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저물지 않는 노을 (1)
의식을 잃은 세성은 곧장 삼승의 명령으로 방에 갇혔다. 세성의 몸에 돌고 있는 피는 예상대로 턱없이 부족했다. 삼승은 세성이 가둬 둔 낙조의 잘려 나간 오른팔을 세성의 방에서 먼 곳에 두라고 지시했다. 무흠이 곧장 유리관을 들고 방을 나섰다. 낙조는 하얗게 질린 세성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무흠을 따라 나왔다. 삼승의 눈길을 피해서 자신의 오른팔에 대해 알아볼 좋은 기회였다.
무흠도 낙조가 따라붙는 순간 눈치를 챘는지 조용히 작고 어두운 방을 택했다. 달랑 스탠드 조명 하나 켜진 곳 옆에 유리관을 내려놓고 무흠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처 다 뽑지 못한 호스가 유리관에 박힌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호스의 끄트머리에선 검붉은 핏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바닥을 조금씩 적시기 시작한 피를 보고서 낙조가 호스를 모두 테이블 위로 올렸다. 무흠은 이마를 짚은 채 입을 열었다.
“……고낙조.”
“네.”
“지금부터 주변을 잘 살펴. 틈을 보이지 말고.”
“……무슨 말이에요.”
“여차하면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으란 말이다.”
“내가 도망을 왜 가요.”
“세성님의 판단이 너무나 흐려졌어. 당장 서천의 내일이 어떻게 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삼승님이 켈리를 완전히 구속이나 할 수 있을까? 네가 한 제안은 당장 뒷전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러니 괜한 희망 품지 말고 알아서 살 길을 도모해.”
무흠이 낙조에게만 건넨 말은 현실적이었으나 어떻게 보면 굉장히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낙조는 묵묵히 말을 듣고 있다가 시선을 유리관 쪽으로 돌렸다.
“판단력이 흐려진 건 장승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요. 귀도가 어떤 사람인진 몰라도, 청주의 감시 없이 켈리를 데리고 왔어요. 이렇게까지 찾지 않는 걸 보면 청주에선 켈리를 대신할 사람을 찾은 것일 테고, 아마 그게 서연우겠죠. 켈리를 인질로 잡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켈리를 이용해서 청주를 흔들어야 해요. 어떻게 해서라도, 서천에 있는 모든 걸 사용해서.”
“…….”
“치료에 쓰이는 식물을 개종할 때, 분명 실패한 것들도 있죠?”
“……그렇지.”
“그런 경우엔 어떻게 해요?”
“뭘 말이냐.”
“물건을 폐기하는 거랑 비슷한 뜻이에요.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요?”
낙조의 질문에 무흠이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리 서천 안의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낙조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개종 비밀까지 말해도 될까. 무흠은 침묵을 이끌다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대답했다.
“꽃이나 열매를 틔우지 못하게 만드는 약수가 있다. 그걸 뿌리지. 시간은 조금 걸리더라도 그대로 멸종하는 거다.”
“여기에도 있어요?”
“뭘 할 생각이냐.”
“작전을 시작해야죠.”
낙조가 손깍지를 끼고서 쪼그려 앉은 채 유리관에 덮인 옛 오른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른손은 낙조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손등을 비추고서 손가락을 모두 감추었다.
“제초제 같은 건가요?”
낙조는 비쩍 마른 손마디를 응시하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화학물질은 아니다.”
“다 죽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사흘은……, 족히 기다려야지.”
무흠은 주저하면서 대답했다. 그의 태도를 보니, 약수를 사용한 적은 몇 번 되지 않은 듯했다. 자세히 약수의 효과에 대해 아는 것 같지도 않았고. 무흠에게 캐묻는 것보다 세성에게 묻는 것이 더 빠를지도 몰랐다. 다만 세성의 상태가 호전되기 전까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점이 거슬렸다.
“어디에 보관하는지는 알아요?”
“예상했겠지만 일반 창고나 온실에는 두지 않아. 꽃감관과 꽃성인이 특별하게 관리하는 곳에 있을 텐데, 둘 다 스파이로 붙잡혀 있으니……, 몰래 따고 들어가는 수밖에.”
“장승님 원래 이렇게 화끈한 사람이었나?”
“유동적인 사람인 거지.”
낙조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무흠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꽃감관과 꽃성인의 방을 뒤지기 위해선 간부들끼리 공유하는 복도를 걸어야 했다. 그곳에서 다른 간부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명목이 필요했다. 붙잡혀도 혀로 휘두를 수 있는 명목.
“새벽 세 시에 나가서 가져오면, 그 다음엔 어쩔 생각이야.”
“나무에게 물을 주듯이 뿌릴 겁니다. 그리고……, 제대로 청소를 시작해야죠.”
여전히 유리관에 눈을 두고 있는 낙조의 시선은 꼿꼿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평소보다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서 무흠을 돌아보았다.
“어차피 켈리는 깨어나고도 입을 열 생각이 없을 테니까요.”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된다. 이미 자료가 우리 쪽으로 넘어온 것도 그렇고…….”
“그것 갖고 되겠어요?”
“서천에서 아픈 사람들을 선택한 후 거치는 일이 있다.”
주머니에서 낡은 열쇠를 꺼내 들며 무흠이 중얼거렸다. 이렇다 할 설명 없이 내놓는 말에 낙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곳이네요.”
“무슨 뜻이야.”
“내가 뭘 선택하든 상상 이상이라는 거죠. 그 일에도 약수 같은 걸 써요?”
“이번엔 약수가 아니라 약초. 그리고 그건…….”
“그건?”
어쩐지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무흠에게 낙조가 되물었다. 그는 낡은 열쇠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입맛을 다셨다.
“약초다. 먹으면 혀가 녹는 고통을 느껴져. 거짓말을 못 하게 하는 거지.”
“겉으로는 사람을 살린다더니,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시험하는 검문소였네요.”
바짝 날이 선 낙조의 말에도 무흠은 동요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낙조를 피해 그가 몸을 틀었다. 낙조는 그대로 자신을 지나치려는 무흠의 손목을 붙잡고, 여전히 시선은 앞에 둔 채 말했다.
“그걸 켈리에게 먹여서, 뭘 알아낼 건데요?”
“너라면 뭘 묻고 싶은데?”
되려 질문을 꺾은 무흠이 낙조를 돌아보았다. 낙조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무흠이 쥐고 있는 낡은 열쇠를 응시했다.
묻고 싶은 것. 진실밖에 대답하지 못하는 입을 가진 켈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다. 그러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을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원망뿐이었다. 아무리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거짓은 아니지만 진실을 오묘하게 피해 가는 대답은 할 수 있을 테다. 켈리라면 더더욱.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 갇혀서 살 방도를 찾기보다 자신의 계획을 서연우가 대신 이행할 수 있도록 시간만 끌 수도 있다.
무얼 질문해야 하지? 무흠의 질문에 온몸이 굳은 듯 혼란스러워졌다. 무흠은 그런 낙조를 가만히 곁에서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어려워할 거 없다.”
“…….”
“수뇌부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지 않겠어?”
“그건……, 악어와 새였잖아요. 이미 불타서…….”
“그 여자가 거기서 오래 둥지를 틀었다고 본거지라 확신할 수 없다. 지금까지 네가 말한 대로 그 여자를 생각하면, 이런 상황을 생각 못 했을 리 없어. 서연우를 자신의 후임자로 지정할 만큼 오랫동안 계획한 일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진……,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흠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낙조는 얕은 날숨을 뱉어냈다.
무흠의 말대로 생각한다면 질문의 폭은 훨씬 좁아진다. 이십 년이 넘을 정도로 켈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엄청난 짓들을 저질러 왔다. 그 시간에 긁히고 파묻힌 사람들의 넋을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까지 하면서 켈리가 단지 서천을 망치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움직였을까. 그녀를 조종한 욕망을 얕볼 순 없었다. 어디를 생각하든 그녀는 항상 그 이상을 보여주었으니까.
이십 년이 넘도록 만들어진 것……. 낙조는 어두운 방에서 눈을 굴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세월 간 키울 수 있는 건,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은 아주 가까운 것이었다.
“나무.”
낙조가 허탈하게 단어를 토해 냈다. 무흠은 꼿꼿하게 고개를 세운 채 미동도 없이 낙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맞죠.”
“…….”
“가장 먼저, 변이를 시작한 나무가 있는 거예요. 그 뿌리에서부터 시작된 거예요…….”
“감이 왔나?”
“사람들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켈리는 하루하루를 계획대로 살았던 거잖아요.”
낙조는 스스로 상황을 정리해 가면서 차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자란 손톱이 손바닥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살갗이 찢기는 고통을 알면서도 주먹을 놓지 못했다.
*
무흠은 손바닥 안으로 열쇠를 굴리면서 초침이 지나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세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복도는 여전히 환했으나 잡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자정이 지난 후부턴 그 누구도 무흠의 방 앞을 지나가지 않았다.
낙조에게 큰소리를 치긴 했으나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꽃감관과 꽃성인이 징계를 기다리는 사이, 그들의 방을 다른 간부들이 수색했을 게 분명했다. 그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건드리지 않고 약수만 찾으면 되는 일이었다. 말로는 쉬운 일이었다. 이 시간에는 대부분 잠들어 있겠지만, 만약의 일이 벌어진다면 자신 또한 의심을 뚫지 못하고 함께 잡힐 게 빤했다.
‘변명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겠군.’
틱, 탁. 초침이 ‘12’를 가리킴과 동시에 무흠의 머릿속에서도 생각이 정리됐다. 약수의 쓰임새를 아는 사람이니 그것이 필요해서 가져오려 했다. 이 이유보다 당당할 수 있는 상황은 없었다. 자신도 서천을 지키는 간부 중 하나였고, 서천을 지키는 명목하에 약수가 필요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등 뒤로 문을 닫은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겉으론 대담하게 나왔으나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칠 수 있었다. 무표정을 잃지 않는 게 중요했다. 환하게 복도를 비추는 불빛 아래를 지나며, 무흠은 혹여 발소리가 들리지는 않나 귀를 기울여 걸었다. 자신의 발소리의 기척도 최대한 죽이고서.
물을 주듯 변이된 나무에 약수를 뿌린다…….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낙조의 말만큼 쉽게 처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분명히 예기치 않은 변수가 하나쯤은 생길 테다. 그럼에도 낙조의 말을 듣기로 한 건,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서천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삼승은 귀도와 꽃감관, 꽃성인의 일로 정신이 없고 세성 또한 힘을 잃어 서천을 관리할 수 없는 상태다. 다른 간부들은 세상과 서천 내부가 시끄러워진 틈을 타 이곳에서 빠져나갈 틈을 보고 있는 듯했다. 진심으로 이곳을 지키려는 자가 얼마나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꽃감관의 방문 앞에 걸음이 멈췄다.
꽃성인의 방을 두 번째 후보로 둔 것은 꽃감관이 꽃성인보다 서천 내부의 일을 잘하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생각이기도 했으나 그런 사소한 것을 생각하면, 다루기 까다로운 것들은 꽃감관이 맡아 돌보았을 수 있겠다는 추측이기도 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간부들이 엉망으로 뒤집고 난 방을 돌아보면서, 무흠은 복도 불빛에 의지해 벽을 더듬거렸다.
꽃감관이라면 약수를 어디에 보관해 두었을까. 평소 그와 대화를 나눈 적이 많지 않아 성격을 파악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무흠은 무릎을 굽혀 시선을 낮추었다. 손이 쉽게 가지 않을 곳, 웬만해선 시선에 잘 띄지 않는 곳…….
“뭐 찾아?”
복도 불빛이 약해진다 싶더니, 무흠의 등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졌다.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흠은 그대로 열쇠를 쥔 채 얼어붙었다.
“뭐 찾냐고.”
귓가에 닿자마자 서늘해지는 온몸의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귀도가, 등 뒤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