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생초-175화 (175/202)

175화. 호흡 (1)

해화와 지운의 방엔 아무도 없었다. 낙조는 몇 번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다가 문을 닫고 나왔다. 있을 법한 곳은 모두 다녀오는 길이었다.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한 번이라도 마주쳐야 하는 게 맞았다. 낙조 뒤에 서 있던 밤이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삐졌다고 티 내는 거 아니야?”

“나이가 몇 갠데……, 먼저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겠죠.”

“원래 나이 먹을수록 이런 거에 더 예민해지는 사람들이 있단다.”

밤이는 뻐근한 몸을 쭉 펴면서 쏟아지려는 하품을 참아냈다. 무흠과 수호는 남은 켈리의 문서를 확인하기 위해 낙조와 갈라졌다. 이후 해화와 지운을 찾아 지금까지의 일들을 얘기해주려 했던 계획은 무산되기 직전이었다. 낙조는 복도를 꺾으면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본 게 있는데요.”

“응.”

“그……, 이번에 밖에 나갔을 때 사용한 독초의 즙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있는데요. 그 독초를……, 제 몸에 심어보는 건 어때요?”

“그걸 진심으로 묻는 거야 아니면 이 망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그러는 거야?”

“당연히……, 진심이죠?”

“미친놈……. 네 몸 곳곳에 식물이 달라붙었다고 해서 독에 감염되지 않는다는 확률이 있어?”

밤이는 걸음을 멈추고 서서 낙조를 바라보았다. 짜증이 많이 섞인 표정에 낙조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녀는 그새를 놓치지 않고 낙조에게 쏘아붙였다.

“넌 로봇이 아니야. 원하는 위치의 부품을 업그레이드하거나 쉽게 변형시킬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하는 말은 아니에요. 청주로 올라갈 때를 대비하자는 거죠. 세성님에게 자문도 구해보고―”

“―그러니까 그 계획이라는 게 왜 그딴 식이냐고.”

밤이가 말을 잘라먹으며 울컥 솟는 화를 참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밤이의 시선에서 봤을 땐 자신이 맹목적으로 희생을 자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낙조는 어떻게 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자신의 의견을 웬만해서 무시하지는 않지만, 밤이라는 사람을 설득시키는 건 생각보다 꽤 힘든 일이었다.

자신감이 있었다.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 몸, 모든 기관에 붙은 기생식물. 그것만 보더라도 자신이 생각해낸 계획은 그럴싸했다. 세성의 앞에서 고백한 사악한 용기와는 다른 부분이었다. 어쩐지 시간이 갈수록 표정이 어두워지는 밤이 앞에서,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잡았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폴짝 뛰어나오더니 낙조의 팔을 붙잡았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목소리의 주인이 낙조를 끌어당겼다.

“어, 홍지운.”

“내가, 어? 서운해서, 어? 둘이서만 또 얘기하는 거 잡았지. 왜 우리한테는 안 알려주고. 언제부터 팀 나뉜 거야? 어?”

“무슨 그런……, 아니야. 방금도 너희 찾다가 돌아가는 중이었어.”

“응, 우리 찾는 거 봤어. 그래서 맘이 쪼끔 풀린 거야. 우리가 먼저 말 걸어주는 거다.”

“……어, 그래. 미안하다.”

낙조는 쫑알거리는 지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조금 전의 대화 내용을 듣진 못한 듯했다. 지운의 뒤에 서 있던 해화 역시 표정이 좋진 않았다. 그녀는 낙조 대신 밤이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계획이라는 게 뭔데요?”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어.”

“안 알려줄 거예요?”

“너네 진짜 삐졌냐? 한 곳에 똘똘 뭉쳐 있으면 의심 살까 봐 시간을 좀 둔 거야.”

“홍지운만 삐졌었죠.”

해화가 지운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밤이는 골이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더니 앓는 소리를 내면서 뒤돌아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보내면 망하는 건데?’

낙조는 팔에 매달리다시피 한 지운을 억지로 끌며 밤이의 뒤를 쫓았다. 목적지는 수호의 방이었다. 그 누구도 쉽게 의심하지 않고, 자주 찾지 않는 사람. 호랑이 굴 속 은거지로 쓰기 딱 좋은 곳이었다.

낙조는 자신이 그런 계획을 세우게 된 계기도 꺼내기 전에 묵살 당할까 싶은 걱정에 잠겼다. 밤이의 감정은 뒷모습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피곤한 기색으로, 그러나 당찬 걸음으로 걷는 걸 보면 무흠에게 고자질이라도 하려는 게 틀림없었다.

“아오, 홍지운 좀!”

“왜. 그래도 애타게 찾아주니까 기분 풀린다.”

“떨어져 봐. 무거워 새끼야, 제발.”

“한 손으로 가볍게 들 수 있으면서 무겁대. 아저씨 엄살 오진다.”

“하…….”

당최 닫힐 생각이 없는 지운의 입에 낙조의 속은 새카매져 갔다. 밤이의 뒤를 따르던 해화는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 아무 말 않고서 조용하게 복도를 걸었다.

*

“청주로 올라갈 때를 생각해야 한다는 거예요. 시간도 없는데 그 많은 물이 모일 때까지 언제 기다려요. 그 시간에 내 몸에 맞춰서 주입을 하는 게 낫다는 거죠. 여기보다 몇십 배는 많을 텐데, 변이 식물 같은 경우는 변종보다 빨리 처리해야 해요. 변종도 잡아먹잖아요. 몸 안에 갇힌 혼도 어쩌지 못할 수 있다구요.”

“그래, 니 말 알겠고 다 이해한다고. 내 말은 이거잖아. 너가 말한 그 ‘짧은 시간’에 네 몸에 맞춰서 그 독초를 디자인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서천 사람들은 그걸 냉큼 받아들이고? 우리끼리 나온 의견을 그쪽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까? 또, 몰래 한다고 쳐. 그럼 어디서 할 건데. 밖에 실험할 장소라도 있냐고.”

수호의 방에 들어와서도 언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처음엔 집중해서 듣고 있던 수호는 등을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고, 이 둘의 대화에 남은 관람객은 무흠 한 명뿐이었다. 해화와 지운은 수호가 알려주는 켈리, 릴리 등 중요한 정보에 대해 듣고 있었다.

“직접 네가 나서서 몸에 독초를 심는다고 하면, 서천은 오히려 좋아할 수도 있다.”

“뭔 소리래 이 아저씨가.”

“다만 고낙조가 원하는 독초가 아닌, 서천이 원하는 식물을 넣겠지.”

한 마디도 없던 무흠이 나서서 말을 거들었다. 그의 말은 너무나도 무겁고 선명했다. 밤이와 낙조의 입이 모두 한꺼번에 다물렸다. 그는 깊게 생각을 하는 듯싶더니 낙조를 바라보며 말했다.

“좋은 계획일 수는 있겠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날이 따뜻해지기 전까지는 그래도 돌아다닐 만 하니까.”

“……중사님도 그럼 반대예요?”

“반대라기보다 중립에 가깝지. 하지만 굳이 고르자면, 송밤이 의견이 더 낫다고 본다.”

“…….”

나가떨어진 밤송이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낙조는 덩그러니 남아서 자신의 의견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생각했다. 너무 도전적이고 모험적이었나? 또 세성님 앞에서 속죄를 해야 할까? 섣부른 판단이었나? 머릿속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생각이 제자리에서 핑핑 돌았다.

“야.”

그런 낙조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을 때, 밤이가 낙조를 거친 어투로 불렀다. 마음이 상한 것이 남아 있어 낙조는 대답 없이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너 너무 충동적으로 움직여. 계획도 즉흥적으로 짜고. 낭만 있어서 좋긴 한데, 주위 좀 둘러보면서 해라. 너만 위험한 거 아니니까.”

밤이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지러웠던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이 움직임을 멈추는 듯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낙조는 자리에 서서 가만히 눈만 깜박거렸다. 밤이는 더 말하지 않고 스크린 앞에 모여든 일행에게로 몸을 돌렸다.

‘잘하려고 한 건데.’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기운이 손끝으로 싹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낙조는 떨어뜨린 손을 올려 주먹을 쥐었다.

‘모두가 안전할 수 있는 방법…….’

고개를 들어 스크린 앞에 똘똘 뭉친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들을까 싶어 다들 목소리를 죽인 채 속닥거리는 얼굴들에선 편안함이 느껴졌다. 긴장이 많이 풀린 듯, 모두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가끔 웃기도 하고 우스운 소리를 하기도 했다.

낙조는 그 얼굴들을 모두 주워 담아 눈 안에 넣었다. 그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이 모두가 끝까지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온몸을 타고 퍼져 나갔다.

*

삼승의 왼쪽엔 세성이, 오른쪽엔 귀도가 앉았다. 다른 간부들은 부르지 않았는지 뒤이어 방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세성은 일부러 귀도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숙인 채 삼승이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능력을 잃은 후 삼승이 세성을 찾는 일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귀도가 켈리를 잡아 돌아왔고, 서천 내부에서 첩자 노릇을 하던 이들이 잡혔다. 자신은 가장 중요한 삼승 주변 사람들, 즉 간부들을 주의 깊게 살피지 못했다. 귀도가 없는 사이 삼승을 위험에 처하게 한 것과 다름없었다. 삼승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서럽지도 않았다.

그렇게 죽음이 오기를 기다릴 때였다. 그래도 지위는 박탈당하지 않아, 맡은 일은 소신껏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삼승의 부름에 세성은 올 게 왔구나 싶어 오히려 태연한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삼승은 아무 말 없이 눈이 마주치자 고개만 끄덕였다. 귀도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녀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기묘한 침묵이 지나가고, 삼승이 세성을 향해 말했다.

“청주에서 새로운 정보가 올라왔다고 하는데, 내가 이제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겠어.”

“이해합니다. 꽃감관과 꽃성인의 징계 여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세성이 능력을 잃었다고 해서 그 범상치 않은 기운까지 잃은 건 아니라고 봐. 세성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귀도와 나에게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

“……예.”

세성은 대답을 끝내고 품에서 이전에 보여준 적이 있던 MP3를 꺼냈다. 작은 기계의 전원을 켜고서 정리해둔 폴더에 들어갔다. 폴더 안엔 딱 하나의 녹음 파일이 들어 있었다. 세성은 재생 버튼을 누르고 음량을 최대로 키웠다. 곧 백색소음이 울려 퍼지더니, 유현의 목소리가 기계에서 흘러나왔다.

「성라미 씨, 기분은 어때요?」

「좋아요.」

「네, 좋습니다.」

라미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세성은 잠깐 귀도를 응시했다가 다시 기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라미 씨, 어제 준 글은 잘 읽었어요. 켈리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했더라구요.」

「맞아요. 그분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니까요.」

「음……, 근데 내가 잘 이해가 안 돼서. 사람이 쉽게 죽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그만큼 피를 흘렸으면 과다출혈인데…….」

방에 들어와 라미에게 말을 건네는 이는 연우의 목소리였다. 삼승은 상체를 조금 숙여 귀를 기울였다. 귀도는 정자세로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눈만 깜박이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익숙한 목소리일 것이다.

「아니요, 아니요.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라미 씨가 자세히 설명을 해주면 좋겠어요.」

「켈리……, 그분이 주기적으로 먹는 약이 있어요. 악어와 새에서 많은 점수를 사용하면 그분이 먹는 약을 저희도 먹을 수 있었어요. 아마 그 약 덕분일 거예요. 제가 살아 있는 이유도.」

「그 약이, 라미 씨가 글에 쓴 살살이풀, 숨살이풀, 피살이풀……. 이렇게 세 개로 만든 게 맞아요?」

「그분이 드시는 약은 세 개의 약초가 모두 들어간 거였고……, 저희가 먹는 건 하나만 들어간 거였어요. 그래도 그게 어디예요. 그분이 직접 피를 뽑아 키우신 약초를 먹는 건데…….」

탈칵.

세성이 버튼을 눌러 녹음 파일을 정지시켰다. 질식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정수리부터 조여오는 듯했다.

삼승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가, 상체를 펴고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곤 하하, 하고 작게 웃었다. 귀도는 삼승을 응시한 채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았다. 세성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가 MP3를 도로 자신의 품에 넣었다.

“일이 많이 꼬였구나.”

삼승이 웃음을 단번에 지우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바짝 깎은 손톱을 세워 소파를 긁었다. 평온한 얼굴과는 달리, 손등엔 핏줄이 바짝 올라 있었다.

‘먼저 입을 여는 순간 죽는다.’

세성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선은 바닥에 두고서. 더 이상 귀도를 힐끔거릴 수도 없었다.

서천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 있었다. 살살이풀, 숨살이풀, 피살이풀은 삼승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것. 그렇기에 다른 곳에서 키워 보려고 해도 삼승의 피가 아니면 모두 죽어 정말 귀하다는 것. 그렇기에 녹음본에서 들은 대화 내용은 명백히 작정한 채 삼승을 겨냥한 것과 틀림없었다. 대화 내용이 사실이라면, 삼승은 이미 연이 끊긴 켈리와 연락을 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피를 주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켈리는 서천의 존재는 숨기고서, 자신을 향한 신앙심 비슷한 믿음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그 귀한 약초들을 하나씩 나눠줬다는 것도 사실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걸 차마 입에 담아 삼승에게 직접 올릴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삼승이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 녹음 파일을 보낸 유현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보고서를 썼을까. 세성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던 보고서를 보았다. 청주로 파견된 서천 사람들에겐 소문이 이미 다 퍼졌을지도 모른다.

“세성.”

삼승이 지목한 사람은 세성이 되었다. 세성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들고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단단히 노하셨군.’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시선으로 삼승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성은 어떻게 생각하나?”

마침내 ‘그’ 질문이 세성의 앞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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