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그늘진 꽃밭 (1)
해화의 질문은 칼날을 숨긴 부드러운 깃털 같았다. 안전할 수도 있지만, 바람 한 번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는 위압감이었다. 악어와 새에서 웅크렸던 해화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켈리는 해화의 눈을 마주한 채 몸을 잘게 떨다가 숨을 삼켰다. 자신의 처지는 일찍 알아챘는지 도망치려고 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낙조는 세성의 뒤에 선 삼승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켈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릴리가……, 릴리가 어떻게?”
조금 시간이 흐른 후, 켈리가 내뱉은 말은 그 한 마디뿐이었다. 릴리의 존재에 의아함을 품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녀가 쓴 보고서가 사실이라는 말이 된다. 켈리는 한 손을 들어 꼬인 머리카락을 억지로 풀면서 홀로 중얼거렸다.
“그 애 피는……, 오래전에 다 썼는데.”
“…….”
낙조는 불편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켈리를 노려보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가 버거웠다. 자신에게 붉은, 끔찍한 환각을 보여주었던 사람. 그 환각 속에서 몸부림치는 자신을 즐겁게 관람하던 사람.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을 모두 저주한 사람. 악어와 새에 큰불이 나면서 완전히 힘을 잃거나, 자신이 일구어온 잘못된 연구 자료와 함께 불탈 줄 알았던 그녀가 눈앞에 있다. 삼승의……, 알 수 없는 보살핌을 받으면서.
“네가, 네가……, 네가 깨웠니?”
허둥지둥 시선을 돌리던 켈리가 낙조를 응시하면서 물었다. 자신을 향한 파란 눈동자는 전보다 많이 묽어져 있었다. 세월의 두께를 고스란히 진 모습이 이제야 보였다. 낙조는 켈리의 손이 자신 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보고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낙조의 옷소매를 놓치고서 바짝 독이 오른 목소리로 방이 떠나가라 외쳤다.
“네가 깨웠구나!”
목적어를 얘기하지 않아도 그녀가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릴리’를 말하는 것이겠지. 그 아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싶은 상태에서, 켈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은 몇 명 없었다.
켈리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동안 릴리는 낙조의 오른팔에 숨어 연기를 했으니까.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었는지, 낙조를 자극하여 스스로 몸에서 떨어져나오긴 했으나 그 뒤가 문제였다. 자급자족할 수 없으니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정확히는 거제도에서 구체 변종을 마주친 이후 낙조가 능력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였다. 그때까지 릴리는 낙조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았는지 낙조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스스로 고립되게끔 조종했다. 자신은 항상 평화로운 삶을 살지 못하고, 자신의 주위는 언제나 막막할 정도의 불행만 넘쳐난다는 생각에 빠지게 해 일행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결국은 실패했지만. 낙조의 몸이야 릴리가 붙어 있으니 어느 정도는 조종할 수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까진 아니었다. 낙조의 곁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릴리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천천히 자신의 힘을 깨달아가는 낙조의 움직임에 릴리는 다급해졌을 테다. 자신의 진짜 목적인 복수는커녕 알지도 못하는 변종들을 구제해주게 생겼으니.
세성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이가 얼마나 한이 많으면 저승에 갈 생각도 않고, 부모를 찾을 생각도 않고 이곳에 머무르려고 애를 쓰냐고. 켈리의 보고서 안에 쓰인 릴리의 생은 너무나도 불완전했다. 기울어진 계급제 밑에 깔린 가짜 애정을 받으며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던 삶. 그런 릴리의 눈에 낙조의 불우한 과거 같은 것은 조금도 차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비슷한 분노를 항상 품고 있다고 생각해 낙조의 몸에 붙기로 결정한 걸지도 모른다.
처음엔 릴리의 목표처럼 누군가에게 복수하고 싶진 않았다. 그저 얼떨결에 살아남은 상태에서,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들을 지켜내며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미워하는 사람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미워하다 못해 원망하고,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만큼 지긋지긋한 악인은 그 사람 이후론 없길 바랄 뿐이었다.
아마 릴리가 낙조의 몸에서 복수의 가능성을 확신한 건, 붕어섬에서 무흠이 잡혀간 이후일 테다. 의지할 수 있었던 사람을 잃었다는 공포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력감에 중독된 상태였을 때, 릴리는 낙조를 더 깊은 수렁으로 이끌었다. 낙조의 몸 이곳저곳에 퍼진 식물들을 제치고, 자신의 뜻을 낙조가 스스로의 의지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켈리의 보고서를 읽고 난 이후에야 알 수 있었다. 사실 그런 릴리의 참견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누군가를 지켜내고 있지 못했을 거라고. 릴리의 힘은 일행을 구할 때도 발휘됐다. 릴리는 낙조가 우선시하는 사람을 막거나 버리려고 하진 않았다. 방법이 옳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결론적으로 봤을 땐 낙조를 저 밑바닥에서 끌어올려 주었다.
환각처럼 자신에게 가능성을 보여준 릴리와, 참혹한 환각을 일으킨 켈리는 너무나도 달랐다. 낙조는 마치 릴리의 분노가 자신의 몸에 쌓인 것처럼 순간 손끝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고낙조!”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몸이 튀어 나갔다. 낙조는 켈리의 멱살을 세게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놀란 해화가 낙조의 팔을 붙잡았으나 힘을 제어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 어린애가 무서워서 나를 통제하려 했어?”
낙조가 이를 갈며 켈리에게 물었다. 켈리는 꼼짝없이 낙조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 이리저리 뜯겨나가 얇은 뼈만 남은, 낡은 질문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알고 있었지. 내가 오기 전부터, 날 알고 있었고, 릴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고낙조, 힘 좀 풀어. 죽이면 안 돼!”
해화가 낙조에게 매달리면서 외쳤다. 방 밖에 서 있던 간부들은 저마다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틈에 끼어 있던 무흠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무흠의 시야엔 삼승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언제 그녀가 이 상황을 정리하려고 들지, 어떻게 마무리하려고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무기력함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악어와 새에서 너, 나를 이용해서 변종들을 잡아내고 있었겠지. 릴리도 다시 잠재우고! 왜 니가 만들어놓고 또 죽이려 하는 거야, 도대체 왜!”
낙조의 목울대가 쉴 새 없이 꿀렁거렸다. 바짝 돋은 핏줄은 더욱 굵어졌다. 점차 붉어지는 낙조의 얼굴 위로는 오직 분노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해화는 낙조에게 매달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도는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켈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을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 세성을 보니, 그는 해화를 바라본 채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놓으라는 말인가?’
해화가 혼란스러워하며 낙조의 몸에서 손을 떼어 냈다.
“똑바로 얘기해. 숨살이풀 같은 걸 어디서, 어떻게 구했어.”
낙조는 거의 한 손으로 켈리를 허공에 든 채 물었다. 켈리는 숨이 막히는지 간간이 잔기침을 토해냈다. 낙조의 손아귀 안에 잡혀서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목이 조여올 때, 켈리의 시선이 삼승에게 잠깐이라도 닿길 바랐다. 명분이 필요했다. 삼승과 대립하게 된다면, 그녀가 대답할 수 없는 요건이 있어야 했다. 낙조는 켈리의 새파란 눈동자를 집요하게 쳐다보면서, 손에 힘을 주었다. 켈리가 켈록, 하고 얕은 기침을 뱉었다.
“히히……, 큭, 키키킥……, 으히힛…….”
음산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감돌았다. 켈리는 낙조에게 붙잡힌 채 그를 바라보며 웃기 시작했다. 목이 졸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에서, 그녀는 쉴 새 없이 그를 비웃었다. 맹랑하기 짝이 없는 비소에 낙조의 표정이 더욱 거칠게 구겨졌다.
“이 미친년이…….”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귀도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자신의 손을 들어 켈리의 머리채를 잡아 낙조의 손에서 그녀를 빼앗았다. 망설임 없이 침대에 켈리를 내리꽂은 귀도는 그녀의 턱을 억세게 쥐고서 눈을 마주쳤다. 켈리는 갑작스럽게 트인 숨통에 연신 콜록대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 나한테 했던 말 그대로 말해.”
“흐흐흐……, 내가, 내가 왜?”
켈리는 잇몸을 드러내며 낄낄 웃었다. 귀도는 켈리의 엉킨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 상체를 세워 삼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세성의 뒤에 서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켈리를 바라보는 눈빛엔 연민도, 하다못해 분노도 얹어져 있지 않았다.
“삼승님.”
“…….”
“제가 직접 말씀드려요? 얘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귀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까맣고 긴 머리카락은 큰 움직임에 휘둘려 풀어 헤쳐져 있었다. 삼승은 귀도의 말에 시선을 잠깐 옮겼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최 저 머리에 무슨 생각이 든 건지, 그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서 그저 방관자의 태도를 고집했다.
“끝까지 그러실 거예요? 끝까지, 그렇게 비겁하실 거예요?!”
귀도가 악을 지르듯 소리쳤다. 방안을 지켜보던 간부들의 수군거림이 일순간 정적에 먹혔다. 귀도가 그만큼 큰소리를 내는 걸 지금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항상 구겨진 표정만 봐오던 간부들의 시야엔 귀도의 감정 표현이 더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켈리를 여러 갈래로 찢어 죽일 것 같은 살기가 방 밖에서도 느껴졌다.
“다들 잘 들어! 이 년이 무슨 말을 했는지, 삼승님이랑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다 말할 테니까!”
눈이 넘어갈 정도로 열 받은 귀도가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며 켈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서 자신을 구경하는 듯한 간부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모두 숨죽인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귀도.”
삼승이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세성의 뒤에서 앞으로 나오며, 삼승은 눈물 고인 눈으로 귀도에게 다가갔다. 귀도는 목이 쉬어라 외친 탓에 벅찬 숨을 내쉬면서 삼승을 노려보았다.
“내가 말하마.”
“…….”
“내가 말하면 되지 않니.”
“…….”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삼승은 손을 들어 귀도의 볼을 매만지며 속삭였다. 어여쁜 자식을 쓰다듬는 듯한 손길이었다. 귀도는 그 손길에 흔들리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삼승은 귀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방 밖에 서 있는 간부들과 마주 섰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 켈리가 서천꽃밭에서 나가기 전부터 얘기를 해야 하나. 어느 날, 켈리가 나한테 그러더군. 사람의 장기기관마다 필요한 영양분이나 활동을 뒷받침해주는 식물을 찾아 심어보는 게 어떻냐고. 나름 신기한 발상이긴 했지만……, 필요 이상의 시간이 쓰일 것 같아 거절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켈리가 서천에서 나간 거다. 한 마디로, 켈리는 ‘인체 개조’를 목표로 하고 식물을 공부한 거지.”
서천을 나가기 전의 이야기는 오래된 간부가 아니라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파악할 수 없다. 낙조는 자신의 앞에 서서 간부들에게 얘기하는 삼승의 머리를 가만히 주시했다. 마음 놓을 틈이 없었다. 속을 읽으려 하면, 당장이라도 삼승이 뒤돌아 자신에게 살기가 잔뜩 번진 눈을 부라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인체 개조라는 건 우리에게 맞지 않는 말이다. 나는 이걸 ‘진화’라고 생각했지. 인간은 시기를 거치며 퇴화하고, 진화했어. 쓰지 않는 것은 사라지고 환경에 버틸 수 있는 기관이 자라나지. 켈리가 서천을 떠난 이후로도 나는 자주 그 주장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서천꽃밭은 한정된 약초와 독초를 재배하고 있지. 그리고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을 선택하여 살려주고 있었어. 그만큼 귀한 일을 하는 곳에서, 정말 진화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절대 아니지. 삶의 재생은 우리가 먼저 타인을 선택해주고 있었어. 그럼 진화가 시작된다면, 그 진화의 혜택을 누가 먼저 누릴 수 있을까?”
‘아니야, 아니야…….’
망설이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삼승의 뒷모습을 보면서, 낙조는 어디선가 몰려오는 불안한 기운을 느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간부들 틈에 서 있는 무흠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불안한 시선으로 낙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해화와 세성, 귀도를 차례로 살폈다. 그들 모두 긴장에 모두 움츠리고 있었다.
“이번 진화는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재생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숨살이풀, 피살이풀, 살살이풀은 다음 삼승이 나타날 때까지 내 피가 허락하는 정도만 재배될 테니까. 살아남거나 식물에게 선택받은 이를 진화의 시작이라고 여기자고 생각했지. 그리고 그 선택권은 나에게 있음을 확신한다. 내 피로써 자랄 수 있는 생명들이니. 켈리와 내 생각이 처음부터 맞았던 건 아니었지만……, 결국은 같은 선택을 하게 되었어.”
귀도가 물었던 켈리와의 이야기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지만, 삼승의 속내가 점점 드러나는 듯했다. 그 형체는 속이 새카맣게 물들고 딱딱한 갑옷을 입은 괴생명체 같았다. 삼승이 이 순간을 넘기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상황이 자세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삼승을 바라보는 간부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낙조는 빠르게 간부들의 표정을 훑었다.
딱 반으로 나뉜다. 켈리처럼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자와, 겁에 질린 얼굴들. 이미 삼승의 계획을 알고 따르는 자들과 아닌 자들이다.
낙조는 그제야 삼승의 머리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속에 정말 진심이란 게 깃들어 있긴 한 건지, 위험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뛰어들었다.
―고낙조……, 기어코 내 속을 긁는구나. 여러 번의 기회를 줬건만.
낙조의 몸이 주춤거렸다. 생각을 읽으려고 하는 순간, 삼승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삼승의 마음에 침투한 낙조의 귓속에 간사한 말을 흘려보냈다.
―넌 우리가 기다리고 찾던 존재다. 세계수와 같지. 부활을 여러 번 증명해냈으니까. 치명상을 당할 때마다 너는 겨우 살아난 게 아니야. 죽었다가 살아난 거지. 그렇게, 몇 번이고 다시 심장이 멈췄다가 뛰는 거라고.
‘아니야.’
낙조는 고개를 저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켈리가 누워 있는 침대에 몸이 걸려 옆으로 쓰러졌다. 해화가 놀라 낙조를 붙잡았다. 그때 켈리가 깔깔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진화가 시작되려면, 한 시대가 저물어야 하지. 인간의 시대를 끝내는 게 목표였다. 모든 게 사라진 이후 우리의 심장을 다시 뛰게끔 만들려고 했지.”
삼승이 남은 말을 마저 내뱉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히죽거리던 간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낙조가 방 안에서 휘청거리며 쓰러진 걸 본 무흠은 당장이라도 간부들을 뚫고 나가고 싶었으나 이목을 끌 수 없어 제자리만 지켜야 할 뿐이었다.
“세계수는 도망갈 수 없어. 뿌리가 이곳에 박혔으니.”
삼승은 쓰러진 낙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쌀쌀맞은 시선이 낙조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환청처럼 삼승의 목소리가 낙조의 주위를 맴돌았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귀도가 삼승에게 달려들었다.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새카맣고, 큰 눈동자가 번쩍거렸다. 그녀는 삼승의 목을 조르며 품에서 단도를 꺼내 허공으로 치켜세웠다.
간부들의 비명이 방 안을 휩쓸었다. 낙조 위로 두 명의 그림자가 겹쳐 얹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