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결단
어느 누군가에겐 위태로웠고, 다른 누군가에겐 평화로웠던 하루가 지났다. 세성의 말을 들은 낙조를 비롯한 일행은 방에 틀어박혀 복도를 거니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 서로에게 할 말이 있을 때면 몰래 나와 상대의 방문 밑 틈새에 쪽지를 밀어 넣었다.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일찍 일어나 있던 낙조가 세성이나 무흠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조금 급한 발소리가 복도 끝에서 몰려오더니 이내 낙조의 방문을 두드렸다.
“고낙조. 나와.”
무흠의 목소리였다. 낙조는 기다렸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무흠의 얼굴 위로는 한 마디로는 설명하지 못할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고서 한숨을 내쉬었다가, 작은 목소리로 낙조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삼승님이 켈리와는 접점이 절대 없다며 지금 켈리를 깨운다고 하셨다. 나와 세성님도 함께 갈 테니까 너와 홍해화만 같이 가는 거다. 알겠나?”
“……네.”
말을 마친 무흠은 해화와 지운의 방으로 찾아가 같은 말을 하고서 해화를 데리고 나왔다. 해화는 낙조를 한 번 힐끗 바라보고선 고개를 돌렸다. 말하지 않아도 무흠의 얼굴을 보아하니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전날, 세성이 자신들에게 했던 말도 떠올렸다.
‘켈리의 심복 중 하나가 삼승일 수 있다…….’
겉으로 읽기엔 말도 안 되는 문장이었으나, 지금까지 켈리를 죽이지 않고 방치해 두는 삼승의 태도엔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녀의 명예욕이라거나 귀도의 친조부를 향한 마음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녀가 잃을 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무흠은 다른 이들에게 방에서 나오지 말고 문고리를 걸어 잠그라고 얘기하고선 낙조와 해화를 데리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낙조는 왠지 뱀이 몸을 타고 기어오르는 서늘함에 주먹을 꽉 쥐었다. 간부들의 복도를 지나치면서, 해화가 낙조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뭘.”
“삼승님이 켈리와 한배를 탔다는 거.”
“가능성은 있다고 봐. 뭐든.”
“널 살린 이유도, 그럼 켈리의 목적과 비슷하겠네.”
“다를 수도 있지. 켈리는 나를 무기로 쓰길 원했고, 삼승은 서천을 지켜내는 데에 사용하려 했으니까.”
해화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켈리가 방치된 방문 앞에 도착했다. 무흠은 이제부터 조용히 하라는 듯 해화와 낙조를 잠깐 바라보았다가 한숨을 내쉰 후 문을 열었다. 안엔 이미 여러 간부들과 세성, 귀도가 줄지어 서 있었다. 삼승은 보이지 않았다. 낙조와 해화가 줄 맨 끝에 무흠과 서자, 한 간부가 낙조와 해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은 왜 온 건가?”
“이제 서천의 일을 하는 자들이니 당연히 와야지.”
무흠이 대답하기도 전에 세성이 말을 가로챘다. 능력을 잃긴 했어도 지위를 빼앗긴 건 아니니, 감히 세성의 말에 반발할 수는 없었다. 둘을 지적한 간부는 혀를 쯔, 차며 고개를 돌렸다.
‘간부들끼리 사이도……, 그리 좋진 못한 것 같은데.’
꽃감관과 꽃성인에 대한 일을 밝힐 때에도 느꼈던 점이었다. 그들은 어쩐지 무리를 반으로 나누어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듯했다. 각각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서로를 가증스러워하고 서로의 탓을 하는 등 조그마한 일이 터져도 무기를 들고 싸울 것처럼 으르렁댔다.
귀도는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세성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읽기 힘든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머리카락은 꼭 낙조가 바닷속에서 쥐었던 해초를 떠올리게 했다. 낙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함부로 마음을 읽었다간 도둑질을 하는 것처럼 죄책감이 몰려올 것만 같았다. 삼승을 가장 따랐다고 한 인물이니 지금 가장 마음속이 궁금한 인물이었으나 도저히 지금 상태론 그녀의 속을 꿰뚫을 수 없었다.
간부들끼리의 수근거림이 조금 커져 갈 즈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상한 얼굴을 한 삼승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양쪽으로 줄지어 선 간부들을 바라보다가 낙조와 눈이 마주치더니,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세성의 능력을 정말 고스란히 받았다고 할 수 있는 낙조이기에 거짓말을 했다간 쉽게 피해 갈 수 없을 거란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낙조에 이어 무흠을 바라보았다. 낙조를 데리고 온 게 분명한 사람을 원망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오늘 이렇게 모두를 부른 이유는, 이미 말했듯……, 이상한 소문이 더 이상 커지는 걸 막기 위함이네.”
삼승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곤 잠시 뜸을 들이더니, 켈리가 꼼짝도 못하고 있는 방문을 힐끔 바라보았다.
“괜히 주동자의 입을 열어 서천을 소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이란 걸 알아주면 좋겠어. 켈리가 입을 열면 더욱 혼란스러워질 테니까.”
“귀도님이 데리고 오자마자 심문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결정을 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간부 중 하나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그는 결연한 눈빛으로 삼승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삼승은 조금 가빠진 호흡을 간신히 붙잡고 입을 닫았다. 자신을 포장하려는 듯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간부의 말에 도망칠 틈도 만들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낙조는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닫힌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삼승은 주머니에서 녹이 슨 열쇠를 꺼내더니 열쇠 구멍에 맞추어 문고리를 돌렸다.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는 비에 젖은 흙냄새였다. 삼승은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고민하더니, 등을 돌려 말했다.
“세성, 귀도, 그리고 환인만 들어오게.”
“삼승님!”
“문은 열어놓겠네. 다만 방이 작으니 모두가 들어올 수는 없을 거야. 가까이서 지켜봐야 할 사람만 부른 거니 걱정 말게.”
그녀의 말에 간부들은 한숨을 쉬거나 얼굴을 찌푸리긴 했어도 반발하진 않았다. 무흠이 낙조의 등을 가볍게 쳤다. 낙조가 앞으로 나가설 때, 그는 목덜미에 대고 속삭였다.
“무슨 말을 하든 휘둘리지 마.”
낙조는 고개를 끄덕이곤 간부들의 시선이 온통 켈리의 방에 쏠려 있는 틈을 타 해화의 손목을 붙잡고 빠른 걸음으로 방에 들어갔다. 해화는 조금 놀란 듯 숨을 급히 삼켰다. 삼승은 해화를 보고서 몸을 주춤거렸으나 굳이 낙조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침대 위에 누운 켈리는 송장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감히 손대기도 무서울 정도로, 그녀에게선 음산한 기운이 풍겨 나왔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보단 훨씬 깨끗한 모습이긴 했으나, 언제 그 새파란 눈을 뜨고 자신에게 달려들지 알 수 없었다. 낙조에 비해 해화는 무덤덤했다. 그녀는 켈리에게 가까이 다가가 이곳저곳을 살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삼승은 미리 준비해둔 약을 세성에게 건넸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세성은 두 손으로 약을 받아들고서 켈리의 턱을 벌려 입술 틈새로 약을 집어넣었다.
‘굳었던 근육을 풀어주는 건가. 아니면 잠에서 깨우는 건가…….’
서천의 약초에 대해 아는 게 몇 개 없다 보니 추측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조금 끈적이는 액체가 켈리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세성은 빈 통을 테이블에 놓아두며 말했다.
“계속 잠들게만 두셨군요.”
“…….”
“귀도에게서 입은 상처는 모두 나았고요.”
그는 켈리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말을 덧붙였다. 삼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낙조는 세성이 살피는 곳을 따라 유심히 눈을 굴렸다. 그의 말대로 켈리의 피부엔 이목을 이끌 만한 상흔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않고서 자리를 지키는 삼승은 무슨 꿍꿍이인지 세성의 말에 반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았다.
“삼승님.”
켈리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도중, 귀도가 삼승을 불렀다. 그녀는 묽은 목소리로 삼승에게 말했다. 귀도를 바라보는 삼승의 시선도 많이 탁해져 있었다.
“켈리의 입이 아닌, 삼승님 입으로 듣고 싶습니다.”
“……무얼.”
“정말, 저에게도 알리지 않으시고, 켈리와 비슷한 꿈을 꾸셨어요?”
항상 무표정만을 유지하던 귀도는 온갖 서러운 감정을 내비치며 물었다. 그럼에도 삼승은 묵묵히 침묵할 뿐이었다. 그녀는 아예 귀도를 바라보지 않고 켈리에게 눈을 두고 있었다.
“일어났나 봅니다.”
세성이 무거운 침묵을 찢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켈리는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새파란 눈동자를 드러냈다. 켈리의 머리맡에 서 있던 귀도는 무릎을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아, 으어, 어…….”
아직 모든 감각이 깨어나진 않았는지 귀도와 눈이 마주친 켈리는 온몸을 떨면서 기괴한 소리를 내질렀다. 미처 만들어지지 못한 비명이 새어나간 것처럼 들렸다. 침을 질질 흘리며 삐걱대는 몸을, 아무도 잡아주지 않았다. 침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켈리의 몸은 눈으로 보기에도 심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말을 못 할 것 같은데.”
귀도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켈리의 시선은 오직 귀도에게만 가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않고서 이불자락을 아이처럼 입에 물고 딸꾹질까지 했다. 세성은 한 발자국 물러나 켈리를 바라보는 삼승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짙은 어둠을 모두 끌고 온 듯 참혹하게 가라앉은 얼굴은 삼승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모두 잠깐 나가 있어 주겠니.”
덜덜 떠는 켈리의 뒤로 다가선 삼승이 말했다. 귀도는 바짝 독이 오른 얼굴로 삼승을 응시하다가 가장 먼저 방을 나갔다. 모든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간부들을 헤치고 나간 귀도는 복도 벽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어떤 관계이기에 저런 얼굴로, 저런 눈을 하고서, 저렇게 안달을 낼까. 귀도는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무언가를 부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여 머리를 쥐어뜯었다.
“……고낙조.”
“네.”
“준비해라.”
낙조와 해화도 제자리로 돌아오자, 무흠이 다른 간부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자세한 설명 없이 지시한 탓에 낙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흠은 낙조의 어깨를 감싸고서 허리를 살짝 숙인 후 말을 덧붙였다.
“삼승님은 네 약점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네가 힘을 못 쓰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오로지 네 힘만으로 싸워야 할 수 있어.”
“……그게 무슨…….”
“변할 수 있는 두 손으로는 삼승님과 대적할 수 없다는 말이다.”
“…….”
“지금 삼승님은……, 때를 노리고 있는 거다. 여기서 삼승님을 따를 이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나도 몰라. 그러니 일이 벌어진다 싶으면, 홍해화, 네가 남은 애들을 데리고 위로 먼저 올라가 있어.”
무흠은 주위를 살피며 말을 마친 후 아무 일도 없던 척 허리를 폈다. 그리곤 방 안에 선 삼승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세성이 다시 귀도와 낙조, 해화를 불렀다. 귀도는 가장 맨 마지막으로 방에 들어왔다. 켈리는 귀도를 다시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으나 침을 흘릴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덜덜 떠는 몸으로 귀도를 응시하면서, 이불을 꽉 쥐었다.
“뭐부터 물어보고 싶니.”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사이, 삼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흩뿌린 말 같기도 했지만, 그녀의 말은 귀도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귀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허리를 숙여 켈리와 가까이 얼굴을 마주했다. 켈리의 파란 눈동자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흰 피부 위에 진 주름을 바라보면서, 귀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생했어. 그동안 삼승님 말 따르느라.”
귀도가 뱉은 말은 선전포고와 같았다. 삼승은 뒷짐을 진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펼쳐졌는지 모르는 켈리는 귀도의 말에 눈을 굴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켈리의 모습을 보면서, 낙조는 그녀에게 ‘악어와 새’에서 당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울컥, 치솟는 분노를 억지로 삼켜냈다.
“켈리.”
다음으로 입을 연 건 해화였다. 그녀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며 그녀를 불렀다. 사람 다섯에게 둘러싸인 켈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불을 조각보처럼 끌어모으는 것밖에 없었다. 해화는 그리 밝지 않은 목소리로 켈리에게 물었다.
“릴리라는 아이, 기억해요?”
해화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켈리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거스러미가 잔뜩 낀 입술을 움직였다.
“서연우……, 서연우가 만든 보고서를 봤나 보지?”
“기억하나 보네요.”
“그건 가짜야. 그런 시험을 내가 뭐하러 일기처럼 써놨겠어.”
많이 상한 목소리는 켈리의 것이라고 하기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말투도, 해화를 바라보는 표정 모두. 켈리가 그렇게 유지하려 했던 가벼운 품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람이 가진 밑천을 긁고 긁어서, 완벽하게 드러난 바닥을 보는 느낌이었다. 해화는 켈리의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서 말했다.
“고낙조의 팔에 붙은 게, 릴리라는 건 알고 있었죠?”
“…….”
“그 릴리, 이곳에 있어요.”
해화의 단조로운 말에 켈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눈을 멍하니 깜박이다가 낙조를 향해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솔직히 얘기해요. 릴리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
“당신의 진짜 정체가 뭐예요? 서천에서 도망친 건 맞긴 해요?”
해화가 한 수를 꽂았다. 켈리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낙조는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주먹을 꽉 쥐었다. 확실하진 않았으나 무흠이 말한 ‘삼승이 기다리고 있는 때’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낙조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