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180화 (180/202)

180화. 폭격 (1)

“쯧.”

일행 중 일부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은 삼승은 미간을 찌푸렸다. 혀를 차며 뒤를 도니, 여전히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켈리가 보였다. 그녀는 헝클어진 금발을 정리하지도 않고서 삼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은 비소에 가까웠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파란 눈동자는 거의 비어있다시피 보였다.

삼승은 천천히 켈리에게 다가가 시선을 맞췄다. 켈리는 삼승이 자신의 앞에 와서야 웃음을 거두었다. 재미난 광경을 봤다는 듯, 그녀는 웃음을 서서히 죽이다가 입을 열었다.

“연기가……, 그래도 느셨네요.”

“완전 맛이 갔구나.”

“그럼 밖에서 나 혼자 악역을 자처해야 하는데 제정신이겠어요?”

“주제넘지 마라.”

웃음이 떠난 켈리의 얼굴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생채기가 여기저기 너저분하게 그녀의 얼굴에 퍼져 있었다. 삼승은 엉망진창인 켈리의 손등과 얼굴을 보고서 말했다.

“약초 효능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망가졌어.”

“그동안 나 같은 사람 살리는 약초 하나 안 만들고 뭐 하셨습니까.”

“아까 다 봤잖아. ……네가 밖에서 악역을 자처하는 동안 나는 여기를 지켰지.”

“지키긴……, 저런 괴물 키우느라 바빴겠지.”

켈리가 멍하니 서 있는 귀도를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다시 킥킥 웃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난 정말 귀도가 날 죽일 줄 알았어요. 삼승님이 날 죽이라고 시킨 줄 알았다구요.”

“그건…….”

“됐어요. 삼승님한테 사랑받자고 얘기한 거 아니니까.”

귀도의 검운 눈동자가 켈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파도가 오기 직전의 바다처럼 고요한 시선은 켈리를 겁주기에 알맞았다. 이미 그녀에게 한 번 잡아먹힌 적이 있는 켈리는 시선을 황급히 회피했다.

“귀도.”

“…….”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렴.”

“…….”

“너도 알잖니. 아무리 네가 대단해도 이 일을 책임질 순 없다.”

“책임질 필요 없어.”

“귀도.”

“더 이상 당신의 말에 복종할 이유도 없어. 당신을 지켜야 할 이유도, 이곳을 보호해야 할 이유도 없어.”

“네가 그렇다니 속상하구나. 나는 그래도 너를 끝까지 지키고 싶은데. 괜한 힘을 쓰게 하지 말아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삼승이 손을 들어 귀도의 목을 쥐었다. 찰나의 순간에 귀도의 목 안으로 얇고 작은 침 하나가 파고들었다. 귀도는 삼승에게로 손을 뻗다 말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큰 눈을 뜬 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귀도를 내려다보며 켈리가 중얼거렸다.

“저걸 끝까지 살려두시려고?”

“네가 말한 대로 내가 키운 거니까.”

“삼승님도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켈리의 말에 삼승은 착잡한 얼굴로 쓰러진 귀도를 내려다보았다. 상황은 일단락됐다. 놓친 이들이 있긴 하지만 필요한 이들이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잡아넣으려던 녀석들은 서천의 손아귀에 모두 잡혔다. 삼승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고서 주머니를 뒤지더니 작은 알약 몇 개를 꺼냈다. 켈리는 알약을 보고 슬그머니 미소지었다.

“줄 거면 좀 깨끗하게 주시지.”

“조용히 해. 이제 너 돌봐줄 시간도 없다.”

“많이 속상하신가 보네.”

켈리는 알약을 물도 없이 씹어 먹으면서 중얼거렸다. 누가 보아도 껄끄러운 모습에 삼승은 뒤돌아 간부에게 지시했다.

“귀도를 방으로 옮겨라. 문 잠그는 것 잊지 말고.”

“예.”

그리곤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세성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켈리가 누워있던 침대만 내려다보며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세성.”

“…….”

“웃어야지. 자네까지는 내가 살려두고 싶었으니까.”

삼승의 속삭임에 세성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가 손을 앞으로 모았다. 천천히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곧 삼승은 간부들을 시켜 켈리를 데리고 방을 떠났다. 홀로 남은 세성은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아 꾸역꾸역 차오르는 숨을 다잡았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흙 속에 갇혀 있었을 때보다도 괴로웠다. 세성은 가슴 쪽을 쥐어뜯으며 소리 없이 울었다.

*

삼승이 켈리에게 준 약은 환각제에 가까운 약이었다. 약에 취한 켈리의 얼굴은 환히 빛났다. 비틀거리지도 않고, 오히려 기운을 찾은 듯 우아하게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고 삼승이 혀를 찼다.

“정말 가야겠니.”

“봐야죠.”

켈리는 두꺼운 코트를 여미면서 대답했다. 낙조와 해화를 가둬둔 지 한 시간이 넘었을 무렵이었다. 무흠은 간부들이 다른 곳에 가두었다고 보고했다. 뜻을 따르지 않는 간부들과 함께. 삼승은 잠시 무흠을 생각하다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너는 왜 그렇게 고낙조에게 집착하는 게야.”

“날……, 내 약점을 아는 사람한테 한 번 졌으니까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두 눈에서 흘러나오는 복수심은 차마 숨기지 못했다. 삼승은 말없이 손을 휘저었다. 켈리는 꽃단장을 마치고 방을 나섰다.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간부가 켈리에게 길을 안내했다. 낙조와 해화가 있는 곳으로. 켈리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흰 복도를 걸었다.

마음 같아선 귀도가 있는 곳을 가장 먼저 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힘을 알았기에 일단 수그리기로 했다. 독에 든 쥐 꼴이 된 모습은 아껴서 봐야 제맛이니까. 복도를 몇 번 꺾자, 간부가 조명이 하나 꺼진 방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유리벽 안에 나란히 갇힌 낙조와 해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기분 좋은 긴장감에 두 손을 꽉 쥐고서 앞으로 다가가니, 먼저 인기척을 느낀 해화가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 잡혀 오기까지 꽤 험난했는지 얼굴이 상해 있었다. 켈리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를 가여워하는 척 말했다.

“저런……, 많이 힘드나요?”

“…….”

켈리의 목소리에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낙조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켈리의 하얀 얼굴이 보였다. 그냥 유리였다면 부술 수 있겠지만 이 벽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정신을 엉망으로 흩뜨리는 향이 피어올랐으니까.

“어쩌겠어요. 똑똑한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이길 수 없겠지.”

“하.”

낙조가 코웃음을 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오른손에 힘을 주어 나뭇가지와 가시를 손끝에서 뽑아냈다. 켈리는 새로 보는 낙조의 변화에 두 눈을 크게 뜨며 작게 감탄했다.

“어머나.”

“갖고 싶어?”

“아직도 당신이 내 위에 있다고 생각해요? 이 꼴을 하고서?”

“그런 건 신경 안 써. 켈리, 내가 조언 하나 해줄 테니까 잘 생각해봐.”

낙조는 피곤한 얼굴을 유리벽 가까이 붙였다. 켈리 또한 눈을 가만히 깜박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낙조는 곧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제 내가 당신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아. 그러니까 괜히 건드리지 마.”

“……하! 아직 능력을 어떻게 쓰는지조차 모르면서 기세만 높네요.”

“언제까지 ‘악어와 새’의 켈리 연기를 할 거야? 이제 그만해. 질렸으니까.”

낙조의 마지막 말에 켈리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갔다. 그녀는 입을 일자로 꾹 닫고서 벽 너머의 낙조를 노려보았다. 팔팔 끓는 파란 눈동자가 낙조에게로 선명하게 다가왔다. 낙조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지금 네 처지나 파악해!”

난데없이 켈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켈리의 약점은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가 유지하려는 모습과 내면은 흑과 백처럼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가식의 끝을 악어와 새에서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곳에선 그저 그녀의 행보를 깎아내리려고만 했다면 지금은 더 깊숙하게 파고들어 수치심을 주는 것과 같았다. 낙조의 예상은 어이가 없을 만큼 정확하게 떨어졌다. 실제로 똑똑하고, 자신이 똑똑하다는 걸 알면서 왜 저런 부분에선 이리도 허술한지. 낙조는 설핏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봐. 내가 한마디 했다고 바로 꼭지가 돌겠잖아.”

“……이만 가야겠어요.”

켈리는 말없이 부들부들 떨다가 곁에 서 있는 간부의 눈치를 보더니 자리를 떴다. 켈리가 나가고 나서야 해화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 소리 내어 웃다가 낙조에게 말했다.

“사람은 변하질 않는다더니, 어쩜 저래?”

“분명 또 온다.”

“뭐 걸래?”

“나가서 물 먼저 마시기.”

“콜.”

해화와 낙조는 시선을 맞추고서 시시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복잡한 생각에 붙잡혀 그들의 뜻대로 끝날 것 같았기에.

*

손바닥은 긴장감에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세성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서 자리에 앉아 골똘히 생각했다.

사방에 자신을 감시하는 눈과 귀밖에 없었다. 잘못 움직였다간 귀도와 다름없는 꼴이 될 수 있었다. 무흠까지 붙들렸다는 걸 들으니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당장 서천 안에서 낙조와 해화를 도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행동에 제한이 따라붙기 시작한 이상 손가락 하나 감추는 것조차 오해를 살 수 있다.

‘오래 끌면 안 된다.’

세성은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닦아내고서 생각했다. 계획을 세운다면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삼승이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치밀하면서 동시에 허술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녀가 알아챌 수 있는 지점을 미리 예상하고 구덩이를 파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삼승을 죽이는 건 안 돼. 그러면…….’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깃든 정과 고마움은 공포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이 악몽에 물든 것처럼 금방이라도 땅이 꺼질 것 같았다. 세성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작은 방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방 안엔 아직 색색거리며 얌전히 버티고 있는 낙조의 낡은 오른손팔이 있었다. 그것은 유리관 안에 갇힌 채 죽음을 기다리는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켈리를 먼저 없애야 한다.’

오른팔 안에 갇힌 소녀의 한이 얼마나 깊은지는 세성도 알고 있었다. 해화가 처음 소녀의 혼을 통역할 때는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었으니까.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슬픔이 산사태처럼 쏟아지고 있다는 걸, 세성은 알아차렸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세성은 좀처럼 소녀의 혼을 달래주기가 힘들었다.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붙잡아 두려 했다. 자신의 피를 빼면서까지. 두 번 죽일 수 없다는 생각에 몸을 혹사하면서도 소녀의 혼을 곁에 두었다.

‘……어쩌면 이 상황을 내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우스운 생각이겠지만, 세성은 막연히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라진 능력의 잔흔이 자신을 위해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은 아닐까. 죽음을 코앞에 두니 그런 우스운 생각도 나름 그럴 법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농담으로 했다면 혼이라도 냈을 텐데.

“아이야.”

세성이 유리관 앞에 서서 말했다. 오른팔은 축 쳐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입을 꾹 닫아버린 것마냥 구는 모습에 세성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유리관 위로 손을 올렸다.

“네가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이곳에 왔다.”

혹여 자신의 목소리가 새어나갈까 싶어, 세성은 말 한 마디를 하는데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발소리나 인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었다. 세성은 다급해진 손길로 유리관을 열었다. 여전히 묵묵부답인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꺼낸 세성은 고운 천에 그것을 감싸고 품에 안았다.

“선물은 아니지만……, 네 슬픔이 이것으로 조금은 풀렸으면 한다.”

그는 오른팔을 꼭 껴안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마음을 다잡은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거의 삼승의 방에 모여 있는 건지, 아니면 낙조와 귀도를 감시하는 건지 복도는 조용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발을 내디뎠다. 잔잔한 호숫가에 돌을 던진 것처럼 괜히 가슴이 술렁거렸다.

세성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후 오른팔을 감싼 천에 천천히 적셨다. 세성의 따뜻한 피가 뭉근하게 오른팔의 피부 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