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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73화 (173/202)

173화. 발각 (1)

「변종은 물론이고 혼이 착각할 만큼, 넌 강하다고. 자신을 구제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만큼 강해서, 그저 고통을 주러 온 사냥꾼처럼 느껴진다는 거야. 그들에겐.」

해화가 남기고 간 말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던 낙조는 상체를 일으키며 이불을 꽉 쥐었다. 자신을 사냥꾼처럼 인식할 만큼 기운이 강하다……. 혹시, 라는 생각으로 시작된 의심은 몸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곧장 낙조는 세성의 방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급한 발걸음에 발이 꼬이기를 몇 번, 몇 개의 모퉁이를 돌아 낙조는 세성의 방문 앞에 섰다. 간부라도 마주쳤다간 곧장 끌려나갈 게 빤했기에 손을 들어 작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안에서 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낙조는 주위를 살피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문을 열었다. 세성의 사무실이 아닌 침실에 드는 건 두 번째였다. 병풍을 뒤로하고 바닥에 앉아 있던 세성은 고개를 들고 낙조의 얼굴을 확인했다. 예상했다는 듯 작게 웃는 미소에도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세성은 시간이 갈수록 메말라 가고 있었다. 창백한 낯빛을 보고서 낙조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뭐가 궁금해서 왔어.”

“그보다 세성님, 안색이…….”

“능력을 잃었으니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들지. 당연한 거야.”

“무슨 말입니까, 그게.”

“죽어가는 과정이야, 이건. 삼백 년 정도면 정말 오래 살지 않았나?”

세성은 일부러 웃으면서 말했다. 일부러 낙조를 놀리려는 듯, 그는 쉽게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낙조가 주춤거리다가 입을 열려 하자, 그는 손을 내저으며 말문을 막았다. 세성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서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로 낙조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네 헛소리 좀 듣고 웃어야겠다.”

“세성님, 저 장난치러 온 거 아닙니다.”

“그렇겠지, 넌 항상 진지했어. 그게 웃긴 거야 나한텐.”

그렇게 말하며 세성은 흰 종이와 펜 하나를 꺼냈다. 펜을 쥐는 손은 겨울에 웅크린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었다. 더 이상 참견하지 말라는 세성의 조용한 압박이 느껴졌다. 낙조는 주먹을 꽉 쥔 채 세성이 먼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이제 자신의 마음은 읽지 못하겠지만, 그동안 일한 세월이 있으니 자신이 지금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쯤을 알고 있을 테다.

“이제 쉽게 속을 읽지 못하니 편하긴 해. 정말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거든.”

“……이제 얘기해도 됩니까?”

“응, 해.”

“세성님도 보셨죠. 홍해화가…… 혼들과 대화하는 거요.”

“봤지. 멀리서.”

“저도 뿌리를 쥘 때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근데, 홍해화가 아까 와서 저한테 한 말이 마음에 걸립니다. 제 기운이 너무 강해서, 혼들이 착각한대요. 자신들을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잡으러 온 사냥꾼처럼…… 느껴진다고.”

“뭐야, 지 자랑하러 온 거구만.”

“세성님, 그 구체 변종은……, 홍해화가 있는 곳으로 직접 찾아갔어요. 그리고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저 혼자 만났을 때랑은 달랐어요.”

낙조는 다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세성은 그리 귀를 기울여 듣는 것 같진 않았다. 빈 종이에 낙조의 말을 단어로 축약하여 써가면서 고개를 대충 끄덕일 뿐이었다.

“왜 그런지는 너도 알 텐데?”

“……홍해화랑 제가 능력이 다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근데 혼들이 착각할 만큼 제 기운이 강하다는 건, 결국 악한 기운이라는 말 아닙니까? 홍해화가 가진 능력이 선하기 때문에 그 구체가 홍해화를 믿고 찾아온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

머릿속에 홀로 담아둔 말들을 모조리 뱉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다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세성의 반응에 두려웠다. 세성이 반응하지 않을 때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네가 가진 능력이 악하다는 생각을, 너도 하고 있었구나?”

세성이 낙조를 가리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낙조는 세성의 손끝이 자신을 가리킨 것을 보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무흠과 함께 서천을 나선 후 변이 식물과 인간 형태 변종을 마주했을 때, 자신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완전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성이 자신에게 일러준 역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화의 존재도 잊고서, 그저 살아 있는 이들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게끔 길을 터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낙조는 주먹을 꽉 쥔 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능력이 생기고 나서 네가 달라졌다고 생각하냐?”

“…….”

“대답해. 능력을 발견한 이후 변화가 생겼냐고.”

세성은 꽤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펜을 아예 놓고서 낙조만을 응시했다.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입술이 저릿했다.

“말해!”

쾅, 세성이 책상을 세게 내리치며 윽박질렀다. 그제야 낙조는 숨을 들이켰다가 눈을 감으면서 입을 열었다.

“예.”

“어떤 점에서.”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누군가는 비웃을 수 있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낙조에겐 평생 꿈꾸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영영 혼자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부터,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환영해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조차 두려워 도망칠 때부터 시작된 추락이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요. 제가 한다면 다 성공할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살아남는 건 물론이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다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고해성사하듯 말해? 나는 널 벌 주려고 하는 게 아니야. 들을 뿐이지.”

“너무 원초적인 생각만 했습니다. 자신의 몸에 갇힌 혼들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눈에 보이는 게 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힘만 믿고요. 힘만 있으면 뭐든 다 해결될 것 같았으니까요.”

지독한 고백이 끝날 즈음엔 목소리가 떨렸다. 용케 울지 않았다. 낙조는 침을 삼키고서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세성은 한참 말이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힘이 생기면 뭐해. 내가 무서워하는 사람 앞에선 아무것도 못 하는데.’

그런 생각이 낙조의 머릿속을 헤집고 달아났다. 홀로 생각하고서 알아차렸다.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족속의 인간 유형으로 변했다는 걸. 강약약강의 표본을, 자신에게 합리화시키며 익혀나가고 있었다. 해화의 말이 아니었다면, 세성에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계속해서 그런 인간으로 살았을 것이다.

낙조의 할머니는 절에 다니셨다. 가끔 새해마다 부적을 주시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낙조의 두 손을 꽉 쥐면서, ‘우리 아기는 태생이 착하다구 그런다. 그래, 착하게 살아야 부처님이 좋아하시지.’라는 말을 하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괴롭힌다거나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법을 어긴 적은 없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을 간접적으로 죽이기도 했고 직접 죽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죄책감은 무뎌졌다. 그에 비례하여 강해지는 힘을 신처럼 믿었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이 가진 힘이 곧 모든 일을 마무리할 수 있는 열쇠라고 감히 생각했다. 자신을 쫓아다니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그것에 홀려 자신이 그만큼 쓸 만한 사람이라고 착각했던 걸까. 겉으론 남들을 돕는 척하면서, 사실은 다들 자신에게 고마워하길 바라진 않았었나.

한 번 시작된 회고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을 괴롭혔다.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앉아 주먹을 세게 쥐는 일뿐이었다. 세성은 한숨도 쉬지 않고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없이 낙조를 바라보았다.

“고낙조.”

“……예.”

“네가 틀린 생각을 한 건 아니야. 다들 너를 필요로 해. 네가 옆에 있어야 사는 줄 알아. 자기를 지켜줄 사람이라고 생각해. 너는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고 움직였을 뿐이야. 그리고 더 큰 것을 해주기 위해 희생을 자처하지. ……이건 사람이 쉽게 착각하곤 하는 부분이야. 자신이 무조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어쩔 수 없는 것까지 신경 쓸 정도로 여유롭지 않은 상태가 됐으니까.”

“…….”

“하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기서 네가 헷갈리기 시작하는 거지. 너 같은 성격이라서 가능한 거야. 무던했다면 고민도 하지 않았을 거야. 너의 목적은 이곳을 안전하게 만드는 거였고, 당연히 살아 있는 사람들만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나에게 직접 물었던 너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고.”

“……맞습니다.”

“조금 섣불렀던 것뿐이야. 그렇게 생각해. 더 머리 굴렸다간 다시 꽉 막혀서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으니까. 신소미가 완전히 회복하기까지 기다렸다면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겠지. 삼승님의 오해도 사지 않고, 간부들의 눈초리도 받지 않고.”

삼승과 간부라는 단어에 낙조가 고개를 들었다. 풀죽은 얼굴을 보고서, 세성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내가 입막음을 어디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다.”

“다…… 모든 게 전부, 알려졌나요?”

“전부는 아니야. 귀도가 직접 나섰으니까.”

“귀도……가요?”

“응. 너희의 계획을 엿듣고 나에게 와서 미리 삼승님에게 할 말을 꾸미자고 했던 것도 귀도야. 이 얘기는 너무 길어질 것 같으니 나중에 들려줄게.”

“……알겠습니다.”

“자신감을 가져서 나쁠 건 없어. 그리고 너 스스로 악한 기운이 더 쉽게 뭉쳐져 힘을 사용한 걸 깨달았다면 이젠 괜찮아. 홀로 깨닫는 것도 참 힘든 일이니까. 그러니 너무 기죽지 마. 잘하고 있어, 지금도.”

세성은 읽다 만 책을 펼치며 말을 끝맺었다. 갑작스럽게 대화가 끝나자 낙조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앉아 멍하니 세성만 바라보았다. 피를 더 이상 뽑지는 않는지, 글자를 읽어나가는 눈동자 하나만큼은 또렷했다.

“세성님, 그럼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이고, 귀찮게 진짜. 뭔데.”

“아직 제 오른팔……, 살아 있습니까?”

“…….”

책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던 시선이 스르륵, 낙조의 손을 타고 올라왔다. 어쩐지 목 뒤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낙조는 이를 악물고 몸이 떨리는 걸 참아냈다. 세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도가 가져온 켈리의 파일에서……, 그 오른팔에 남은 혼의 주인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켈리에게 엄청난 앙심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악어와 새’에서 힘이 더욱 강해진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싶고요.”

“흠…….”

“알고 계셨습니까? 켈리와 연관돼 있다는 걸.”

“그야 당연한 거 아니야? 켈리는 애초에 이 일을 저지른 자야. 그렇게까지 어린아이가 저승에 가지 않으려 버티는 이유는 몇 개 없어. 부모도 찾지 않고,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악에 받쳐 화를 낼 정도로 어린아이가 분노에 찬 이유가 뭘까. 나도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추측한 거야.”

세성은 말을 마치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나가. 졸리니까.”

“…….”

“나가라고 했다.”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낙조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와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조용히 걸었다.

세성과 대화를 하고 나면 머릿속은 항상 엉망진창이 된다. 가지런히 정리돼있는 세성의 머릿속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았으나, 자신의 머릿속엔 제대로 된 책장 하나 없었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정보들을 가만히 놓아둔 채 멍하니 걸었다. 자신의 속죄와 낡은 오른팔에 대한 이야기. 아직 풀어나가야 할 일들은 많았으나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켈리를 깨워야 해.’

낙조는 다짐하듯 생각을 하면서 코너를 돌았다. 그때 맞은편에서 누군가 나타나 낙조의 가슴에 머리를 콩 박고 뒤로 넘어갔다.

“아!”

“어……, 금수호 씨.”

조금 우스운 꼴로 뒷걸음질 친 수호는 잠깐 놀랐다가 낙조인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곧장 목소리를 죽인 채 화를 내는 그를, 낙조는 빈방으로 데리고 간 후 문을 닫았다.

“아, 왜요!”

“그때 켈리 파일에 대해 찾아봤잖아요. 혹시 더 나온 거 없나 해서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아저씨 찾아가는 길이었어요.”

“아저씨요?”

“백무흠.”

“아아. 네.”

“거의 서천꽃밭에서 키워지는 약초와 독초 얘기였는데, 실험 관련된 문서가 몇 개 더 있었어요. 번역하느라 애 좀 먹었지만.”

수호는 낙조와 부딪친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떠올리는 듯 시선을 벽에 두고서 느리게 말을 덧붙였다.

“고낙조 씨랑 다 연관된 것들이었어요. 모든 신체기관의 역할을 식물이 대행하는 실험이었으니까.”

“……성공한 실험들이에요?”

“다 실패했죠. 릴리라는 여자애도……, 아무래도 죽인 것 같으니까. 그런데 왜 그만큼 완벽했던 아이를 왜 죽였을까요.”

검은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난 염색모를 헝클이며 수호가 중얼거렸다. 낙조도 조금 의문을 품던 부분이었다.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아니면 연구소 내부의 일을 들킨 것 같아서? 그것도 아니라면 왜 그들은 어린 릴리의 몸에서 피를 다 빼냈을까.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낙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마지막 실험이었던 거예요.”

“네?”

“성공한 마지막 실험. 그래서 그 아이 피를……, 퍼뜨리려고 한 거예요.”

수호와 낙조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둘은 눈을 마주치고서 침을 삼켰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것처럼,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낙조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후 문을 열었다. 수호가 먼저 살며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발소리가 점차 멎을 즈음, 낙조도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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