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176화 (176/202)

176화. 호흡 (2)

당장 눈앞에 놓인 질문을 회피할 순 없었다. 삼승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능력이 있었을 때도 삼승의 마음을 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세성은 삼승과 눈을 마주한 채 머리를 굴렸다. 귀도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싶었으나 그 틈을 꼬집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도 몰랐다.

유현이 보낸 녹음 파일은 사실상 서천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이 녹음 파일을 보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청주에 있는 서천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를 떠보는 건가.’

자신이 가진 충성심을 시험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고유의 능력이 사라졌으니 스스로를 보호할 힘도 같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좋지 않은 결과만 가져올 뿐이었다.

“세성.”

“삼승님.”

세성을 다시 한번 삼성이 부르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세성의 대답을 가로막은 건 귀도였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삼승의 시선을 자신 쪽으로 돌렸다.

“세성은 원래도 그랬지만 과거를 보는 자가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이 상황에 대해 스스로 판단을 해보라는 거다. 다른 의미는 없어.”

“어떤 판단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귀도, 너와 이렇게 피곤한 대화를 하고 싶지 않구나.”

“저희가 무슨 상상을 하는지 삼승님께도 아시잖아요. 어려울 거 없어요, 삼승님.”

귀도는 가지런히 모은 두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서 조목조목 대답했다. 어떻게든 제 위치를 찾으려는 삼승의 표정은 결국 일그러지고 말았다. 귀도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맹렬하게 날이 선 상태였다. 당장 둘밖에 없는 곳에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건 어느 측면으로 봐도 불리했다. 세성은 대화를 저지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도. 넌 무슨 상상을 했니?”

틈을 주지 않았다. 삼승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세성이 움직이자마자 귀도에게 물었다. 귀도는 세성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다시 삼승을 응시했다. 삼승을 바라보는 귀도의 눈빛에선 불안함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뭘 알고 있기에 저렇게 당당하지.’

귀도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은 채 삼승과 대립했다. 그녀의 방에 있는 동안 무엇을 알아낸 건지, 그녀의 시선에선 전처럼 삼승을 향한 빛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무덤덤하고 건조한 눈빛은 삼승이 무얼 얘기하든 흔들리지 않을 것을 얘기하는 듯했다.

“먼저 대답하지 않으시겠다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래.”

귀도를 보는 삼승의 시선도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서로를 그렇게나 아끼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도대체 귀도는 무엇을 보았길래, 들었길래 단숨에 삼승에게서 거리를 두었을까. 삼승은 귀도에게서 무엇을 느꼈길래 저렇게나 그녀를 경계할까. 세성은 우두커니 앉아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둘을 지켜보았다.

“전 질문부터 하려구요. 기억하세요? 제게 처음으로 켈리가 머무는 위치를 알려주시면서, 겁만 잔뜩 주고 오라고 하셨을 때요. 켈리가 숨겨둔 서천 안의 첩자들의 피를 모두 빼낸 후였을 거예요.”

“…….”

“그때도 그러셨고, 청주에 저를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 있죠. 켈리는 죽이지 말라고. 삼승님께서 알아서 하신다고. 청주에 간 이후에도 내내 그러셨어요. 연락 약속을 자주 어기셨고 서연우와 켈리를 캐내는 계획을 자주 바꾸셨습니다. 특히, 켈리가 영악하게 움직일 때도 죽이지는 말라고 하셨어요.”

“그게 의심된다는 거니?”

“질문은 지금부터예요, 삼승님. 아까 들은 대화 내용과, 켈리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서로 관련이 있나요?”

순간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세성은 자신의 숨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문 채 삼승의 대답을 기다렸다. 삼승의 눈빛 안은 안개가 뿌옇게 차오른 것처럼 갑갑해 보였다. 태풍이 한껏 속을 뒤집어 놓고 간 듯 황망한 시선에 오히려 세성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귀도, 그게 무슨 말이니.”

“…….”

“왜 그렇게 생각했지? 응?”

삼승은 전보다 간절해진 목소리로 귀도를 재촉했다. 귀도 또한 순식간에 무너지는 삼승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쓰이는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완전히 삼승을 등진 게 아니라 거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속아 헷갈릴 수도 있다. 세성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켈리에게……, 삼승님의 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서요.”

귀도의 대답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덧붙여 조금은 처량했다. 삼승만을 따랐고 충성을 바쳤던 귀도였기에, 그녀가 삼승에게 직접 내놓은 생각은 그녀에게도 무거운 짐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다.

“그런 자에게 삼승님과 똑같은 피가 흐를 리 없어요.”

“……당연하지. 귀도, 넌 나를 잘 알잖아. 누구보다 잘 알잖니.”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더 이상하다는 거예요, 삼승님. 어째서 켈리를 죽이지 않으셨어요? 왜 켈리의 손에 서천에서만 나는 그 귀한 약초들이 있던 걸까요?”

귀도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속에 감춰두었던 말을 하나씩 꺼내는 듯, 소리도 점차 커져만 갔다. 삼승은 귀도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게 해서든 귀도의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어 하는 듯 보였으나 유현이 보낸 녹음 파일을 부정하기 위해선 귀도의 눈앞에서 보여주어야 했다. 켈리와 자신은 절대로 연결돼있지 않다는 것을. 귀도에게 그것은 켈리의 죽음이라는 것도, 삼승은 알고 있을 테다.

“그게 진짜라고 생각하는 거니?”

삼승이 대화의 흐름을 비튼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슬며시 손을 뻗어 귀도의 손등을 덮고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살살이풀, 숨살이풀, 피살이풀……. 세 가지 약초 모두 훔치려는 자들이 많았다는 건 너도 알잖니. 우리는 기꺼이 다른 이들도 약초들을 재배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했어. 하지만 ‘삼승’의 피 없이는 완벽하게 자라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지. 그래서 무슨 일들이 일어났니. 여기저기서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효과를 내게 하는 식물들을 새로 만들어냈지. 켈리도 그런 이들과 다를 바 없는 거야. 켈리는 서천꽃밭에서도 권력에 대한 욕심과 야망이 엄청난 여자였다. 자신이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해 직접 제 발로 나간 사람이야. 그러니 밖에서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았겠어? 응? 귀도.”

세성은 귀도에게 절절 매달리며 말하는 삼승을 지켜보았다. 항상 중심을 잃지 않고 뻣뻣하게 서서, 부드러운 손길을 건네주던 삼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제력을 잃고 감정에 치우쳐져 순간적인 상황만 넘어가려 하는, 불길한 기운의 거짓말쟁이 그림자가 삼승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귀도는 한참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가 자신의 손등을 덮은 삼승의 손을 뿌리쳤다. 다시 허겁지겁 자신의 손을 쥐려 하는 삼승을 아예 밀쳐내고서, 귀도는 속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분노를 뱉어냈다.

“삼승님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어요. 당연히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청주에서 켈리를 데리고 이곳에 올 때까지,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저는 끝까지 삼승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제가 할 수 있을 만큼요.”

“알아, 안다. 네가 언제 내 말을 거역한 적이 있었니.”

“아시면서 왜 아직도 변명하세요.”

귀도가 헛웃음을 치면서 중얼거렸다. 그녀의 두 눈가엔 눈물이 가득 차올랐으나 용케 흘러내리진 않았다. 그녀는 불안정하게 흩어지려는 숨을 붙잡고 아무 말도 못하는 삼승에게 못 박았다.

“왜 켈리를 아직도 깨우지 않으시냐구요. 언제까지 저 상태로 놔두려구요? 애초에 제가 켈리를 이곳에 데려왔을 때부터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 못 하신 거예요? 지금쯤이면 간부들도 다 알 겁니다. 삼승님이 일부러 켈리를 깨우지 않고 있다는 걸.”

“…….”

“삼승님의 마지막 명령은 따르겠습니다. 제가 직접 죽이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대로 놔두지도 않을 겁니다. 항상 평화롭고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고 하셨죠. 더 이상 서천은 그럴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귀도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성도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를 따라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을 때까지 삼승은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텅 빈 복도에 나란히 선 세성과 귀도는 꽉 막혔던 날숨을 한숨과 함께 뱉어냈다.

“뭘 본 거야.”

세성은 먼저 앞서가며 귀도에게 물었다. 처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귀도는 조용히 세성의 뒤를 따르며 대답했다.

“들었어. 켈리를 이곳으로 데려올 때……, 켈리 그 여자가 다 얘기했거든. 살려 달라면서.”

“……믿을 만 했어?”

“당연히 안 믿었지.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켈리가 귀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지금 캐내려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지금 서천에 있는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세성은 그녀를 굳이 독촉하지 않고 그녀가 가는 길 반대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그래도 의리는 꽤 오래 지켰어. 대단해.”

“…….”

“힘없는 늙은이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겠지만, 끝까지 귀도 자네 옆에 서겠네.”

세성은 말을 마친 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귀도와 헤어진 후 세성이 찾아간 곳은 낙조의 방이었다. 당연히 방에 틀어박혀 있을 줄 알았다. 불 꺼진, 텅 빈 방을 둘러보며 세성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딜 기어나갔나.”

다른 이들의 방에서도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보니 한 곳에 모여 있는 게 분명했다. 세성은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오르며 천천히 걸었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섞여 들리지는 않는지, 아주 작은 소음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쫑긋거렸다.

두 번의 기둥을 지나 회복실 근처에 다다랐을 즘이었다. 무흠이 데려온 아이에게 내어준 방에서 여기저기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성은 무표정으로 문 앞에 서서 뒷짐을 진 채 가만히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고낙조랑 백무흠이 일단 다 쓸어놨다는 거 아니야.”

“안전지대라는 건 확실한데, 누나?”

“근데 홍해화가 구원인가 구제인가 했다던 그건 뭔데? 그게 고낙조를 공격했다며.”

“그거는 제가 너무…….”

옳거니. 세성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어찌나 맹랑한지, 문을 잠그지도 않고 어두운 방 안에서, 모니터 앞에 속속들이 모여앉은 모습이 보였다. 환한 복도 불빛을 등지고 나타난 세성의 얼굴에, 모두가 입을 다물고서 몸을 굳혔다. 세성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다들 긴장이 풀렸나 봐? 나 잡아가라는 식으로 떠들어대고 있네.”

“세성님, 그게…….”

“뭘 얘기하려고? 다 듣고 들어온 거야.”

“그러니까 저희는 계획이란 걸 짜보려고……, 저번에 세성님께도 말씀드린 계획 있잖아요.”

“그 첫 번째 계획은 고낙조 너랑 장승이 다녀오지 않았나?”

세성은 모르는 척 빈 의자에 앉고서 다리를 꼬았다. 창백해진 얼굴로 낙조가 옹알이처럼 어버버 수습을 하려 했으나 그 정도로 넘어가 줄 세성이 아니었다. 일행 중에서 가장 놀란 이는 무흠이었다. 세성이 능력을 잃은 후 삼승이 멀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자신들의 편에 완전히 서는지는 확신이 없었기에 이 상황을 들킨 것 자체가 무흠에겐 반역의 증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낙조의 소득 없는 변명을 듣고 있던 무흠은 자리에서 일어나 낙조를 옆으로 밀치고서 세성의 앞에 섰다. 조금 긴장한 무흠의 얼굴을 보니 웃음이 돌았다. 세성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은 채 무흠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

“…….”

“…….”

“말 안 할 건가, 장승?”

“지금 저희 놀리시는 거 다 압니다.”

“놀린다고? 내가 뭘?”

“세성님.”

“뭐……, 놀란 얼굴들 보는 거야 언제나 재미있지.”

세성은 이리저리 잘도 빠져나갔다. 무흠은 주먹을 꽉 쥔 채 머리를 굴리다가 세성이 팔을 잡아채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장승, 우리가 움직일 때가 왔다.”

세성은 언제 웃었냐는 듯 무미건조한 얼굴로 무흠에게 속삭였다. 곁에 있는 낙조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무흠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고 다시 허리를 편 채 섰다. 다음으로 세성이 잡은 사람은 낙조였다. 그는 낙조를 자신의 앞으로 끌고 온 후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리곤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남은 일행들에게 말했다.

“다들 지금부턴 다 함께 모이는 일은 자제하도록 해. 특히 간부들에게 들키면 곤란해지니까.”

“…….”

“그리고 고낙조, 너는 이제부터 삼승님과 단둘이서 만나는 자리는 무조건 피해라. 무슨 이유이건 간에 삼승님이 너를 부르면 절대로 답하지 마.”

“……세성님 무슨 일……, 있었습니까?”

낙조가 세성에게 붙들린 채 물었다. 조금의 때도 끼지 않은 질문에 세성은 잠시 멈칫거렸다. 호흡을 한 번 다진 그는 어설프게 웃고서 말을 이었다.

“켈리가 심어둔 내부자가 삼승님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모두 언제든 나갈 준비 하고서 숨소리도 나가지 않게 조용히 있어. 켈리를 최대한 빨리 깨워야 하니까.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는 각자 판단해라. 그 정도 나이는 먹었잖아, 다들. 그러니까……, 이렇게 티 나게 모여 있지 마.”

세성은 잔소리를 하듯 말을 늘어놓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끝맺었다. 내부자가 삼승이라는 얘기에 모두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당장은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반응을 알고 얘기했지만 막상 자신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사실을 타인에게 전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세성은 멍하니 서 있는 낙조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방을 나갔다. 고요한 복도가, 오늘따라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