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복귀 (2)
머릿속이 일순간 하얗게 번졌다. 낙조는 구체가 숨기고 있던 눈을 들췄다는 걸 알아챘다. 잠시 멍하니 서서 구체를 바라보던 무흠은 낙조가 한 번 더 재촉하자 서둘러 차에 올랐다. 빠른 속도로 후진하는 차를 보고 구체가 눈을 한 번 깜박, 거리더니 앞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워낙 큰 덩치에다 힘이 별로 없어 구르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낙조는 무흠이 어느 정도 멀어졌다 싶어졌을 때, 소매를 걷으며 구체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도 눈? 눈이냐?’
거제에서 보았던 발광 구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눈이었다. 마치 화이트홀처럼, 안에 있는 것을 모두 자신에게 게워낼 것만 같았다. 낙조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오른손과 왼손에 나누어 힘을 주었다.
낙조의 앞에 멈춰 선 구체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가만히 오르락내리락 호흡하기만 했다. 구체의 가운데에 박힌 눈이 파르르 떠는 것을 보며, 낙조는 변하기 시작한 손을 아래로 내린 채 온몸의 감각을 바짝 일으켜 세웠다.
탕!
아무 말 없이 대치하고 있을 때, 조금 먼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무흠이 사격 자세를 취한 채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뭐해요!”
“그럼 너한테 내 목숨을 다 맡기냐?”
“당연하죠! 얘가 그냥 변종인 줄 아세요?”
“누구를 위해 네가 당연하게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 할 수 있을 때까진 해보는 거야.”
말을 마친 무흠은 재장전을 끝내고 구체의 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눈으로 곧장 날아가 꽂혔다. 그러나 겉으로 물렁해 보이던 눈알은 총알을 잠시 머금었다가 침을 뱉듯 툭, 밖으로 떨어뜨렸다.
‘물리적인 공격이 안 통하나?’
낙조는 완전히 뻗어난 양손의 나뭇가지를 보고서 자세를 잡았다. 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면, 자신의 능력으로는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다행인 건, 무흠의 공격에도 구체는 반격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힘이 부족하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낙조는 오른손을 완전히 뻗은 채 눈을 향해 힘을 모아 날렸다. 구체의 눈알에 손이 닿기 직전, 눈앞이 하얗게 점멸될 만큼 거센 빛이 번쩍였다. 손을 내뺄 시간도 주지 않았다. 물컹한 것에 빨려 들어간 팔의 감촉이 느껴졌다. 시야가 다시 돌아왔을 땐, 팔꿈치까지 손이 빨려 들어간 상태였다.
“시발, 시발, 시발…….”
입안에서 튀어나오는 건 욕밖에 없었다. 팔이 빨려 들어갔을 때부터 직감한 것이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이전에 보았던 발광 구체에게서도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욕망은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달랐다. 뒤틀린 욕망이라고 해야 할지, 그 욕망이 더욱 거세진 건지는 몰라도 자신을 다른 방향으로 원하고 있었다. 끈적한 것들이 팔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낙조는 뒤늦게 딱딱한 나무껍질을 왼손으로 받치고서 오른팔을 꺼내려고 해보았으나 안쪽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무척이나 거셌다. 남은 힘을 모두 끌어내는 듯, 죽기살기로 낙조를 안쪽으로 당기는 힘에 낙조는 목을 쥐어짜며 소리쳤다.
“중사님! 아무거나, 아무거나 해 봐요!”
“…….”
무흠은 빠르게 차로 뛰어가 가방을 뒤졌다. 혹시 몰라 탄환을 많이 챙겨오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몰랐다. 얼마나 낙조가 버틸 수 있는지 모르니 손끝이 조금씩 떨려왔다. 무흠은 빈 병들을 뒤적이다가 이내 손에 잡힌 것을 빼냈다. 독이 묻은 탄환이었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권총에 장전시킨 후 낙조를 빨아들이고 있는 구체의 눈을 향해 조준했다.
시간을 셀 겨를도 없었다. 어깻죽지까지 파고든 눈알은 낙조의 머리까지 빨아들일 기세였다. 방아쇠를 당기고서, 무흠은 낙조에게로 뛰어갔다.
푸슉.
일반 탄환처럼 눈알에 푹 말려 들어간 독은 다시 떨어지기 전에 주변의 물질을 오염시키기 시작했다. 낙조를 붙들고 있던 힘이 빠지기 시작한 틈과 맞물렸다. 낙조는 구체의 눈에 코끝이 닿기 직전 몸을 빼내려 시도했고, 무흠이 잡아당기는 힘에 이끌려 밖으로 떨어져 나왔다.
“헉, 허억, 헉…….”
짧은 순간에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독이 묻은 부분은 충혈 된 것처럼 빨갛게 부풀더니 지그재그 모양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눈알은 그때가 돼서야 쉬지도 않고 번쩍거리면서 이리저리 굴렀다. 육중한 몸을 움직일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생각나는 거 있어?”
무흠이 낙조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낙조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끈적거리는 액체로 뒤범벅이 된 오른손은 소용없었다. 무엇을 쥐려고 하든, 뭘 해보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이끌려 들어갔다. 심지어 독이 묻은 가시를 삼켰음에도 구체는 멀쩡했다. 낙조는 독에 물들어가는 구체의 눈을 보면서 무흠을 돌아보았다.
“무슨 독이에요?”
“……지독한 독초지. 화상을 입은 것과 비슷한 고통을 주고, 닿은 부분을 단숨에 녹인다. 저 녀석한테 조금이라도 통해서 다행이군.”
“중사님.”
“목숨 내기라면 안 받는다.”
“저 녀석, 생각보다 약해요. 눈에만 힘이 집중돼있어요.”
“그래서.”
“둘러싸고 있는 건……, 껍데기일 뿐이에요.”
“빨리 결론 말해. 시간 없다. 쟤 지금 정신 차리기 일보직전이야.”
“먼저 껍데기를 부셔야 해요. 눈을 보호하는 것부터 처리하고, 힘을 모을 수 없게 됐을 때 독초를 쓰는 겁니다. 제가 뒤쪽부터 부실 테니까 중사님은 총소리로 시선 좀 끌어주세요.”
“진짜 가지가지하는구만…….”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도, 무흠은 권총을 다시 꺼내 들었다. 낙조는 구체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거리는 틈을 타, 구체의 뒤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왼손으로만 하는 거야.’
아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은 기억을 꺼내드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었으나 상황에 따라선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마주해야만 했다. 낙조는 두 번째 목적지에서 왼손 주먹으로 변종들을 이리저리 내쳤던 것을 떠올리면서 천천히 두툼하게 자란 나뭇가지를 안으로 말아 쥐었다. 뾰족한 끄트머리가 안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마디마디 굵어진 나뭇가지가 빳빳하게 굳어져 보다 위협적으로 보였다.
탕!
앞쪽에서 무흠이 신호를 날렸다. 낙조는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공중으로 가볍게 들어올린 후 구체의 정수리 쪽에 안착했다. 자신의 무게 정도는 쉽게 느껴지지 않는지, 구체의 시선은 온통 무흠에게 쏠려 있었다. 앞으로 구르려고 하는 구체의 움직임에 낙조의 중심도 덩달아 흔들렸다. 비스듬하게 구체가 몸을 굴리자, 낙조는 허겁지겁 오른손으로 나무껍질 사이로 튀어나온, 누군가의 창백한 손을 붙잡고 매달렸다.
‘시간 끌지 말자.’
단순하게 생각할수록 몸은 빨리 움직인다. 낙조는 다시 구체의 머리 위로 올라와 꽉꽉 둘러싼 왼쪽 주먹을 아래로 내리쳤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비쩍 마른 나무뿌리가 부스러졌다. 생각대로였다. 구체의 눈에 모든 힘을 집중하다 보니 외부를 둘러싼 이 표피 같은 것엔 맥아리가 없었다.
번쩍, 번쩍.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욱 더 맹렬하게 빛났다. 고통을 빛으로 토해내는 듯, 구체는 뒤쪽으로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낙조는 거미처럼 길게 돋아난 오른손 손가락으로 틈을 비집고 매달려, 다시 정상에 안착했다.
퍽, 파사삭, 퍼억, 카가각!
일방적인 구타였다. 땀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낙조는 명령을 입력 받은 기계처럼 숨도 쉬지 않고 구체를 몰아붙였다. 낙조의 왼손이 뿌리를 내리칠 때마다 겹겹이 쌓인 것들은 순식간에 바람에 흩날려 날아갔다. 자신의 계획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낙조는 두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눈알이 있는 곳까지 파고들었다. 아래로, 아래로 계속해서 내려가던 낙조는 아내 땅굴 정도의 깊이를 파고서 숨을 토해냈다.
“후…….”
껍질을 거두니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더욱 처참한 광경으로 펼쳐졌다. 인간의 사지가 엉망진창으로 잘린 채 나무뿌리와 나뭇가지에 얽혀 있었다. 손톱이 다 빠진 손가락, 손가락이 없는 손바닥, 발가락이 모두 부러진 발, 기괴하게 뒤틀린 팔, 쑥 꺼진 눈알을 가진 얼굴……. 모든 피와 영양분을 빼앗긴 인간형 변종이었다.
다시 왼손을 들었다. 낙조는 틈마다 끼어 있는 인간의 사지를 보면서 전보다 더 강한 힘으로 주변의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이미 통제권은 낙조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낙조가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순식간에 내려앉는 나무뿌리와 가지, 껍질은 산산조각이 나 버려졌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보호막이 없어진 걸 알아챈 눈알이 쉴 새 없이 빛을 뿜어냈으나 낙조에겐 조금의 타격도 없었다.
무흠은 차 뒤에 숨어 자신에게 날아드는 빛을 피한 채 낙조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눈으로 쫓았다. 무흠의 눈에 비치는 낙조는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거리가 굉장히 멀어 보였다. 핏발이 선 두 눈과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 움직임. 그리고 막무가내처럼 보일 정도로 사방을 부수는 힘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져 있었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광기에 휩싸인 사람을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
껍데기가 반쯤 벗겨졌다. 낙조는 일부러 몇 겹만 남겨놓고서, 아예 땅으로 내려와 남은 표피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연결고리가 모두 끊기니, 남은 것들이 부서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왼손 주먹으로 나무뿌리를 칠 때마다 가을에 내려앉은 낙엽 밟는 소리가 났다. 파사삭. 바삭. 어떨 때는 주먹이 두껍게 쌓인 껍데기를 관통할 때도 있었다.
산처럼 컸던 구체는 어느새 낙조와 비슷한 크기로 작아졌다. 눈알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도 필라멘트가 끊긴 전구마냥 약해져 있었다. 낙조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면서 눈알 앞에 당당히 두 발을 딛고 섰다.
그제야 낙조는 자신의 귓속을 파고드는 속삭임을 들었다. 여기저기서 뻗쳐 오는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인간의 사지들을 볼 때마다 속삭임은 더욱 커졌다. 맨 처음 발광 구체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상황을 파악하는 건 쉬웠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때 뿌리를 뽑아낸 오른손이 아니더라도, 뿌리를 뽑아내고 이들을 저승으로 잘 보낼 수 있을까. 낙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손을 원래 형태로 되돌려 놓은 후 눈알의 중앙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꽂아 넣었다.
물컹하다 못해 흘러내리기 직전의 눈알은 더 이상 낙조를 붙잡지 못했다. 무흠이 퍼뜨린 독은 일부분만 오염시켰을 뿐, 전체를 다 뒤덮진 못했다. 낙조는 더 깊숙하게 팔을 꽂고서, 무흠을 불렀다.
“중사님! 그거, 아까 썼던 거 줘요!”
“독초?!”
“그, 처음 눈알에 쏜 거! 그냥 탄환 말고요!”
낙조의 말에 조금 멀리서 지켜보던 무흠이 급하게 가방을 뒤졌다. 여분으로 챙겨온 것들을 모두 쥐고서 낙조에게로 다가간 무흠은 낙조의 머리에 맺힌 식은땀을 보고 입을 꾹 닫았다. 조용히 낙조의 변화한 왼손에 독이 묻은 탄환을 건네주곤 조금 뒤떨어진 채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억울해하는지, 자신을 원망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결국 원하는 바는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다시 스스로를 자책하고 그들에게 다시는 속죄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할 것이다. 이 모든 행동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그들이 용서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낙조는 왼손에 쥔 탄환을 꽂기 직전, 오른손에 잡힌 가느다란 뿌리를 붙잡았다. 벗어나려고 아등바등 몸을 움직여 봤자 낙조에겐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안녕히 가세요.”
낙조는 망설임 없이 뿌리를 단숨에 뽑아냈다. 콰르륵, 안을 채우고 있던 진액이 뿌리와 함께 잔뜩 쏟아져 나오며 바닥을 적셨다. 줄줄이 딸려나온 뿌리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썩은 냄새를 흩뿌렸다. 낙조는 아직 구체의 형태를 띠고 있는 눈알에 독이 묻은 탄환을, 뿌리를 빼낸 중앙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곧 눈알은 흐물거리면서 몸을 바르르 떨더니, 이내 폭삭 주저앉았다. 파충류가 탈피한 껍질처럼 남은 불투명한 막을 내려다보며, 낙조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모두 조심히……, 가세요.”
독한 냄새가 코끝을 타고 올라왔다. 낙조는 진액이 묻은 뿌리를 꽉 쥐면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