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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79화 (179/202)

179화. 그늘진 꽃밭 (2)

삼승은 순순히 귀도의 손에 잡혔다. 어차피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귀도는 온몸을 떨며 분노라고 단정 짓기엔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핏발 선 두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한 줄기 쏟아졌다. 귀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본 삼승은 서글프게 웃었다.

“삼승님!”

“귀도님, 뭐 하는 짓입니까!”

간부들 사이에서 놀란 외침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두 명은 방안으로 들어와 귀도와 삼승을 떼어놓기까지 했다. 삼승은 구겨진 옷소매도 정리하지 않고 귀도를 가만히 응시했다. 귀도는 다른 간부에게 단도를 빼앗기고서 제자리에 선 채 또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뜨렸다.

삼승의 목소리가 낙조의 귓가에서 멀어졌다. 그녀의 마음에서 빠져나온 낙조는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켜 세웠다. 해화가 낙조를 부축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가만히 있는 건 세성뿐이었다. 그는 허망한 눈을 하고서 낄낄거리며 웃는 켈리의 뒤통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가야 해.”

“뭐?”

“여기서, 나가야 해.”

낙조는 숨을 허겁지겁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해화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았다. 그는 해화의 손을 붙잡고 간부들을 헤집고 방으로 나갔다. 여기저기서 손들이 뻗쳐 왔으나 낙조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끄트머리에 서 있던 무흠이 세성과 귀도를 번갈아 보다가 문 쪽으로 달려가 길을 열어 주었다. 낙조와 해화가 문을 통과해 복도로 나가자, 무흠도 그 뒤를 따라 방을 박차고 나갔다.

“향을 피워라.”

그 모습을 지켜본 삼승이 곁에 있던 간부에게 지시했다. 얍삽한 수염을 가진 간부가 빈자리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열린 문을 완전히 걷히고서 맞은편 방으로 건너가 커버에 덮여 있던 스위치를 꾹 눌렀다.

“귀도님!”

“삼승님, 삼승님……, 이러실 순 없습니다.”

이미 삼승의 계획을 알고 있던 간부들은 반절을 넘어서는 수였다. 그들을 제외한 이들은 제자리에 주저앉거나, 다른 간부에게 붙잡힌 귀도를 보며 울부짖었다. 한순간에 자신들이 인생을 바쳐 지켜내려고 한 것들이 모두 부정당했다. 개인의 욕망 때문에. 몰락한 것과 다름없었다. 지진에 휩쓸려 무너진 신전에 갇힌 기분이었다.

“저 악마 같은 자와 손을 잡으시다뇨, 삼승님!”

한 명이 꼿꼿이 선 채 삼승을 향해 외쳤다. 그의 눈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주먹을 꽉 쥔 간부는 삼승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했다.

“서천꽃밭은 삼승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꽃밭을 버리시는 겁니까.”

“새로운……, 아니, 개척을 위해선 나도 큰 결정을 내려야 했네. 그렇게 말하니 섭섭하군.”

“멋대로 자연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살고 죽는 것 또한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걸 인간의 힘으로 뒤집으시겠다고요?!”

“내가 곧 자연이다. 살고 죽는 약초와 독초 모두 내 피로만 자라나니, 내가 생명이지.”

삼승은 그를 똑바로 바라본 채 조목조목 대답했다. 이제껏 본 적 없던 삼승의 독기에 간부가 숨을 띄엄띄엄 흘렸다. 조금의 희망도 남지 않은 시선은 곧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도 무릎을 꿇고 말자, 삼승이 세성을 향해 뒤돌았다.

“내 말뜻을 제일 잘 아는 건 역시 세성이로구나. 내가 직접 살린 사람이라 그런가.”

“…….”

“그래, 힘이 없으면 조용히 해야지.”

돌이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세성을 보면서 삼승이 혀를 찼다. 귀도는 간부들을 뿌리치고 삼승의 뜻을 반대하는 자들과 나란히 섰다. 무기는 빼앗겼지만 이곳에서 죽을 생각은 없었다. 삼승은 한껏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귀도를 바라보았다. 그 어떤 말이 오가지 않아도 둘 사이에선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눈물에 젖은 귀도의 얼굴을 보면서, 삼승은 많은 생각에 잠겼다.

“나 때문에 우는 거니.”

“…….”

“아니길 바란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을 죽였어야 했어…….”

“…….”

“내 의심이 맞았어. 당신이 의심되기 시작했을 때 진작에 죽였어야 했던 건데…….”

귀도는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삼승에겐 조금도 타격이 없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귀도를 안쓰럽게 응시했다. 삼승의 곁에 선 간부 하나가 귀도를 아니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삼승에게 물었다.

“삼승님, 잡아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자리에서 죽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예?”

“귀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건가?”

“그게…….”

“하나쯤 살려두는 건 괜찮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지도 않고.”

삼승은 간부에게 언질을 놓으면서 아량 넓은 척 말했다.

세성은 켈리의 금발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주먹을 꽉 쥐었다. 향을 피우란 말은, 복도에 독소를 뿌리란 이야기다. 낙조와 해화 모두 변종 중에서도 돋보이는 돌연변이. 삼승이 그 둘을 가만히 보내줄 리가 없었다. 그런 둘에게 가장 취약한 감각은 후각이다. 같은 변종이기에 후각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제발 도망쳐라…….’

속으로 죽을 듯이 외치면서, 세성은 눈을 감았다.

*

“고낙조, 잠깐만.”

“헉, 허억…….”

“잠깐만!”

정신없이 복도를 달리던 해화가 발을 멈추고 소리를 질렀다. 덩달아 멈춘 무흠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들을 따라오는 이는 없었다. 이상했다. 무흠은 뒤를 가만히 돌아보고 있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코를 막고 낙조와 해화에게 소리쳤다.

“코 막아. 당장!”

시야가 뿌옇게 물들 정도로 가스가 가득 차올랐는데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은 흰 복도는 이런 순간 힘을 발휘한다. 무흠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본 낙조와 해화는 급하게 손을 올렸지만, 이미 너무 많은 독소를 들이켠 상태였다.

“중사님.”

힘이 사라져가는 목소리로 낙조가 낮게 무흠을 불렀다.

달리는 걸 멈추자마자 가쁜 호흡 사이로 어지럼증이 돌았다. 눈앞은 뿌옇다가 눈알을 찌르는 듯한 진한 색깔의 빛이 고통스럽게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을 가리니 귓속 깊은 곳이 아렸다. 손을 닿는 곳마다 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낙조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벽에 등을 기댔다.

해화라고 다를 건 없었다. 낙조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을 보고 덜컥 겁을 먹은 해화는 낙조의 몸을 흔들며 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흐릿해진 초점, 창백한 낯빛,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입……. 익숙해질 수 없는 모습에 소리 높여 낙조의 이름을 부르던 해화의 눈앞에, 무언가 빠른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날아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녹다 만 여자의 얼굴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얼굴은 오른쪽으로 세 바퀴를 빠르게 돌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웃음소리를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을 빼앗으려 했던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은 이목구비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눌려 있었다. 몇 군데선 변종에게 깨물린 자국이 있었다. 썩다 만 피부에선 구더기가 피어 올라오고 있었다.

“아, 아…….”

해화는 낙조의 몸에서 손을 떼고 뒤로 주저앉았다. 여자의 얼굴은 시끄럽게 웃다가 아주 짧은 순간에 해화의 코앞까지 날아왔다.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여자의 눈알에서 들렸다.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해화는 간간이 손끝만 움찔거리다가 그대로 눈을 감고 뒤로 쓰러졌다.

“홍해화! 고낙조……. 이, 씹…….”

낙조의 이름을 부르짖던 해화가 갑자기 조용해진 순간부터 해화를 계속 흔들던 무흠이 낮게 욕을 뇌까렸다. 변종에게만 유해한 독소라고 해도 인간이 맘껏 들이켜봐야 좋을 건 없었다. 무흠은 한 손으론 코를 막고, 남은 손으로 해화와 낙조의 손목을 간신히 쥐고서 복도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떼는 게 쉽지 않았다.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고 호흡은 견디기 힘들 만큼 부풀었다.

이 상태론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문지기와 맞설 수조차 없다. 무흠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면서 오른쪽으로 길을 틀었다. 약초의 씨앗이 냉동 보관돼있는 창고를 선택했다. 복도 전체에 독소를 뿌려도 냉동창고와 간부들의 방까진 독소가 차지 않는다. 한편으론 남은 일행들이 다른 곳으로 피했길 바라며, 무흠은 둘의 몸을 끌고 냉동창고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낙조는 간간이 붙잡힌 상태에서도 몸을 떨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건 계속됐다.

‘제발, 제발 버텨라……. 정신 차려, 제발…….’

무흠은 속으로 애타게 애원하면서 잠시 숨을 참고 손으로 냉동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리곤 낙조와 해화의 몸을 차례로 안으로 들였다. 바깥에선 언제든 문을 열 수 있겠지만, 일단 둘이 정신을 차리는 게 문제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땀을 다 닦기도 전에 작은 냉동고들을 하나씩 뒤졌다. 이름표가 붙은 채 진열된 씨앗들 전부를 알진 못했지만, 독소를 몸에서 배출시키는 약초가 무엇인지는 알았다.

다른 때보다 침착해지기가 어려웠다. 덜덜 떠는 손으로 냉동실을 하나씩 파헤치면서, 무흠은 정신없이 그 약초의 이름만 중얼거렸다. 가끔 뒤를 돌아봐 낙조와 해화가 정신을 차렸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마침내 아는 이름의 씨앗을 발견한 무흠이 밀봉된 씨앗을 마구잡이로 뜯었다. 작은 씨앗을 또 반으로 쪼개 더 작게 만든 다음, 낙조와 해화의 입에 반 알씩 넣곤 고개를 젖혀 삼키게 했다. 그리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낙조는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멈췄다. 몸을 움찔거리는 것도 서서히 멎어가고 있었다.

“하아…….”

무흠은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아 두 다리를 폈다. 냉동창고 안인데도 식은땀이 났다.

“이쪽입니다!”

한 시름 덜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호랑이 굴 안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스울 수 있지만. 독소 배출이 시작되고 있는지 밖에선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흠은 냉동창고 불을 끄고서 낙조와 해화의 몸을 구석에 밀어 넣었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곧 여러 개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문을 여는 소리에, 무흠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서천 병사들이 총구를 겨누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장승님.”

“힘들어서 더 도망 못 가겠다.”

“환인과 신소미는 어디 있습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낙조와 해화의 몸이 보이지 않는 각도로 서서 말을 늘이던 무흠은 문득 병사들 어깨 뒤로 지나가는 인영에 시선을 잠깐 돌렸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복도를 건너간 이와 눈이 마주쳤다. 지운은 덫에 걸린 토끼 같은 눈을 하고서 무흠을 잠시 바라보다가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

방안에만 있는 게 갑갑해 몰래 수호의 방에 모여 있었다. 수호의 방은 무흠의 방과도 가까웠기에 무서울 게 없는 곳이었다. 밤이는 여러 잔의 커피를 마셨고 수호는 켈리의 파일을 뒤적거리는 중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이상함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밤이였다. 그녀는 지운과 수호를 방에 두고서 슬쩍 복도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방독면과 총들을 껴안고 수호의 방으로 돌아왔다.

「뭐야? 이건 어디서 갖고 왔어. 뭔데.」

「일단 방독면 먼저 써. 백무흠 방에서 챙겨온 거야. 금수호 씨, 총은 쏠 줄 알아?」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지만, 잘은 못 쏴요.」

「솔직하네. 빨리 나가야 해.」

밤이는 무척 급해 보이는 얼굴로 총과 탄환을 챙겼다. 수호도 덩달아 급해진 손길로 컴퓨터에 꽂힌 USB를 뽑아내 주머니에 넣었다. 얼떨결에 그녀의 말대로 방독면을 쓰고 총을 챙겼으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지운은 수호의 방을 나가기 직전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왜.」

「아직 아저씨랑 누나 안 왔는데.」

「지금 이러는 거 보면 모르겠어? 일단 우리가 살아야 걔네를 살리든 할 수 있어. 조용히 하고 따라와.」

밤이의 살벌한 눈빛은 방독면 안에서도 무섭게 빛났다. 그녀를 선두로, 지운이 후발대를 자처했다. 셋이 복도를 나갔을 땐 시야 확보가 완전히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수증기가 조금씩 차오르는 것처럼 흰 벽 어딘가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궁금증을 가질 시간도 없었다. 이곳 지리에 빠삭해진 밤이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뒷모습이 안개에 가려 사라지기 전까지 따라 움직여야 했다.

그녀를 따라가다 보니 밤이가 가려는 길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밖이었다. 분명 그녀는 출구 쪽으로 길을 트고 있었다. 지운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모두가 어딜 갔는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잠시 동태를 살피기 위해 식당 문 뒤에 숨어 있을 때였다. 연기가 천장까지 차오르자, 어딘가에서 병사들의 뭉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는 이쪽! 우리는 이곳으로 간다!’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와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섬뜩하게 들렸다. 밤이는 숨을 죽인 채 있다가 인기척이 사라질 즈음 문을 열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출구에[ 가까워질 즈음 연기가 점차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지운은 총을 꽉 쥔 채 숨을 다잡았다. 손바닥에 차오른 땀 때문에 금방이라도 총이 미끄러져 떨어질 것 같았다. 밭은 숨을 아무리 내뱉어 봐도 어지러운 속은 가라앉지 않았다.

마지막 복도를 남겨두고서, 밤이는 문지기가 병사들과 합류해 어딘가로 향하는 타이밍에 몸을 움직였다. 수호도 급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지운은 마지막으로 그 뒤를 쫓다가 병사들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잠깐 돌렸다. 복도 끝, 어두운 동굴 같은 공간이 있었다. 복도 불빛으로 간신히 안쪽이 보였다. 지운은 불빛과 땀에 적셔진 무흠과 아주 잠깐 눈을 마주쳤다.

계단을 어떻게 뛰어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수풀 밖으로 나오자마자 셋은 방독면을 집어 던졌다. 기침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다시 산 밑으로 내달렸다. 지운은 어느새 포근해진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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