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구해줘 (2)
귀도는 자신의 방에서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켈리 또한 의식을 되찾지 못하는 상태였다. 서천을 둘러싼 분위기가 점차 침체하고 있다는 생각은 낙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삼승에게 협박 비슷한 제안을 한 이후로 삼승은 낙조를 찾지 않았다. 세성은 어딘가 모르게 점점 안색이 나빠지고 있었다. 각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화가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던 며칠 동안 무흠과 밤이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도, 또 그렇게 좋지도 않게 이어졌다. 낙조의 눈으로 보기엔 일행으로 지내기엔 별 문제가 없겠다는 게 끝이었다. 지운은 해화의 상태가 좋아지는 만큼 기력을 되찾고 있었다. 해화는 종종 악몽을 꾸며 지난 일들에 대해 공포를 호소하기도 했으나 현실로 돌아오는 속도가 그리 늦지는 않았다.
며칠 조용했던 서천이 다시 시끄러워지게 된 건 해가 질 때쯤이었다. 세성, 무흠과 함께 태운 대추 향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 산 밑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길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떠들썩한 소리에 세성이 먼저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한숨을 쉬었다. 뒤이어 상황을 파악한 무흠이 낙조를 방으로 데리고 가려고 할 때였다.
“그냥 두어. 쟤한테 이제 아무것도 숨기면 안 돼.”
“예? 하지만 세성님.”
“이제는 고낙조의 눈과 귀를 믿어야 해. 장승, 알았어?”
“……알겠습니다.”
낙조 혼자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주고받은 둘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복도를 걸었다. 여기저기 서서 수군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꼭 이명처럼 울렸다. 쉽게 마주칠 수 없었던 하늘마루의 사람들은 대부분 각 간부 밑에서 일하는 이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한곳에 모여 수군거리고 있다는 건, 간부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낙조는 세성의 뒤를 따르며 애써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모두 목소리들 낮춰. 이 일이 자랑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던 세성이 갑작스럽게 걸음을 멈추고서 소리를 높였다. 그가 짓는 웃음이 항상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얼굴을 험악하게 구긴 세성은 또 낯설었기에 낙조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다시 새하얀 도포를 갖춰 입은 세성의 모습은 이전과 달라진 것 없어 보였으나 어딘가 위태로워 보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곧장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닫으니 복도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세성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더니, 더욱 깊은 곳으로 가는 복도의 문을 열었다. 안쪽에선 이미 많은 이들이 모였는지 낯선 목소리가 이리저리 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성은 문 앞에 서서 낙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에 하늘마루의 모든 간부가 모여 있을 거다. 너에게 무엇을 물어보든 대답하지 말고, 삼승님과 내 물음에만 대답해. 눈치 보지 마.”
“……저랑 관련된 일입니까?”
“아니, 그냥 서천이 지금 얼마나 아수라장인지 보여 주는 거야. 니가 서천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곳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거 아니야.”
세성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갓을 벗었다. 그의 이마엔 식은땀이 조금 맺혀 있었다. 이윽고 세성이 문을 두 번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갔다. 웅성대던 소리가 그제야 선명해졌다. 낙조의 뒤로 무흠이 따라 들어오고,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낙조에게로 쏠렸다.
‘삼승님에게 얘기를 들었나?’
삼승과 대립했던 날을 떠올리며 낙조는 마른침을 삼켰다.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공간의 무게감이 단번에 와 닿았다.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 걸어가는 세성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한곳에 뭉친 간부들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시선을 받아 내기만 해도 버거웠다. 낙조는 세성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숨을 깊게 머금었다. 이끼가 잔뜩 낀 어항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그래서 꽃감관과 꽃성인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까.”
“나한테 묻는 거야?”
“세성님께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에…….”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간부들은 대부분 중년의 나이를 넘어선 듯 보였다. 꽃감관, 꽃성인……. 듣기로는 처음 듣는 인물들이었다. 이름으로 들리진 않았고, 모두 간부라고 하였으니 간부의 지위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세성은 피곤하다는 듯 말하면서 손을 휘저었다. 그제야 꽁꽁 뭉쳐 있던 그들이 양쪽으로 흩어졌다.
“꽃감관과 꽃성인. 청주에서 보내는 보고서를 삼승님과 내게 전달하는 일을 맡고 있었어. 그런데 알고 보니 켈리에게 이미 넘어갔더라고. 이전부터 내 식사에 켈리가 만든 독초를 섞어 올리면서…….”
세성은 쓸쓸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낙조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간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남자와 여자 두 명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모습을 보였다. 다른 간부들보다는 젊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낙조가 세성의 말을 기울여 듣다가 ‘독초’란 말에 잠시 몸을 주춤거렸다. 세성은 여전히 그 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청주에서 보낸 보고서에서 중요한 정보를 지워 나에게 올렸다가, 귀도가 켈리를 잡은 이후로 상황이 역전된다 싶으니까 다시 보고서를 원본으로 돌렸어. 그 정도로 삼승님과 나를 우습게 본 거야.”
“아닙니다, 아닙니다, 세성님!”
“…….”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켈리 그 여자가, 서천꽃밭의 사람들은 살려주겠다면서 협박을 했습니다. 정말, 서천 사람들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여자 꽃성인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외쳤다.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절대로 정당하게 들릴 수 없는 변명이었다. 세성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서 낙조에게 마저 말했다.
“게다가 켈리가 직접 만든 독초는 내 식사에만 올렸어. 귀도가 자리를 비웠을 때도 삼승님의 밥엔 건들지도 않았더라고.”
“……무슨 독을 가진 독초였나요?”
가만히 듣고 있던 낙조가 세성에게 물었다. 세성은 잠시 입을 다물고 꽃감관과 꽃성인을 바라보다가 낙조의 소매를 잡아당겨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아주 가까워진 거리에 낙조가 허리를 어정쩡하게 숙이고 있자, 세성이 가볍게 스치고 달아날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능력을 퇴화시켰어. 나는 이제 무언가를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해. 산 송장과 다름이 없어.”
“……그게 무슨…….”
“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들이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세성은 말을 마치고서 낙조를 놓아주었다. 낙조는 좀처럼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세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에 서 있던 무흠이 낙조를 자신의 뒤로 숨기곤 세성의 곁에 섰다. 세성의 말을 듣고 보니, 세성을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간부들의 눈빛은 불신과 앙심으로 뒤덮여 있었다.
‘저런 사람들이 정말 이곳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맞나?’
지금까지 낙조가 만난 서천의 사람들은, 서천의 이름 앞에선 정의로웠고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삼승이 벌인 짓이 있긴 했지만 알아채기 전까진 명명백백 서천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보이는 사람이었기에 첫인상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눈앞에 서 있는 간부들의 얼굴은 탐욕과 시기,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저런 자들이 지금까지 서천을 지켜왔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지나치게 속세의 욕망에 물든 표정을 하고서 세성을 바라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들인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세성은 점잖은 자세로 간부들에게 물었다. 낙조는 엉엉 울기만 하는 꽃성인과,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는 꽃감관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섣불리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다.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깊게 들이마신 숨을 함부로 내뱉을 수도 없었다. 낙조는 주먹을 꽉 쥔 채 울음을 그치지 않는 꽃성인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린 게 왜 저리 말이 많아,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해? 켈리 그 년이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흐리멍덩하게 울리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낙조는 눈에 힘을 주고서 조금 더 여자를 주시했다. 울음기보단 발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겉으로는 곡소리에 가까운 울음을 내뱉고 있으면서, 속으론 이 상황이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듯했다.
그에 비해 남자 간부인, 꽃감관에게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꼿꼿하게 앉은 자세로 고개만 숙인 채 있는 그는 여자와 달리 묵묵히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로 잠깐 시선을 돌려보았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뭐가 들려?”
“……예?”
“둘 중에 하나는 정말 서천을 위해서 켈리의 말을 어쩔 수 없이 따랐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켈리에게 복종한 채로 일을 했어. 누구 같아?”
세성의 질문은 간결하면서도 많은 것을 꿰뚫고 있었다. 낙조는 당황하지 않고 다시 침착하게 남자와 여자 간부를 번갈아 보았다. 세성의 말에 꽃성인이 눈물 젖은 얼굴로 낙조를 억울하게 쳐다보았다. 제가 아닙니다! 왜 그렇게 저를 의심하십니까! 절절한 목소리에 주변에 서 있던 몇몇 간부가 눈을 감는 게 보였다. 낙조는 가만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남자가……, 꽃감관인가요?”
“맞아.”
“그렇다면 꽃성인이 켈리의 수하예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누구에게도 충성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낙조의 대답에 세성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반대로 여자 간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저 안경잡이 놈이 뭘 안다고 저것의 말을 들으십니까! 제가 언제부터 서천에서 몸과 피를 바쳐 일했는데요! 그 누구보다 세성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세성님!”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항상 내 식사에 독초를 넣은 게 자네이지 않은가.”
끝까지 앉아 있던 세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뗐다. 그의 말에 악을 지르던 여자 간부의 입이 꾹 닫혔다. 낙조는 무흠의 어깨 뒤에 서서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세성은 여자 앞으로 다가가 뒷짐을 진 채 허리를 굽혔다. 지금까지 들은 세성의 말투가 아닌, 옛사람 같은 느낌이 묻어 나왔다. 세성의 식사에 독초를 직접 넣은 사람……. 낙조는 세성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간부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 중 몇몇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닿자마자 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돌렸다. 세성이 왜 방에 들어오기 전, 서천을 아수라장이라고 표현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세상이 아무리 썩고 있다고 해도 이런 곳에는 빛이 들 줄 알았다.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이었다. 낙조는 두 눈을 뜨고서 그 믿음이 박살 나는 순간을 지켰다. 그리고 이런 순간을 몇 번이고 거쳤을 무흠은, 아무 말도 없이 낙조의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
꽃성인이 어떻게 됐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서천의 병사들이 그녀를 끌고 나갔다는 것까지 보고서 세성, 무흠과 함께 방을 나왔기 때문이었다. 보고 듣는 능력을 잃었다는 세성의 말을 되짚어보니, 며칠 동안 그가 왜 그리도 우울한 모습을 보였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세성은 무흠과 낙조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생각보다 아담한 방 가운데엔 수묵화가 그려진 8폭 병풍이 놓여 있었다.
“앉아.”
세성은 병풍 앞에 놓인 두툼한 방석에 앉으며 무흠과 낙조에게 말했다. 무흠은 익숙하게 신발을 벗고 세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낙조도 뒤늦게 신발을 벗고선 무흠의 곁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세성의 좌식 책상 위엔 한자로 쓰이거나 한글과 섞여 쓰인 오래된 책들이 쌓여 있었다. 세성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인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낙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성이 먼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사람이 죽었다가 태어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렇게 기다리다가 받은 질문은 엉뚱했다. 낙조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온 질문에 눈을 잠시 깜박거렸다. 세성은 미소 짓고 있었다. 무흠을 돌아보니 편히 대답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심장이 잠깐 멈췄다가 살아난 사나이, 이런 거요.”
“하하, 맞아. 있지.”
‘불안하게 뭔 얘기를 하려고…….’
낙조는 덜컥 속으로 중얼거린 말에 깜짝 놀랐다가, 더 이상 세성이 자신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차분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세성은 오래된 책 귀퉁이를 매만지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죽은 지 이백 년이 흐르고 나서 살아났다면, 믿을 테냐?”
세성의 말투는 아주 어렸을 적, 시골에 내려가서 들었던 할아버지의 말투와도 비슷해져 있었다.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기시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깨달은 낙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세성이 자신에게 묻고 있는 질문들과 자신이 느끼고 있는 기시감이 함께 가리키고 있는 대답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시든 믿을게요. 그냥 얘기해 주세요. 시험하지 마시고.”
낙조는 강단 있게 대답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리거나 속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전적으로 믿고자 하는 사람은 서천에 속한 이는 아니었다. 태풍에 휩쓸려 오지에 떨어진 것과 같은 기분이었기에 온갖 상황에서 이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싶지도 않았다. 낙조의 대답에 세성은 오히려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그는 이내 웃음기를 거두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좋다, 이 정도라면 모든 걸 맡겨도 되겠어.”
“……맡겠다고……, 얘기하진 않았는데요.”
“그래, 그래. 그럼 내 얘기를 일단 들어보거라.”
세성은 긴 소매를 걷고서 고운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한참이고 바닥만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낙조는 무흠이 곁에서 주먹을 꽉 쥐는 걸 보았다.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백 년 전에 죽었었다. 생매장을 당했지. 산 채로 땅에 묻혔단 말이야. 나를 죽인 자들이 내가 묻힌 곳 위에 꽃나무를 심었다. 나의 한을 먹고 자란 것이 얼마나 해마다 아름답게 피었는지……, 이백 년이 지난 후에도 함부로 그 나무를 베거나 뽑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십 년은 되었을까……, 삼승님이 내가 묻힌 곳을 다시 파내 나를 찾아내셨지. 살과 뼈 모두 썩지 않고 그대로였다고 하셨다. 피살이풀만 사용했고, 내가 눈을 떴지. 서천꽃밭에서.”
“…….”
“저승길에 한 번 다녀온 이는 마치 ‘신’처럼……,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거나 사람의 속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되살아나기 전에 있었던 삶은 기억하지 못해. 저승길에 두고 온 탓이겠지.”
세성의 하얗고 고운 피부와 이목구비를 보아서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을까, 하는 외모였다. 이백 년, 이라는 시간 동안 흙에 갇힌 채 그의 혼은 저승길을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낙조는 세성이 혼자 헛웃음을 치는 걸 보고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쩐지 듣기만 하는데도 죄를 짓는 것처럼 고개가 무거워졌다. 눈물이 고이지는 않았으나 눈가가 뜨거워지기도 했다. 세성의 목소리 끄트머리에 자신을 미적지근하게 찌르는, 뜨거운 가시가 있는 것 같았다.
“삼승님께 여쭤본 적이 있어. 어떻게 나를 찾으셨냐고. 꽃나무가 필 수 없는 곳에 피어 있기에 파보았다고 하셨다. 아무리 독한 꽃이라도 그만큼 아름답게 필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가끔은 그렇게도 생각한다. 내 육신이 죽은 동안 내가 꽃나무가 된 것은 아니었는지. 흐드러지게 피어나 누군가 나를 발견해 주기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지……. 그런 생각이 든다.”
“……세성님.”
“그리고 지금은, 죽기 전의 삶이 기억이 나. 그리고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이 애원하는 소리도 들린다. 정반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거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읽지 못하게 되니, 죽은 자들의 소리가 들리는 게지. 동시에 낙조 네게 그 능력이 생겨나지 않았니. 그 능력을 한 번 거하게 써 보거라. 나처럼 누군가의 뒤에 숨어서 살지 말고.”
세성은 손을 뻗어 낙조의 소매를 쥐었다. 눈을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손을 움직여, 세성의 마르고 하얀 손을 덮어 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세성이 눈물 고인 눈으로 자신에게 마치 구해 달라는 듯 외치고 있는 듯하여, 낙조는 오래도록 그의 손을 놓아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