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발각 (2)
절대 맞지 않을 것 같았던 조각이 스스로 모양을 바꿔가며 맞춰지기 시작했다.
수호를 먼저 떠나보낸 후 방으로 돌아와 억지로 잠에 들었다. 세 시간쯤 지났을 때 저절로 눈이 떠졌다. 수면 시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다. 짧게 잠들어도 피곤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운이 넘쳤다. 전과 달라진 점을 굳이 꼬집자면 갈증이 자주 난다는 것. 하루에 마시는 물의 양이 몇 배는 늘었다. 다행히 그만큼의 물을 마셔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큰 보틀에 담은 미지근한 물을 마시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다시 잠들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 번 잠에서 깨면 몸이 못 견딜 만큼 피곤하지 않으면 좀처럼 잠들지 못하니까. 그렇다고 두통이 일어난다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아니라서 신경 쓰지 않았다.
‘모든 신체기관에 식물이 엮인다고…….’
수호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물로 적셔진 입술은 금세 건조해졌다. 낙조는 침대에 앉은 채 아랫입술에 돋은 거스러미를 뜯어냈다.
‘실패한 실험……, 실패한 실험들은 그럼 어떻게 됐지?’
수호에게 묻지 못한 질문이 생각났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 찾아갈 수도 없었다. 낙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리를 빙빙 돌며 생각했다.
‘릴리라는 아이가 쓰인 실험이 마지막으로 성공했다면, 이전에 실패한 실험들의 피실험자는 어떻게 됐을까. 실패했다는 건 릴리가 보인 성공적인 상태의 반대로 봐야 하니까……, 아예 식물과 접촉이 되지 않았다거나, 아니면 피실험자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거나, 부작용이 생기거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낙조가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에 걸음을 멈춰 세웠다.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눈이 강하게 빛났다. 낙조는 안경을 고쳐 쓰고서 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까지, 이십 분 정도 남은 상태였다.
‘이십 분 정도면 안 혼나겠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낙조는 문을 열고 밤이의 방문 앞으로 뛰어가 문을 두드렸다.
*
“너 진짜 생각이 없냐?”
“미안해요.”
“이십 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
“미안합니다.”
“아, 진짜 짜증 나. 나 가끔 네가 아직 내 옆에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해.”
“…….”
“하……, 그래서 뭐가 그렇게 신나서 왔는데.”
예상은 왜 번번이 최악만 들어맞는가. 낙조는 밤이에게 딱밤 한 대라도 맞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겼다. 이미 잠이 다 깨버린 밤이는 침대에 반쯤 누운 채로 낙조에게 물었다.
“금수호 씨가, 켈리의 남은 파일을 좀 봤는데, 실패한 실험에 대한 문서도 있었대요.”
“그런데.”
“릴리가 마지막었다는 건, 분명 그 전엔 릴리처럼 반응한 실험체가 없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럼 무슨 부작용이 있어서 실험을 실패했다고 결정 지었을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더 이상 실험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실험체가 망가졌다는 건데.”
“죽었겠죠?”
“아마도?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금수호 씨한테서 들은 거 아니었어?”
“제가 차마 못 물어봤어요. 상황이 좀 급박해서.”
“그래,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밤이는 눈을 반쯤 뜨고서 낙조를 재촉했다. 낙조는 잠시 팔짱을 끼고 아무 말 없이 제자리를 돌다가 밤이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이미 밤이가 예상했을 상황일 확률이 높아 자신이 유난을 떤 게 조금 걱정됐다.
“근데, 가짜로 죽었다면?”
“뭐?”
“다양한 변종을 만들고서, 실패했다고 한 거죠. 공식적으로 성공한 실험은 릴리가 맞지만, 사실 실패한 실험들도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낙조가 작은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끝으로 갈 때쯤엔 목소리도 조금 커져 있었다. 낙조는 헛기침을 하며 목을 다듬었다. 밤이는 낙조를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을 하는 거겠지, 낙조는 굳이 그녀를 독촉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데앵, 데앵, 데앵.
그때 서천을 휩쓰는 종소리가 들렸다. 여섯 시를 알리는 소리였다. 낙조는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밤이를 응시했다. 밤이는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몇 번 눈을 깜박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단 방에 가 있어.”
“네?”
“씻어야 할 거 아니야.”
“아.”
“우리 전부 한 곳에 모이는 건 너무 의심스러우니까, 반반 갈라서 만나야 해. 일단 백무흠이랑 금수호 씨를 불러서 좀 더 정확하게 예상을 해보자.”
그녀는 고무줄로 머리를 묶으며 말했다. 낙조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밤이처럼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바로 할 일을 찾는 사람이 또 있을까. 굉장히 이성적이면서도 자신의 사람을 놓치지는 않는 사람. 혼자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는 거……, 어려운 만큼 속이 후련하네.’
세성의 앞에서 언제까지나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던 마음을 고백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땐 부끄럽기 그지없었지만 막상 인정하고 털어내니 조금 더 자신의 힘을 생각하는 자세가 달라진 것 같았다.
게다가 밤이는 단 한 번도 낙조의 고민을 허투루 들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하는 말이면 곧장 귀를 열어 집중했고, 틀린 정보만 지적할 뿐 크게 낙조의 의견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낙조는 침대에 앉아 눈을 깜박이다가 문득 밤이가 거제도를 떠나기 직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믿어 줄 때까지 안 갈 거야. 나는 너한테 빚진 것들 다 갚기 위해서라도 못 가.」
생각해 보면 모진 말을 뱉어낸 건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혼자 알아서 하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그녀에게 곁에 없어도 된다는 말을 내질렀다. 그때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상황이 최악이긴 했으나 이성까지 잃고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는데. 밤이는 자신의 말에 분노하지 않고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해 주었다. 자신한테 진 빚이라는 건 뭘까. 낙조는 특별하게 일행이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다거나 무작정 자신의 힘만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일행과 함께하며 배운 삶의 경험이 그들에게 갚아야 할 빚이었다.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머리를 대충 말린 밤이가 낙조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침 식사를 위해 나오는 홍 씨 남매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배식을 받기 위해 줄지어 복도를 걸었다. 낙조를 비롯한 일행이 서천에 위험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 후, 서천 사람들과 함께 장소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낙조의 뒤에 선 밤이는 식판을 받고서 일부러 해화와 지운과 조금 거리를 둔 곳에 앉았다.
“나 지금 너무 티 나?”
“……조금?”
“안 그래도 홍해화가 왜 자기한텐 계획 빨리 안 알려주냐고 뭐라고 했단 말야.”
“홍해화 성격이면……, 그럴 만하죠.”
“야. 우리가 철 덜 든 애마냥 따돌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쫄았어요?”
“말 가려서 해. 내가 쫄았어? 걱정하는 거지.”
“완전 쫄았는데. 진짜 홍해화랑 화해해요. 언제까지 이럴 건데요.”
“미친놈이.”
밤이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테이블 아래로 낙조의 정강이를 신발 앞코로 세게 쳤다. 이를 악물고 견딘 낙조는 아무 일도 없는 척 숟가락을 들어 밥을 펐다. 한 테이블을 두고 해화, 지운과 앉은 터라 목소리를 크게 낼 순 없었다. 생각 없이 눈을 굴렸다가 눈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낙조는 식판에 코를 박듯이 고개를 숙였다.
“백무흠은 오늘 늦잠 잤냐? 이제야 오네.”
잠깐 말없이 식사를 하던 도중, 밤이가 입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말 그대로 무흠이 피곤한 얼굴을 하고서 식당에 들어오고 있었다. 일단 그는 밥을 3인분을 받아내곤 식판 하나를 더 꺼내 반찬을 받았다. 자리를 찾는 듯 둘러보는 시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터덜터덜 걸어와 밤이의 곁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왜 제 옆에 앉으세요. 아침부터 불쾌하게.”
“시비 좀 걸고 싶어서 왔다. 불만 있어도 내 알 바 아냐.”
“허, 오늘 좀 재미난 얘기를 들려주려고 했는데 걍 바로 걷어차시네.”
해화와 지운에게까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둘이 소곤거렸다. 겉으로 봤을 땐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일상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게 핵심이었다. 물론 이런 티키타카가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볼 때마다 시청하는 재미가 늘어나니 낙조는 말없이 귀만 쫑긋 열어두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 봤자 어그로나 끄는 거겠지. 내가 그 정도도 구별 못 할 줄 아나?”
“감 많이 죽으셨네. 아니면 금수호 씨한테서도 버림받았나?”
“뭐?”
나물 무침을 씹던 무흠이 곧장 밤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밤이는 그제야 식판으로 시선을 돌리고 모르는 척 밥을 먹기 시작했다. 조용히 나물을 씹고 삼킨 무흠이 밤이의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아,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금수호 얘기가 왜 나와.”
“왜긴, 금수호 씨가 고낙조한테 엄청난 얘기를 해줬으니까. 그럼 당연히 당신도 알고 있을 줄 알았지.”
밤이는 보란 듯 웃으면서 중얼거리곤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 이후론 무흠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무흠은 밤이가 일어나는 타이밍에 맞추어 식사를 억지로 끝내야 했다. 그래도 짧은 시간에 꽤 많이 먹어 버리는 건 별로 없었다. 커피를 마셔야겠다는 밤이의 중얼거림에 무흠이 바로 앞장섰다.
“야, 고낙조. 넌 뭐 마실래?”
“무슨 카페 가는 것도 아니고 누나…….”
“그러면서 너는 아까부터 왜 그렇게 실실 웃어.”
“그래도 많이 친해지신 것 같아서…….”
“친해진 게 아니야.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밤이는 자신의 말을 못 듣는 척 앞으로 나아가는 무흠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결국 연상의 맛을 알아버린 연하남의 칭얼거림이라고 해야 할까?”
*
밤이는 무흠이 직접 탄 커피를 마시면서 콧노래로 흥얼거렸다. 낯선 멜로디였기에 낙조는 생수만 꼴딱꼴딱 넘기면서 무흠의 눈치를 보았다.
밤이의 엄청난 발언 이후 무흠은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응하면 할수록 밤이가 신날 거라는 걸 안다는 듯이. 밤이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뜨거운 율무차를 타고서 아주 조용히, 그리고 사나운 눈길로 밤이를 노려보았다.
“근데 홍해화랑 홍지운이 찾으러 오면……, 뭐, 그건 상관없겠죠?”
“야, 가만 보면 네가 나보다 더해. 상황 흘러가는 대로 하는 거지, 우리가 걔네 싫어해서 이러는 것도 아닌데.”
“누나 진짜 가스라이팅하지 마요.”
“지랄라이팅이나 하지 마세요, 고낙조 씨.”
밤이는 여유롭게 웃으면서 남은 커피를 마셨다. 빈 컵을 내려놓자, 무흠이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지금까지 잠겨 있던 입이 열리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다들 여기 있었네요.”
수호가 충혈된 눈을 문지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흠은 이마를 짚으면서 낮게 탄식했다. 밤을 지새운 것처럼 보이는 수호는 느린 동작으로 커피를 타며 낙조에게 말을 걸었다.
“그, 제가 말씀드린 거 있잖아요. 실패한 실험 보고서를 다시 읽어봤거든요.”
“아. 안 그래도 그거 궁금해하고 있었어요. 실패한 실험이……, 보여주기식으로 실패했다고 하는 건 아닌지.”
“……추리력 좋네요. 네, 맞아요.”
“정확히 어떻게요?”
낙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수호는 뜨거운 물을 받아 스틱으로 커피 가루를 휘휘 녹이면서 음, 하고 운을 띄웠다. 그리곤 무흠의 곁에 퍼질러 앉은 후에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고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금 변종이라고 부르는 거. 임상시험의 부작용인 줄 알았던 그 바이러스요. 일부러 만든 거예요. 그런 바이러스를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계획하고 작정한 다음에 만들고 실험까지 했어요.”
수호의 말에 방 안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수호의 이야기와 낙조의 추측은 어느 정도 맞물렸다. 낙조가 했던 최악의 상상까지 맞아들었다. ‘최악’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수호는 한숨을 푹 내쉬고 등받이에 머리를 비딱하게 기대더니 말을 중얼중얼 내뱉었다.
“일반 사람은 걸릴 수밖에 없는 전염병을 만든 거죠. 고낙조 씨 같은 경우엔 더 알아봐야겠지만……, 릴리와 엮여 있는 건 확실한 것 같구요. 일단 켈리가……, 깨어나야 뭘 하든 할 텐데.”
“잠깐,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산이 뒤집히는 바이러스를 왜? 굳이?”
밤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붙였다. 수호는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거의 죽은 눈으로 밤이를 응시하면서 대답했다.
“그래서 켈리가 빨리 일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선 아주 철저하더라구요. 추측할 수도 없게 안 써놨어요. 그냥 엄청난 바이러스를 만드는 걸 계획했다는 것만 쓰여 있지, 어떻게 쓰일 것인지에 대해선 한 마디도 안 적어놨다니까요.”
“하……, 진짜 돌겠네. 만들어진 바이러스고, 변종이 되는 게 당연한 거라면……, 고낙조나 홍해화, 가끔 봤던 증상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돌연변이라고 봐야겠네.”
“그죠. 뭐……, 서천이랑 관련된 건 확실하고, 삼승이란 사람도 뭘 숨기고 있는 건 아닌지 좀 봐야 할 것 같아요.”
삼승이란 이름이 나오자 무흠이 눈을 느리게 한 번 깜박였다. 낙조는 곁눈질로 그것을 보고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계속해서 목이 말랐다. 몸에 가뭄이라도 든 것처럼, 물 한 방울 한 방울이 간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