지 모르겠어.”

“나한테만? 아닐걸. 지금 내가 불쌍해 보이는 것뿐이야.”

낮은 음성이 좁은 공간을 울렸다. 해화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낙조를 바라보았다.

“해피엔딩이 사실 진짜 어려운 거거든.”

“야.”

“보상심리는 아니지만……, 지금 상황보다 뭐든 낫겠지.”

낙조가 말을 덧붙이자, 해화는 뜨거운 덩어리가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울렁거리는 속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토할 것 같았지만 버텨내야 했다. 낙조가 버티고 있으니, 자신도 함께 그 곁을 지키는 게 마땅했다.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버티는 자가 있고, 버티는 자를 지키는 자가 있었다. 암묵적인 약속을 우리가 지켜왔기에 우리는 그 누구도 잃지 않은 것이다.

“여기, 약.”

세성이 다시 유리벽 앞으로 돌아와 해화 앞에 조그마한 약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곧 문이 열린다. 보초는 십 분 정도 후에 돌아올 거야. 그 안에 끝마쳐야 한다.”

그리고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고서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다시 어두컴컴해진 방안에 남은 낙조와 해화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기어코 되돌아왔다. 서천의 굴 근처까지.

밤이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꽤 비장한 얼굴을 한 수호가 밤이의 시선을 느끼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총을 쥔 채 밤이에게 물었다.

“아직도 제 걱정하세요?”

“좀 다르게 말할 순 없을까?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금수호 씨한테 딴 맘 품고 있는 것 같잖아.”

“뭐……, 사람 일은 모르니까요.”

“시끄러워.”

밤이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곤 산에 발을 디뎠다. 바삭, 어쩐지 내려왔을 때보다 흙이 푸석해진 느낌이 들었다.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하며 천천히 위로 올라가던 밤이는 무언가 생각난 듯 걸음을 잠시 멈춰 세웠다.

“지금 몇 월이지?”

“이제 1월 말……, 쯤?”

지운이 수호 대신 대답했다. 밤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할 수 없으니 약간의 티를 내는 것도 위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장전하고서 자세를 취한 채 흙이 다져진 길을 따라 올라갔다. 밤이를 따라 수호, 지운이 차례로 길을 밟았다. 산은 도망쳤던 날보다 더 음산해져 있었다. 발끝부터 온몸을 휘감는 기운은 오싹했고 괜히 목 뒤가 시린 느낌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마른침을 몇 번이고 삼켰나. 마침내 익숙한 수풀을 발견한 밤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서 천천히 그곳에 다가갔다.

“……어?”

위쪽엔 경비병 하나 없으니 수풀을 헤집고 들어가는 건 문제가 없었다. 예상치 못했던 문제는 그 다음에 펼쳐졌다. 분명히 수풀에 감춰져 있었던,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위치를 잘못 기억하고 있나 싶어 여러 곳을 뒤져봐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리만 빙빙 돌 뿐, 그 어디에서도 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밤이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흙더미를 매만지다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문을 닫은 걸까?”

밤이의 중얼거림에 수호도 찾는 것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누가 들을 새라 아주 작게 대답했다.

“처음 여기 왔을 때, 기억나요?”

“…….”

“믿지 않는 사람한텐 안 보인다고.”

“들어갔다 나온 사람인데 어떻게 안 믿을 수가 있어?”

“돌려 말하자면 이런 거죠. 우리처럼 앙심을 품고 온 사람들한텐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수호의 말에 밤이는 골치 아파 죽겠다는 신음을 흘리고서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수풀에 뒤덮인 채 밤이는 문이 있던 곳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덩달아 기운이 빠진 듯, 지운도 자리를 깔고 앉은 채 머리를 헝클였다. 수호만 덩그러니 서서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경비병부터 처리한다고 했었죠.”

“일단 들어가야 뭐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못 들어가면 나오게 해야죠. 시간도 없는데.”

수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지운에게 말했다. 얼이 빠진 얼굴로 수호를 올려다보던 지운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대답했다.

“나 알 것 같아요.”

“뭔데요.”

“방화.”

지운의 대답에 수호는 씩 웃어 보이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운도 따라 웃으면서 그와 손바닥을 짝, 하고 맞댔다. 그걸 보고 있던 밤이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러다 산불만 나면? 다 태워버렸는데도 안 나타나면.”

“그럼 땅 파자, 누나.”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 진짜.”

“원래 누나가 세운 계획이었잖아. 벌집 떼려면 그렇게 해야 된다며.”

“그건 눈에 보일 때 얘기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위치에 하는 게 제일 베스트야. 너무 어렵게 생각하려고 하지 마.”

“나한테 훈수 두냐?”

“나처럼 살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걸.”

지운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밤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짜증 가득한 얼굴로 지운을 노려보다가 손을 털었다. 그녀는 이내 가방에서 라이터를 꺼내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한 후 수호에게 라이터를 던져 건넸다. 겨우 받아든 수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주변에 모인 낙엽과 나뭇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운도 슬그머니 미소를 짓곤 낙조가 변종 잔당을 처치하고 남은 흔적을 손으로 하나하나 주웠다. 가끔 진액이 딱딱하게 굳은 것도 있긴 했으나 장작은 많을수록 좋으니 상관하지 않았다.

마침내 한 무더기 정도 쌓아 올렸을 때, 수호는 밤이와 눈빛을 교환하고서 라이터의 불을 켰다. 낙엽 끄트머리에 달라붙어 있던 불은 까만 입을 벌려 낙엽을 갉아 먹으면서 점차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열기를 느끼던 일행은 한 발자국 물러나 각자 사격 자세를 취했다. 밤이는 수호와 지운을 조금 뒤에 세워두고서, 수풀 사이에 몸을 숨겼다.

타닥, 타닥…….

불씨가 기름처럼 이리저리 튀며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이 이상으로 불이 번진다면 아무 소득 없이 산 아래로내려가야 했다. 밤이는 손바닥에 난 식은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서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제발…….’

밤이의 총구가 겨누고 있는 곳은 불구덩이의 발이었다. 뜨거운 불속에서 무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길 바라며 수풀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이곳입니다!”

덜컹,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꺼운 방화복을 입은 병사가 불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열기가 생각보다 대단한지, 그는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몇 번이고 뒤로 몸을 움츠리던 병사는, 아래에서 받아든 물을 위로 끼얹으며 숨을 헉헉거렸다. 밤이는 포복 자세로 몸을 낮춘 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쳤다. 지운과 수호가 인기척을 꼭 숨겨뒀길 바라면서, 그녀는 완전히 병사의 머리가 드러나길 기다렸다.

가장 맨 앞에 선 병사가 몇 번 물을 끼얹자, 문 주위는 조금이나마 사그라들었다. 그제야 총을 쥔 병사가 수풀 위로 올라왔다. 뒤를 따라 물통을 든 병사들이 주위에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화재의 원인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병사의 머리에 총구를 맞추고서, 밤이는 숨을 잠시 참았다가 방아쇠를 그대로 당겼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머리가 사방으로 터져 날아갔다. 조각들은 아직 꺼지지 않은 불에 던져져 바짝 타들어 갔다. 그제야 뒤따라 나온 병사들이 허겁지겁 총을 쥐고서 경계를 잔뜩 세웠다. 밤이는 장전을 다시 마친 후 무전기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총인원 다섯. 내가 셋 맡을 테니 각자 한 명이라도 잡아라. 못 잡으면 여기에 놔두고 들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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