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저물지 않는 노을 (3)
완전히 해가 뜨지 않아 안개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차를 주차한 후 짐을 챙겨 내렸다. 안개에 고독하게 잠긴 낮은 산을 올려다보니, 무흠이 옆에서 먼저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그의 뒤를 쫓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정상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뛰는 거지.”
무흠은 이상한 걸 물어본다는 듯 낙조를 한 번 힐끔거리곤 듬성듬성 파인 흙을 밟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낙조는 아무 생각 없이 작은 나무를 짚으며 무흠의 뒤를 따랐다. 경사가 그리 가파르진 않아 오르는 데엔 문제가 없었다.
“근데 얘들도 알까요?”
“뭘.”
“그 물……, 약수가 닿으면 죽는다는 거요.”
“알겠지.”
“공격할 수도 있겠네요. 그냥 흩뿌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달리기 잘하냐?”
“장승님 넘어지지나 마세요.”
한 번 말이 트이니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졌다. 낙조는 오를수록 겹겹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나 이 대화를 듣고 있진 않을까. 정말 다 잠든 게 맞을까. 의심이 발끝을 타고 자국을 남기는 듯했다. 그것이 흙에 스며들어 잠든 뿌리들을 건드리진 않을지, 괜한 걱정이 일었다.
땀이 나고 숨이 가빠졌다. 낙조는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면서 고개를 들었다. 무흠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지고 있었다. 거의 다 왔구나. 가방을 앞으로 껴안은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생각나는 말이 두 개 있는데.”
“네?”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다, 이거랑……,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이렇게.”
“뭐……, 비슷하다고 할 순 있겠네요.”
낙조가 심드렁하게 받아치며 가방에서 약수를 꺼냈다. 무흠은 무얼 생각하는 건지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던 낙조가 그를 부르자, 그는 처음으로 장난기가 섞인 웃음을 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 약수 이름 내가 얘기 안 해 줬지.”
“네. 근데 뭐……, 오글거리는 이름일 것 같은데요. 살살이풀처럼.”
“필멸수야.”
“내 말이 맞네.”
“이걸 산에 뿌릴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무흠은 주변을 둘러보며 벅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좀 신난 것 같은데 이게 맞나?’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며 낙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무흠도 가방에서 필멸수가 든 병을 꺼내 들었다. 햇빛이 천천히 둘의 얼굴을 감쌌다. 무흠이 병의 뚜껑을 열고서 낙조를 바라보았다. 햇빛에 안개가 밀려나면서 산의 모습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이 모든 나무들을, 죽여야 한다. 무흠과 눈이 마주치고서 셋을 셌다. 서로를 등지고서 낙조와 무흠은 병에 든 필멸수를 사방에 흩뿌렸다.
“바로바로 꺼내!”
언뜻 듣기엔 즐거운 목소리였다. 무흠은 곧장 하나의 병을 더 꺼내면서 지시했다.
‘수류탄 던지면 이런 기분인가.’
비교할 바는 못 되겠지만, 어쩐지 필멸수를 뿌릴 때마다 이상한 쾌감이 발끝부터 올라오는 듯했다. 산을 오를 때보다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남은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냈다. 그리곤 새 병을 꺼내 나무뿌리 위로 주저하지 않고 필멸수를 뿌렸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물에 적셔진 흙과 다르지 않았다. 적어도 다섯 번째 병을 꺼낼 때까진 그랬다.
쿠구구구궁, 투두둑!
필멸수를 뿌린 뒤쪽에서 웅장한 소리가 들리더니 땅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낙조는 당황하지 않고 무흠과 신호를 주고받은 후 서로 반대쪽으로 흩어졌다. 필멸수를 머금고 이제 막 잠에서 깬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보통 물이 아닌, 독극물이기에 자신들을 쫓는다 해도 힘이 부족할 게 빤했다. 낙조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 아예 양손에 병을 들었다. 조금 위험하긴 했으나 타이밍 맞게 입으로 코르크 뚜껑을 뺐다. 뛰어오르는 순간에 팔을 올리고, 착지하기 직전 양쪽으로 필멸수를 흩날린다.
위에서부터 깨어난 뿌리는 뒤늦게 자신과 엉킨 이들을 일으켜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가장 먼저 깨어난 뿌리는 지금쯤 말라죽기 직전일 테니까. 낙조는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서 아래를 향해 뛰었다. 차가운 흙 위를 덮은 필멸수는 곧장 속으로 파고들어 뿌리에 깃든 영양분을 모조리 앗아갔다. 낙조의 발이 닿는 곳마다 젖지 않는 곳이 없었다.
우두두두둑!
어느 정도 박자를 타면서 반쯤 내려왔다고 생각했을 때, 앞에 멀쩡히 서 있던 나무 한 그루가 기괴하게 옆으로 꺾이는 게 보였다. 주춤거릴 수 없었다. 낙조는 앞으로 달려가며 필멸수 대신 자신의 오른손을 허공으로 흩뿌렸다. 동시에 그 힘을 느끼고 뻗어 나간 긴 가지와 가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포효하며 목표물을 향해 일제히 돌아섰다.
콰드드득, 쿵!
아무래도 앞을 가로막으려고 했던 듯, 나무는 낙조의 눈높이까지 기울어졌다. 낙조는 오른손을 머리 위로 뻗으며 나무 아래로 몸을 밀어 넣었다. 미끄러지듯 그 틈을 빠져나오면서, 변화한 자신의 손으로 나무 기둥을 거칠게 베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손을 확인해 보니 진액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그냥 산 자체가 진액 덩어리군.’
단순한 결과였다. 옷에 묻은 나뭇잎 같은 것도 털지 못한 채 다시 달려야 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범위가 넓어지면서 둘러봐야 할 곳도 늘어났다. 그만큼 앞을 가로막는 것들도 함께 생겼다. 잠에서 막 깨어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이긴 했으나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장승님은……, 알아서 잘 하시겠지.’
시야를 어지럽게 흩뜨리는 나뭇가지들을 치워 내면서 숨을 골랐다. 땅을 뚫을 만큼의 힘은 당장 내지 못하는지 아직 발목을 잡는 것은 없었다. 낙조는 꾸역꾸역 땅 위로 올라오려는 뿌리를 일부러 짓밟고 필멸수를 뿌리면서 다람쥐처럼 폴짝폴짝 나무 사이를 넘어갔다.
다시 가방에서 병을 꺼내려고 한 순간이었다. 펄럭이는 나뭇가지를 쉽게 지나쳤다고 생각했을 때, 얇은 나뭇가지들이 낙조의 오른쪽 손목을 낚아챘다. 붙잡는 힘이 어찌나 센지 앞으로 나아가던 몸이 단숨에 뒤쪽으로 넘어갈 정도였다. 결린 어깨에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낙조의 몸을 잡아 이끄는 힘은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낙조는 급하게 왼손으로 가방을 닫고서 양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어.”
손끝에서 나뭇가지와 가시가 폭발하듯 튀어 나가자마자 왼손마저 반대편 나무의 나뭇가지에 붙잡혔다. 손목부터 낙조를 잠식한 나뭇가지는 천천히 기어올라 낙조의 손가락까지 휘감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피부에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힘을 쓰려면 손가락을 움직여야 했다. 왼손이 붙잡히자 나뭇가지가 팽팽하게 낙조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허공으로 떠오름과 동시에 땅에서 굵직한 뿌리가 튀어나와 낙조의 발목을 물었다. 완전히 사지가 묶인 상태였다. 낙조는 움찔거릴 수밖에 없는 손을 어떻게든 움직이려 해보았으나 사방에서 몸을 당기는 힘에 집중이 으스러졌다.
“장승님!”
과연 그가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낙조는 목을 쥐어짜 무흠을 불렀다. 불길한 생각이 동시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도 이미 붙잡힌 게 아닐까. 점점 팔다리를 당기는 힘이 거세졌다. 아직 필멸수에 닿지 않았는지, 위의 나무들보다 움직임이 재빨랐다.
“장, 승, 님!”
허억. 손발의 마비와 고통이 함께 몰려왔다. 고통을 참느라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낙조는 숨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면서 오른손에 모든 힘을 쥐어보냈다. 가시 하나라도 괜찮으니 자신을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에 찔러 넣어야만 했다. 틈을 보자. 분명히 틈이 있을 것이다. 낙조는 두 눈을 꼭 감고서 가시의 날을 잔뜩 세웠다.
암전된 시야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고통은 참기 힘들었으나 일단 살아야 했다. 낙조는 나뭇가지에 짓눌린 가시들을 조금씩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반항할수록 뿌리가 당기는 힘은 거세졌다. 이를 악문 채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려고 온 힘을 다했다.
까가각…….
나뭇가지가 어설프게 풀리면서 가시가 곧장 그 틈을 벗어났다. 힘이 살짝 느슨해진 틈을 타 낙조가 그대로 오른손을 안으로 꽉 말아 쥐었다.
투두두둑.
가시에 점점이 박힌 나뭇가지는 금세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오른팔이 자유로워지자 생각할 것도 없었다. 곧장 왼팔을 감싸고 있는 나무 쪽으로 오른손을 휘둘렀다. 꼿꼿한 가시에 박혀 나무껍질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왼팔을 감싸던 나뭇가지들도 주저앉았다.
“하…….”
숨통이 트이는 걸 느끼면서 낙조는 마지막으로 다리를 쥐고 있는 뿌리를 내려다보았다.
“어? 악!”
분명히 자신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던 힘이 불쑥 꺼졌다. 허공에 떠 있던 낙조의 몸은 중심을 잃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허둥지둥 팔을 휘젓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오른손으로 땅을 겨우 짚었다. 가시가 땅에 틀어박히며 낙조의 몸을 받쳤다. 눈앞이 잠깐 새하얘졌다가 돌아온 것 같았다. 낙조는 놀란 가슴을 잠재우기도 전에 아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굵직하게 엉킨 뿌리들이 바싹 마른 채 땅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필멸수에 젖은 모습과 같았다. 위에 뿌린 필멸수가 이곳까지 퍼졌나, 생각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낙조는 천천히 몸을 바닥으로 내리면서 시야에 들어찬 인영을 보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깜짝아. 장승님이 뿌렸어요?”
“달리기 잘한다고 으스대더니 꼴 좋다.”
“뒤에서 붙잡는 건 반칙이죠. 그리고 저 혼자서 거의 다 할 수 있었어요.”
“벌써 자만하는 거냐? 처음부터 내가 도와준 거라곤 생각 안 하나?”
“……그럼 내가 부른 소리 듣고 온 거예요? 그렇게 가까이 있었어요?”
“내가 한 바퀴를 돌 동안 넌 팔자 좋게 산책이나 하고 있었나 보지.”
낙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허, 하고 기가 찬 숨을 내뱉었다. 무흠은 얼굴 위로 피어오른 비웃음을 숨기지 않고 마음껏 낙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나라고 손도 내밀어주지 않았다. 머쓱해진 상태로 일어난 낙조는 가방을 열어 병이 깨지진 않았나 먼저 확인했다. 다행히 금이 간 것도 없었다. 낙조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서 무흠에게 바짝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근데 나 진짜 열심히 뛰었어요!”
“일단 감사하다고 인사는 해야 하지 않나?”
“고맙다는 말은 장승님도 잘 안 하잖아요.”
“내가 언제 너한테 도움받은 적 있어?”
“…….”
무흠이 뻔뻔하게 물었다. 막상 말하려니 말문이 막혔다. 낙조는 인상을 쓴 채로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당장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설마……. 낙조가 부들부들 떨며 기억을 되살리고 있을 때, 무흠은 먼저 짐을 챙겨 걸음을 옮겼다.
“아! 생각났어요!”
“뭐.”
“그때, 그, 서울에서, 편의점!”
“편의점, 하면 어떻게 알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죠!”
“아니.”
“장승님 그때 나 아니었으면 그 깡패들한테 총 다 빼앗겼을걸요!”
“거 떽떽거리지 마라. 시끄럽게.”
무흠이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살짝 후비며 중얼거렸다. 그리곤 뒤돌아 낙조에게 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말 그만하고 일해. 이래서 오늘 안에 다 돌겠냐?”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 온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낙조는 어금니까지 단단히 깨문 채 가방에서 병을 꺼냈다. 어쩐지 뚜껑을 여는 손등에 핏줄이 불뚝 솟아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흙에 필멸수를 뿌리는 낙조를 뒤돌아본 무흠이 작게 웃었다.
허기가 조금씩 몰려왔다. 위에서부터 말라죽기 시작한 하나의 덩어리는 점차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앞을 가로막거나 발길을 붙잡는 힘은 많이 약해져 쳐내는 것도 쉬웠다. 무흠은 낙조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아래로 내려갔다. 생각보다 필멸수가 흙속에서 퍼지는 속도가 빨라 나무 한 그루씩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을 듯했다. 이윽고 산 밑에 완전히 내려왔을 때, 무흠은 가방 안에 남은 병을 세기 시작했다.
“목 말라요.”
“거기 물 있잖아. 마셔.”
“저기요, 이런 식으로 암살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필멸수가 든 병을 가리키며 마시라고 하는 무흠에게 낙조가 발끈하여 대답했다. 무흠은 여전히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가방을 닫고 차로 돌아갔다.
‘내가 언젠가 저 양반 한 번 맥인다.’
낙조는 옹졸한 가슴으로 다짐하며 무흠의 뒤를 따랐다. 겨울치고는 따스한 햇볕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