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그들의 뒷면 (2)
누구든 감추고 싶은 기억이 있다. 평생 감추려고 했던 기억이 뜻하지 않게 들춰질 때도 있고, 상황에 따라 기억을 되살려 스스로 밝힐 때도 있다. 낙조의 곁에 앉은 무흠은 후자에 가까웠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낙조가 진심으로 자신의 삶을 궁금해하는 건 아니리라 생각했다. 더 망가질 곳이 없는 마음을 어떻게든 다잡고 싶으니 자신에게 구해 달라 신호를 보내는 거겠지. 무흠은 핸들을 꽉 쥐고 있던 손을 떼고서 말했다.
“부모님 모두 서천에서 일하는 분들이었다.”
“…….”
“군인이기도 하셨고.”
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떠올려보았다. 당장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건 확실했다. 무흠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하나를 물며 창문을 내렸다. 바람이 추위를 가득 몰고 차 안으로 쏟아졌다. 바람 때문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무흠은 몇 번 라이터를 틱틱대다가 가까스로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는 숨에 연기가 피어올랐다.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서천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다. 군인도 마찬가지였다. 다 내 뜻대로 된 게 아니야.”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낙조는 절절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흠이 이런 얘기를 해 줄 만큼 자신을 신뢰한다는 건지, 묻고 싶기도 했다.
“그땐 끝까지 안 한다고 하면 안 시킬 줄 알았지. 하고 싶은 게 확실히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
“아니라는 걸 좀 더 일찍 알았다고 하더라도 바뀐 건 없었을 거다. 시간을 몇 번이나 돌려도 지금과 똑같겠지.”
어느새 반이나 타버린 담배를 쥐고 무흠이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무심코 평범했으리라 생각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서천과 관련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어렸을 때부터 서천에 얽혔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낙조는 뜯긴 엄지손톱을 매만지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승님 부모님도……, 서천 간부셨던 거예요?”
“아니. 그래서 더욱 나를 어떻게든 장승으로 만들려 했지. 그 사람들한텐 타이밍이 아주 좋았거든. 이전 장승이 노쇠해져 독에 대한 내성을 잃기 시작해서…….”
“……만들었다고요?”
“왜. 서천 간부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 자격이 있는 줄 알았냐?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각 역할에 맡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간부가 될 수 있다는 건……, 겉으로만 공정해 보이지. 내부가 얼마나 썩어 있는지는 조금만 일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전까지 무흠이 보여 준 서천에 대한 태도와는 굉장히 다른 이야기였다. 낙조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무흠은 창밖으로 담뱃재를 털고서 꽁초를 던졌다. 담배 냄새가 자욱한 차 안에서, 무흠은 턱을 매만지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했던 서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였던 거다. 눈속임을 하고 귀와 입을 막고 필요한 사람들을 만들었지.”
“…….”
“켈리가 서천을 나간 이유와 일맥상통하지. 켈리는 유능한 사람이었을 뿐, 서천의 간부들이 좋아하는 유형은 아니었던 거다.”
“조금만 일해도 그런 곳이란 걸 알면서……, 왜 다들 삶을 바쳐서까지 일해요?”
“나가기엔 너무 매력적인 사실들이 많은 곳이거든. 죽기 직전인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멀끔하게 낫게 만들고, 그런 약초를 유일하게 키울 수 있다는 힘이란 게 참 쉽게 느껴지는 거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취하게 되더군. 서천에서만 나는 꽃과 풀에 취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도 결국은 연구 목적인데 말이다. 서천의 존재를 아는 이들에게서 빼앗기면 안 된다고 하면서, 약초보단 독초를 더 많이 만들어내기 시작했지. 서천이 완전히 썩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무흠은 무덤덤하고 짧게 말했으나 그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지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자세히 설명한다고 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그럼 이쯤에서 궁금하겠지. 왜 나는 서천에 남아서 그렇게 충성을 다했을까.”
“……처음부터 궁금했어요.”
“그래. ……나도 같은 이유다. 사람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야. 아픈 사람들을 직접 구하기 시작하면서, 그 사람들이 고맙다고 인사하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때. 막혀 있던 눈과 귀가 뚫리는 기분이었지. 내가 그 사람을 구했다는 착각을 하며 살았던 거다.”
무흠은 말을 끝맺으며 상체를 앞으로 숙여 핸들에 이마를 기댔다. 항상 무척이나 커다랗게 보였던 사람이었다. 낙조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위로가 먼저일까, 아니면 떠오르는 생각 그대로를 말해야 할까. 낙조에게 닿은 무흠의 말은 여전히 진실뿐이었다. 그렇다면 서천에 대한 충성도, 무흠이 말한 것처럼 병을 낫게 해 준 이에게서 해방감을 느꼈기에 가능했던 걸까. 낙조는 말없이 무흠의 까만 머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궁금한 게 있어요.”
“…….”
“만들어진다는 말이……, 정확히 뭐예요?”
서천의 썩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무흠은 뒤집힌 세상을 통해 서천 또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느꼈을까. 묻는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낙조는 무흠이 처음 말했던 지점을 다시 짚었다. 부모가 무흠을 만들었다고 했다. 장승의 자격을 어떻게 만들었다는 말인지 궁금했다.
“말 그대로다. 나는 찰흙이었어. 오랫동안 방치돼 굳은 찰흙이었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선 먼저 유연해져야 했다. ……부모님의 많은 시도 끝에 내가 넘어간 거다. 질려 버린 거야.”
‘거짓말이야.’
처음으로 낙조의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무흠의 말이 거짓임을 느꼈으나 곧장 그의 말끝을 붙잡진 않았다. 어쩐지 쉽게 덮으려고 하는 모양새에 신경이 쓰였다. 낙조는 다시 상체를 세워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무흠을 잠깐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조금 후련해 보이기도 했고,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무흠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 낙조는 입을 닫고 무흠의 표정에 집중했다.
―셀 수 없을 만큼 맞았지. 그랬지. 때려도 안 되니 죽지 않을 만큼 독초를 먹여서 내성을 키우고……, 환각까지 일으켜서 세뇌했다고. 얘기하는 것조차 부끄럽다. 생각하기도 싫어.
차라리 읽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들이 낙조의 귓속을 헤집고 떠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낙조에게, 무흠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자신의 속이 읽혔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채.
“속죄하기 위해 늦게나마 너를 돕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거 안다. 그렇게 생각해. 그게 맞다.”
“…….”
“나는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봐야 하는 것을 보지 않으려 했다. 무서워서. 단지 무서워서……. 이때까지 침묵한 거야. 정의롭지도 않다. 네게 하는 말은, 그러니까…….”
무흠은 잠시 횡설수설하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너한테 한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니 너무 고마워하지도 마. 오히려 나보다, 송밤이 그 여자가 네겐 더 도움 되는 말을 해 주고 있으니까.”
“그건 장승님이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하셨지만, 저한테 그런 말 해 준 사람은 장승님이 처음이고, 밤이 누나도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고마워해야죠.”
무흠이 고개를 천천히 숙이는 게 보였다. 낙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지도를 펼쳤다. 두 곳이 남았다. 햇빛이 슬그머니 구름 사이에서 비집고 나와 텅 빈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
밤이가 커피를 다 마시고, 해화가 식사를 아주 늦게 끝낼 때까지도 지운은 오지 않았다. 식판을 도로 가져가려는 밤이를 막고 해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할게요, 이제.”
“너 여기 위치도 잘 모르잖아.”
“언니가 같이 가주면……, 되잖아요.”
“……그러든가.”
왜 자신에겐 쉽게 얘기해 주지 않는 건지 당장 묻고 싶었으나 밤이의 성격을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해화는 텅 빈 식판을 들고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갔다. 달라진 게 있을 리 없었다. 여전히 흰 복도는 조용했다. 밤이는 해화를 앞질러 복도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어.”
“누나!”
코너를 돌 때였다.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지운이 꽉 막힌 목소리로 해화와 밤이를 불렀다. 식판을 스스로 들고 서 있는 해화를 보고 지운이 식판을 빼앗아 들었다.
“뭐야, 왜 벌써 나와.”
“홍지운 너 늦잠 제대로 잤다.”
“그……, 일단 내가 이거 갖다 놓고 올게.”
눈곱도 떼지 못한 얼굴로 허둥지둥거리던 지운은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밤이는 해화를 데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에 걸터앉은 해화는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몸은 멀쩡한데, 발목에선 그 어떤 것도 자라나지 않고 있었다. 잎사귀 하나 나지 않은 발목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지운은 금세 해화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전보다 낯선 분위기에 지운이 의자를 찾아 앉으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밤이는 둘의 가운데에 서서 머리를 굴렸다. 과연 무흠과 낙조와 나눴던 얘기를 이 남매에게 지금 해도 되는 건지. 당시엔 지운도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밤이가 뜸을 들이자, 해화보다 지운이 먼저 밤이를 졸랐다.
“그 특유의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보지 말아줘, 누나.”
“어떻게 알았냐?”
“어?”
“어떻게 알았냐고. 못 믿겠어서 말을 못 하겠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 참 발칙하시네요. 홍지운 씨.”
“누나!”
“……어차피 알아야 하는 건 맞으니까 얘기할 거야. 너네 없이 성공할 계획도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홍해화가 빠지면 안 되는 거라서.”
밤이가 지운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지운은 동시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해화와 밤이를 번갈아 보다가 덥석 외쳤다.
“나 없는 사이에 둘이 몰래 뭐 짰지!”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홍지운.”
밤이는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억지로 캐내려고 해도 상대는 송밤이였다. 그 누구도 협박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운은 주먹을 쥐고 바들바들 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더 대들어 봤자 꿀밤만 얻어맞을 게 빤했다.
그새 많이 마른 해화는 조용히 밤이의 말을 기다렸다. 밤이는 해화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방문을 닫고서 문에 기대곤 팔짱을 꼈다. 해화와 지운의 시선이 모두 밤이에게로 향해 있었다.
일행에게 계획을 공유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꾸만 말을 내뱉기 전에 고민이 되는 건……, 일말의 불안함이었다. 해화의 몸에서 정말 변종이 떨어져 나갔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해화의 상태에 따라 오르내리는 지운을 매 순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확신하지 못하는 건 자신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낙조와 무흠이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말을 하려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만 입단속을 잘 시켜놓으면 되는 일이지만, 계획에 대해 논의하다가 누군가가 듣게 된다면? 이곳은 낙조와 무흠 없이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밤이는 한숨을 깊게 내쉬곤 입을 열었다.
“홍해화가 사라졌을 때 세운 계획이야. 그때 홍지운도 좀 아팠어서, 백무흠이랑 나랑 고낙조, 이렇게 셋이서 얘기했어.”
“홍지운, 너 아팠어?”
“아……, 다 나았어.”
지운이 아팠단 말에 해화가 지운을 홱 돌아보았다. 지운은 깜짝 놀랐다가 두 손을 들면서 겨우 대답했다. 다 나았다고……. 밤이는 지운이 한 말을 되새기면서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하필 아픈 사람 둘 옆에 남은 게 나라니. 그런 한탄을 하면서.
“첫 번째, 이곳 제주를 안전지대로 만드는 것.”
“안전지대요?”
“엥?”
반응은 같았다. 밤이는 목소리를 낮추란 제스쳐를 취하고서 말을 덧붙였다.
*
“위쪽은 답 없어. 산 하나에 변종 몇이 달라붙어 있는지 가늠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야. 여기도 고낙조 덕분에 막았지, 엄청 많았다고. 그래서 고낙조가 계획을 세운 거야.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제주에서, 변종을 아예 없애는 거지. 그리고 사람들이 이곳에 올 수 있도록 하는 거야.”
“무슨 수로요? 아무리 그래도 도시예요. 한 곳 한 곳 돌아다니면서 그럴 수가―”
“―홍해화 너 잠깐 집 비웠을 때 애가 많이 자랐다. 너도 보면 깜짝 놀랄걸.”
“…….”
“그리고 이 계획에 있어서 서천이 함께할 거야.”
밤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맺었다. 지운이 소리 없이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막았다. 해화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밤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곳에……, 켈리가 왔거든.”
“엑?!”
“야 조용히 하라고.”
“아니, 아니……, 진짜?”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뱉은 지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밤이는 귀찮다는 얼굴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해화도 조금 놀랐는지 이불을 꽉 쥐고 있었다. 트라우마 같은 이름일 게 빤하다. 그 이름에 얽혀서 좋은 일들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충분히 이해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붙잡혀 왔어. 청주에서. 지금까지도 못 깨어나고 있는 걸로 알아.”
“……누가 붙잡았는데요?”
“고낙조처럼……, 엄청난 사람이 있대. 나도 만나 본 건 아니야. 켈리가 서천의 약초를 훔쳐서 일을 이 꼴로 만든 게 드러난 거지. 켈리는 원래 이곳 사람이었다고 하니까.”
“그래서 서천이 돕는다고 한 거네요.”
“그래. 찔리는 게 있으니까.”
“그럼……, 아까 왜 내가 필요하다고 했어요?”
해화가 조심스럽게 밤이에게 물었다. 밤이는 가볍게 미소를 짓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고낙조만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