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저물지 않는 노을 (2)
귀도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서 무흠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무흠은 열쇠를 등 뒤에 숨기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간부들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이가 귀도였다. 삼승만을 따르는 사람이었기에 다른 간부들도 어려워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생각해 보면, 서천꽃밭의 규칙을 지키는 게 아닌 삼승의 말을 법처럼 어기는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 무흠을 응시하던 귀도가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무흠이 뒤에 숨기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무흠은 큰 손바닥 안에 열쇠를 꽉 가둔 채 보이지 않도록 몸을 살짝 뒤틀었다.
“여기엔 무슨 일로…….”
“여기에 있을 것 같아서.”
“예?”
지위의 높낮이를 가리자면 무흠보다 귀도가 높은 자리에 있었다. 삼승을 보필하고 삼승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 서천에서 귀도는 삼승 다음으로 무시할 수 없는 자이기도 했다.
“재미있는 얘기를 들어서……, 그럼 당연히 이곳에 오겠구나 싶었지.”
귀도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귀찮다는 듯 얘기했다. 계속 힐끔거리며 무흠의 뒤를 보려는 것을, 무흠이 뒤로 물러나면서 가까스로 막아 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까만 물 같은 귀도의 눈동자가 빠르게 무흠에게로 돌아왔다.
“필멸수 찾고 있지?”
“…….”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귀도는 무흠의 정곡을 찔렀다. 열쇠를 쥐고 있던 손이 움찔거렸다. 그녀는 대답 없이 서 있는 무흠을 보면서 웃지도 않고 고개를 혼자서 끄덕였다.
필멸수. 무흠이 낙조에게 ‘약수’라고 표현한 것의 이름이었다. 뿌리로 이 물을 흡수한 식물은 열매도, 꽃도, 이파리도 맺지 못하고 얼마 가지 않아 완전히 죽는다. 그것이 뿌리를 내렸던 흙도 정화하기 전까진 그 어떤 생명도 돌아다니지 못할 만큼 강한 독을 품는다. 그렇기에 사용하는 사람도 엄청난 주의를 필요로 하는 약수였다.
자신과 낙조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까. 무흠은 귀도의 시선을 받으며 머리를 굴렸다. 귀도의 의도를 당장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을 감추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니까. 스스로 파 놓은 함정에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무흠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필멸수는 그럼……, 이미 귀도님께 있겠군요.”
귀도는 무흠의 말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얼굴이 무심하게 무흠의 표정을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무흠에게 내밀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반질반질하고 손때가 조금 탄, 평범하기 그지없는 열쇠였다. 그러나 주변을 떠도는 분위기로 보았을 때, 필멸수가 보관된 곳의 열쇠라는 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무흠은 귀도를 한 번 힐끗 응시했다가 손을 뻗어 열쇠를 쥐려 했다. 손끝이 귀도의 손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귀도는 주먹을 쥐어 열쇠를 도로 가져갔다.
“…….”
“삼승님을 설득해서 될 문제가 아니야, 장승.”
“……귀도님도 그렇게 보십니까.”
“그 얘기에 대해선……, 말할 때가 오면 직접 말할게. 지금은 아니야. 듣는 귀가 너무 많아.”
귀도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은 건 사실이었는지 얼굴이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무흠은 창백한 귀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귀도의 입에서 삼승을 부정하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낙조와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감정이 다시 가슴을 꽉 메웠다. 자신이 맹신했던 지금까지의 삶을 등진다는 것은 꽤 큰 감정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귀도는 무슨 생각을 하며 방을 나왔을까. 왜 삼승에게 가지 않고 낙조의 이야기에 동요했을까.
“장승.”
“예.”
“그 환인이라는 사람……, 얼마나 믿어?”
“고낙조 말씀입니까.”
“응. 낙조……, 내 이름이랑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파도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파도……. 무흠은 머릿속으로 귀도의 이름을 읊다가 그녀가 물은 질문을 되새겼다.
“지금 시점으론……, 믿을 사람은 고낙조 뿐입니다.”
“무시무시한 놈인가 봐. 장승이 그렇게까지 말하는 거 보면.”
“기대하진 마십시오.”
“기대 안 해.”
어느 때나 제자리를 지키며 저 태도를 버리지 않는 귀도였다. 무흠의 말에 동의하는 듯싶다가도 차갑게 식은 대답을 내놓는 모습은 여전했다.
“그럼 귀도님.”
“…….”
“고낙조의 계획은 성공한다고 보십니까.”
“성공……. 장승, <데미안>에 나오는 말 있잖아. 알을 깨고 나오는 새. 새로운 세상을 보기 위해선 가로막고 있는 것을 파괴해야 해. 그런 의미에서 계획에 동의하는 거야.”
손가락에 걸릴 듯 말 듯 귀를 스치는 목소리는 얇았다.
“필멸수는 내 방에 있어. 지금 아니면 시간이 없을 테니까 따라와.”
허공을 응시한 채 말을 읊던 귀도는 이내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흠은 복도로 나가 복도를 걸어 나가는 귀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뒤꿈치를 들고 사뿐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무흠은 그녀가 뒤를 다시 돌아볼 때 발을 움직여 그녀를 따라갔다.
*
“진짜 구해 오셨네요.”
“그 반응 뭐냐.”
“음……, 약간의 고비가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귀도님이 기다리고 계셨어.”
“네?”
“귀도님이 미리 갖고 있다가 주신 거다.”
무흠은 투명한 액체가 든 조그마한 병을 가방에 담으면서 무심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작은 병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던 낙조가 뜻밖의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무흠의 표정은 쉽게 읽을 수 없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긴 했는지 더 입을 열려고 하지도 않았다. 낙조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쥐고 있던 병을 가방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삼승님의……, 아니다, 삼승님을 보필하는 사람이야. 삼승님의 명령으로 청주에 갔다고는 했는데, 그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지.”
“약수를 그럼 왜 그 사람이 갖고 있었던 거예요?”
“조금 찝찝하긴 한데, 네가 나한테 한 얘기를 들으셨다고 했다.”
“장승님보다 무서운 사람인가 보네. 존칭하시는 거 보니까.”
“……너는 이제 남들 몰래 일 꾸미는 게 하나도 안 무서운가 보다?”
해가 뜨고, 간부들이 꽃감관과 꽃성인의 일로 분주할 때 빠져나가기로 했다. 귀도가 아마 상황을 봐줄 거라며, 무흠은 짐을 마저 챙겼다. 그는 빠진 것이 없나 주변을 정리하다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르곤 큰 종이를 하나 챙겨왔다.
“뭐예요?”
“길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여기 지리는 빠삭하게 아는 거 아니었어요?”
“오늘 좀 선을 많이 넘는다, 너. 그냥 내 손에 죽고 싶어?”
“솔직히 저 장승님 이길 자신 있어요.”
“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무흠이 한숨을 터뜨렸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것을 보니, 다른 때와는 달리 정말로 화가 밑에서부터 솟구치는 것 같았다. 낙조는 황급히 ‘물론 장난이죠.’라고 덧붙였다. 사실 자신이 가진 능력이라면 일반 사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이길 수 있었다. 그렇지 않는 까닭은……, 힘을 그런 식으로 남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니까.
‘말실수했네.’
낙조는 속으로 생각하며 조용히 자신의 짐을 챙겼다. 둘만 빠져나가는 것이라 소동이 벌어지지 않도록 밤이에게 남은 일행을 부탁해야 했다. 무흠이 가방을 구석에 숨기는 동안, 낙조는 밤이의 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야 지금 몇 시야…….”
“누나 딱 한 번만, 본론만 얘기할 거니까 잘 들어요. 저랑 장승님이 ‘몰래’ 나가서 근처 산에 독이 든 물을 좀 뿌리고 올 거예요. 그동안 우리 얘기 안 나오도록 잘 둘러대 주세요. 누나 말싸움하면 다 이기잖아요.”
“뭐라고?”
잠이 덜 깨 눈을 비비며 문가에 기대어 서 있던 밤이가 맹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낙조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자신을 꿈벅꿈벅 쳐다보는 밤이의 앞에 선 채로 몸이 서서히 굳는 걸 느꼈다. 어떻게 얘기해야 밤이의 잠을 깨울 수 있을까. 손끝을 매만지며 애를 태우는 사이, 복도 끄트머리에서 무흠이 슬쩍 고개를 내미는 게 보였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낙조는 밤이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 저랑 장승님 지금 아무도 몰래 나갔다 올 거예요. 갔다 와서 얘기해 줄 테니까, 그동안 누가 우리 찾으면 잘 말해 줘요.”
“……난 왜 빼?”
“홍해화랑 홍지운이……, 그게, 그것도 다녀와서 설명해 줄게요.”
“……알았어.”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밤이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낙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문을 살포시 닫았다. 아무래도 새벽 여섯 시도 안 된 시간이니 정신이 없을 게 빤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겨우 안전하고 긴 밤을 보낼 수 있게 됐으니 잠에서 깨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다. 낙조는 무흠이 있는 곳으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넌 가만 보면 송밤이 앞에서 가장 순해지는 것 같다.”
“누나랑 이제 화해했어요?”
“무슨 화해. 우리가 애들도 아니고.”
“어른이면 싸우고 화해 안 해도 되는 거 아니잖아요.”
“나는 그 여자랑 안 맞아. 그냥 하나부터 열까지.”
“……그래도 저번에 빌라 들어갔을 땐 별 말 없이 가셨잖아요?”
문지기는 오전 여섯 시 정각이 되면 시계를 울린다. 문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방이기에 소리를 내지 않고 최대한 빨리 달려야 했다. 문지기가 시간을 확인하곤 미리 자리를 뜨는 게 보였다. 무흠이 낙조에게 가방 하나를 건네주면서 등을 툭 쳤다. 신호였다.
문지기가 등을 보이면서 방에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순간 발을 뗐다. 낙조는 가방을 끌어안고 허리를 숙인 채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무거운 문을 열 때는 긴장이 몇 배로 겹쳐 손이 떨렸다. 사실 주변을 살피기 위한 목적으로 외출을 보고하고 당당하게 나가도 되지만, 무흠을 통해 챙긴 약수가 보통 물건이 아니었기에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계단을 올라갈 때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밟아 올라갔다. 마침내 수풀로 들어서는 문을 위로 열 때, 아래에서 시계 소리가 은은하게 퍼져 울렸다. 낙조는 수풀을 헤집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내내 환풍기가 돌아간다고 해도 바깥의 공기를 직접 들이마시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코끝에서부터 싱그럽고 차가운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적막한 산을 둘러보며, 낙조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무흠이 뒤에서 조용히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간부가 사용하는 차들은 산 뒤쪽에 있었다. 무흠의 차는 생각보다 조그마했다. 거구의 남성 둘이 앞좌석에 몸을 구겨 넣어 앉았다.
‘사다리게임으로 차 고르다가 꽝 나온 거 같은데, 이 정도면.’
낙조는 차마 무흠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끙, 하고 가방을 뒷좌석에 놓았다. 무흠이 곧장 시동을 걸었다. 묵직한 차체가 푸르릉, 하며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낙조는 가만히 앞만 주시하고 있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끝까지 물어보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 혓바닥 위까지 올라왔다.
“근데, 저……, 장승님이 직접 산 차예요?”
“샀다기보다……, 그냥 물려받았다.”
무흠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렇겠지. 오랫동안 탔을 테니까. 아니 근데 주변에서 아무 말도 안 해줬나? 아니면 서천 안에선 물려받은 차가 폐차되기 직전까지 타야 한다는 법이 있나?’
더 말을 얹고 싶지는 않았다. 무흠은 기어를 잡고 천천히 악셀을 밟았다. 뒤로 살짝 빠졌던 차가 왼쪽으로 돌아가며 공터를 빠져나갔다. 확실히 이 주변의 변종들은 이전에 낙조가 처리한 게 전부였는지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낙조는 오랜만에 여유를 갖고 창밖을 응시했다. 이제는 아무도 없을 빈 상가와 낮은 건물들을 보면서 절망을 느끼기보다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라는 의미가 불안함보다 평화로움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저녁 전까지는 돌아가야 해.”
도로를 달리던 중 무흠이 핸들을 꺾으며 중얼거렸다. 낙조는 말없이 차창을 내렸다. 억센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제주의 바람은 무시무시하다고 들었다. 부모님의 장례식 이후 그 어떤 학교 행사도 참여하지 않았기에 수학여행으로 자주 간다던 제주도도 와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와 보네.’
비틀린 세상은 생각보다 낙조에게 수많은 경험을 안겨 주고 있었다. 낙조는 창밖으로 손을 뻗어 손가락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결을 느꼈다. 무흠이 잠깐 낙조 쪽을 돌아보았다가 속도를 더 높였다. 눈이 쉽게 떠지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불어닥쳤다. 낙조는 바람을 삼키듯 입을 살짝 벌리고 숨을 쉬었다. 도로 옆에서 빛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무 한 그루씩 다 뿌릴 거야?”
“네. 뿌리를 일일이 팔 순 없으니까…….”
“기어코 한 번에 다 해야겠어?”
“털고 나왔으면 쓰고 들어가야죠. 삼승님은 절대로 허락 안 해 줄 것 같기도 했고.”
“……이 약수, 흙까지 독으로 오염시킬 수 있어.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긴 하는데, 그건 알아둬라.”
“세상이 새 삶을 시작하는 거죠. 겁 안 나요.”
“그래, 여기까지 와서 무섭다고 하면 진짜…….”
“진짜 뭐요?”
“상상했다가 열 받아서 참는 중이니까 말 걸지 마.”
뭐래……. 무흠은 생각보다 단순한 부분에서 웃긴 사람이었다. 낙조는 실없이 웃고서 다시 창밖을 응시했다. 첫 번째 목적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