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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58화 (158/202)

158화. 구해줘 (1)

해화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낙조였다. 켈리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할 것들이 많았기에 삼승에게 가려고 준비할 때였다. 해화가 의식을 찾았다는 것에 놀라는 것도 잠시, 자신을 급히 찾는다는 말에 낙조는 지운을 따라 방을 박차고 나갔다.

무흠의 말대로라면 점심 때쯤을 넘겨야 했다. 아침이 다 밝지도 않은 시간에 깨어나자마자 자신을 찾는다는 게 조금은 의아했다. 혹여 해화의 몸에 녀석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은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해화가 있는 방에 도착했을 때, 낙조는 아주 오랜만에 그녀의 가지런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해화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새벽녘에 찾아왔던 날과는 분명 달랐다. 얼굴 위에 드러난 표정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탐욕스럽게 눈을 굴리며 목소리를 배배 꼬던 녀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낙조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방 안에 발을 디뎠다. 인기척에 해화가 고개를 들었다. 지운과 함께 해화를 보고 있었는지, 방 안엔 밤이도 있었다.

해화와 눈을 마주한 낙조는 가벼운 한숨을 토해 냈다. 이제야 그녀의 눈을 보고도 웃을 수 있게 됐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시선이 낙조를 반겼다. 해화는 물끄러미 낙조를 응시하다가 비쩍 마른 손을 들어 흔들었다. 오랜만에 하는 인사였다. 낙조는 해화가 앉은 침대 쪽으로 다가가 해화의 얇은 검지를 살짝 쥐고서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내가 무슨……, 니가 다 했지.”

“……다 기억나?”

“응.”

해화는 굳이 말을 길게 끌지 않았다. 가만히 낙조의 손에 붙들린 채, 해화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지나칠 정도로 평온한 태도에 금세 몸에 긴장이 돌았다. 낙조는 침대에 걸터앉아 다시 물었다.

“물이라도 좀 마셨어?”

“고낙조.”

“……어.”

“너……, 내가 나오는 이상한 꿈 꾼 적 있어?”

해화는 공허한 시선을 들고 이불을 꽉 쥔 채 낙조에게 물었다. 이상한 꿈.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꿈이 있었다. 거제도에서 환각을 일으키듯 자신을 자꾸만 무너뜨리려는 꿈이었다. 켈리에게 저주를 받은 것처럼 몸을 맘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붉은 꿈부터 시작하여, 발목이 다 망가진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해화.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로 정체를 속이고서 자신의 기억을 갉아먹은 썩은 혼. 낙조는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까 하다가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을 생각했다.

“너 발목이 부러진 채 나한테 와서 정체가 뭐냐고 물어본 꿈.”

“…….”

“니가 그때 말 못 한 게 있었는데, 그때 산에서 잠들지 않은 나무가 나를 불렀다고 했어.”

“그거……, 그 말을 한 게 진짜 나라고 생각해?”

“아니.”

해화의 목소리는 작았다. 여기저기 긁히고 부서져서 말할 때마다 모래가 흩날리는 것 같았다. 낙조는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화가 천천히 낙조를 향해 눈을 들어 올렸다.

“너라고 생각 안 해.”

“왜?”

“내 이름을 너무 친절하게 불러서.”

“……그게 다야?”

“너였으면, 그런 식으로 나한테서 뭘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거고. 내 정체가 뭐냐고 아득바득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지도 않았을 테니까.”

낙조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해화의 고개가 다시금 떨어졌다. 잠자코 곁에서 듣고 있던 지운이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해화의 손을 쥐었다. 밤이는 건너편 침대에 앉은 채 낙조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물어볼게. 갑자기 꿈에 대해 왜 궁금해졌어?”

“…….”

“말해도 돼. 이제 진짜 다 괜찮아.”

“처음 이상한 꿈을 꾼 건 그때야. 한 달 동안 잠들었다고 했을 때. 거제도……, 거기서.”

해화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상기시키며 이를 악물었다. 일행에게 짐을 얹어주기도 싫었고, 그때만 하더라도 스스로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몸과 마음이 지쳐 그저 악몽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악몽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가끔씩 누군가 자신을 조종하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해화는 가장 떠올리기 싫은 꿈을 꾸었다.

“나랑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나를 등지고서 앉아 있었어. 처음엔 나인 줄 몰랐고. ……가만히 앉아서 뭘 중얼거리기만 하길래,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서 가까이 갔어. 바로 뒤에 서니까 그제야 들리더라. 그 여자가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어.”

“…….”

“고낙조 니 이름. 고낙조, 고낙조, 하면서 계속 중얼거리는 거야.”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해화가 이불을 세게 쥐었다. 낙조가 켈리의 약초에 중독됐을 때 보인 환각부터 시작된 것과 비슷했다. 낙조는 해화를 달래기 위해 굳이 크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잘 듣고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고개를 조용히 끄덕일 뿐이었다. 해화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풀어내며 입을 뗐다.

“그 다음부턴, 좀 심해졌어. 분명 내 얼굴인데, 마주보고 있으니까 불쾌한 거야. 거울을 볼 때랑은 너무 다른……, 느낌이었어.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래. ‘낙조가 누구야?’ 정말……,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이후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오더라. 너……, 잘라낸 오른팔 있잖아. 대화하고 나서, 그때부터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어. 생각도 안 했던 말이 멋대로 나오고. 내 안에서 누가 입을 막기도 했어.”

눈 뜬 채로 숨이 조여 온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해화는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악몽에만 나타나던 여자는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종종 거울 안에 비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녀의 몸을 멋대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힘을 주어도 깨어나지 않는 가위에 눌린 것처럼 해화는 자신의 몸속에서 말라갈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해화가 할 수 있는 건 악몽 속 그녀가 주변을 휘젓고 다니는 걸 관전하는 것뿐이었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계획이 틀어질 말을 가까스로 내뱉더라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화의 말을 무시하며 상황을 만들어 갔다. 이따금 몸 안에 갇힌 해화에게 낙조에 대해 묻기도 했더랬다.

「고낙조에 대한 정보가 이것밖에 없어? 정말 더 없는 거야? 어떻게 힘을 쓰는지조차 몰라?」

「팔이 뜯겨나갈 정도면 엄청난데……, 서천이란 곳 정말 우스운 놈들만 모였다. 어쩜, 이런 걸 꽁꽁 숨겨 두고 자기들끼리만 살려고 한 거 아니야? 개새끼들…….」

「가만히 좀 있어, 얘. 내가 너 죽일 수도 있는데, 봐주고 있는 거야. 그럼 좀 고마워할 줄 알아야지. 어른한테 예의가 없네. 대화할 수 있는 것 가지고 생색이라도 내는 거야?」

여자의 만행이 길어질수록 해화의 반항도 거세졌다. 그러나 여자는 이미 해화의 몸 반절을 다 삼킨 상태였다. 해화의 의식을 짓누를 수 있을 때가 됐을 때, 그녀는 해화의 몸부림을 무시하고 새벽에 낙조의 방에 들어갔다. 여기서부턴 낙조도 기억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해화는 고개를 저으며, 정말로 자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낙조는 조용히 해화의 어깨에 손을 올려 도담도담 토닥여 주었다.

“그럼……, 도망친 후에 그 여자가 변종들을 깨워서 여기로 보냈다는 거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밤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해화가 서천에서 나간 이후, 가장 많은 변종들이 들이닥쳤던 때를 말하는 듯했다. 해화는 두 손을 꼭 모아 잡고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밤이는 이마를 짚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뿌리들은 어떻게 움직인 거야? 명령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대화가 가능했어?”

“……그건, 오로지 내 능력으로만 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이미 변이된 여자가 손을 조금 썼을 거예요.”

“지독하네, 지독해. 그럼 공격한 이유도 별 거 없겠네. 그지?”

“그냥 앙갚음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어디서 자기를 건드냐고……, 멍청하고 쓸모없는 놈들이라면서, 나한테 욕을 그렇게 퍼부었으니까.”

“미친년……, 아오, 나도 그년 목을 한 번 쥐어뜯었어야 하는 건데.”

밤이는 분하다는 듯 꽉 막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낙조는 해화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잠시 생각했다. 해화가 정말 모든 걸 기억한다면, 빌라에서 있었던 일도 기억할 게 당연했다. 어떻게 그런 곳을 발견하고, 꽃봉오리를 피우고, 그 안에 변종을 키울 수 있었는지. 그 능력이 해화의 것인지, 아니면 그 변종 여자의 짓인지 구별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런 낌새를 보이는 변종들을 일찍이 처리하는 게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낙조는 가만히 해화를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빌라에 간 것도……, 그 여자가 데리고 간 거야?”

“응.”

“그럼 거기서 어떻게 그런 걸 다 만들었어?”

“변종을 모으는 건 하루 만에 끝났어. 변종들을 먹여 살릴 꽃봉오리를 만드는 데에 며칠 걸렸지. 덫처럼 꽃봉오리를 놓고 변종들이 진액 냄새에 끌려오면 바로 잎을 닫는 거야.”

“꽃봉오리는,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데.”

“내 몸에……, 뭘 퍼뜨렸어. 순식간에 발목에서 꽃봉오리가 자라났어.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그게 계속 자라더라. 그리고 힘을 다 썼는지, 마지막엔 내 몸을 넣더라고. 그 여자가 잠들고서, 정말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어. 잠들 수가 없었어. 여자가 시킨 짓들을 생각해 보면 잠도 안 오더라. 정말 이러다가 완전히 내 몸을 빼앗기는 건 아닌가 싶어서…….”

“됐어, 이제 더 얘기 안 해도 돼.”

낙조는 해화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해화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끈질기게 방 안을 맴돌았다. 낙조는 침대에서 일어나 지운에게 말했다.

“이제 약 좀 먹여야겠다.”

“어? 응.”

지운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그래도 해화가 살아 돌아왔다는 것과, 이제는 멀쩡하다는 점이 지운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북돋아 준 듯했다. 낙조는 밤이와 함께 방을 나오면서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밤이 또한 쉽사리 입을 열 수 없는지 곁에서 옅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복도의 끝에 다다랐을 때, 무흠이 코너를 꺾으며 둘 앞에 나타났다. 그들을 찾으러 온 건 아닌지, 무흠도 조금 놀라면서 낙조와 밤이를 바라보았다.

“홍해화 일어났어. 근데 가서 뭐 물어보진 마. 애 완전 지쳐 있으니까.”

“벌써 눈을 떴나?”

“에휴, 몰라. 상태가 말이 아니야. 약이나 잘 챙겨 줘.”

밤이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무흠에게 말했다. 무흠은 잠시 서서 해화의 방 쪽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낙조를 붙잡았다.

“얘기는 대충 들은 것 같은데. 완전히 돌아온 건 확인했어?”

“네. 홍해화 맞아요. 눈빛도, 목소리도……. 다 걔 거예요.”

“근데 네가 왜 이렇게 풀이 죽어있어?”

“홍해화 몸속에 들어간 그 변종이……, 홍해화 몸에 뭘 퍼뜨렸대요. 그랬더니 발목에서 우리 거기, 빌라에서 봤던 꽃봉오리 있죠. 그게 생겨났대요. 그럼 아직 몸에 바이러스 같은 게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앞으로 항체가 더욱 건강해질 테니 그 바이러스가 더 늘어나진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근데 더 신경 쓰이는 건……, 홍해화도 알아채지 못하게 천천히 몸을 장악했다는 게 이상해요. 아무리 원래 사람이었다고 해도, 변이식물에게 잡혀 죽었는데, 그게 가능해요? 그것도 능력을 빼앗고 홍해화 의지는 상관없이 자기 맘대로 변종을 불러들이고 병사처럼 썼어요. 그때 이곳을 공격한 나무뿌리도, 다 그 변종 짓이었고요. ……이게 가능한 거예요?”

낙조는 차마 방 안에서 뱉을 수 없었던 말을 쏟아 냈다. 밤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낙조의 말을 말리진 않았다. 잠자코 낙조의 말을 끝까지 들은 무흠은 흠, 하고 짧게 숨을 내뱉곤 대답했다.

“그래서 구천에도 가지 않은 혼이 위험한 거다.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살아 있는 이들에게 매번 앙심을 품고 어떻게든 자신이 살아 있음을 스스로에게 알려 주는 거지.”

무흠은 낙조가 적당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얘기했다. 순환하는 세상의 법칙 같은 것을 함부로 알아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순간 지금 쥐고 있는 것 전부를 놓으려 할 수도 있다. 지금보다 어렸던 무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자주 찾아오곤 했었다. 자신이 겪으며 느낀 것을 그대로 전할 수 없었다. 낙조는 무흠의 말을 듣고서 한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말도 안 된다며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 맞다.”

고요해진 복도에 서서, 밤이가 낙조를 흘낏 바라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너 홍해화랑 둘이 있을 때, 홍해화가 변종 소리 냈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나랑 홍지운이 들었다니까. 여기, 장승 양반도 들었을걸? 까각, 까가각……. 이런 소리. 근데, 이건 확실하진 않은데, 네 목소리도 좀 섞여 있었던 것 같아서.”

“……그런 소리 낸 적 없어요. 그냥 말만 했는데.”

낙조는 고래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밤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흠에게 물었다. 당신도 듣지 않았느냐고. 무흠은 낙조와 밤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 내가 진짜 잘못 들은 거야?”

“……그렇게 똑똑하단 사람이, 이 정도도 유추를 못 하나?”

“갑자기 얘기가 왜 그렇게 되지? 내가 똑똑한 거랑 무슨 상관이야.”

“이 사태가 일어나고 변종만 연구했다면서, 연결고리는 찾지 못한 것 같군.”

“말 길게 늘이지 말고 본론만 말해라 진짜. 시비 걸지 말고.”

어쩐지 대화가 좋게 흘러간다 싶었다. 낙조는 둘 사이에서 눈을 깜박이다가 무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흠은 아직 할 말이 많은 듯 밤이를 잠시 노려보았다. 져주지 않겠다는 듯 밤이 또한 팔짱을 낀 채 무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낙조가 하는 수 없이 손을 들어 둘 사이를 휘저었다. 시선이 끊기자, 무흠은 꽉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들은 그대로 해석하면 되는 거지. 변종 식으로 대화했다고.”

“제가요?”

“그럼 누구겠냐.”

“……아니, 저는 사람 말만 했는데요. 홍해화한테서 그런 소리가 나지도 않았고요.”

“네 상황에선 그렇고. 밖에서 들었을 땐 변종 소리였어. 변종들이 모여 있을 때 나는 소리랑 비슷했지.”

낙조는 미간을 좁혔다. 그 어떤 생각도,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깊은 물에 잠긴 것처럼 몸까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 말을 받아들여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다시 자신만을 남겨 두고 흘러간 시간을 이해해야 했다. 자신의 기억만 어딘가 조금씩 어긋난 상황에선 아무리 우겨도 그게 사실이 될 순 없었다. 낙조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만 바라보다가 무흠을 향해 말했다.

“내가 변종 말을 했는데도 안 가둬 놓는 거 보면……, 그냥 내가 변종 말을 알아듣고, 얘기할 수 있다는 거네요.”

“그래. 단순하다.”

“그게 하루아침에 가능한 거예요?”

“고낙조. 홍해화를 구하러 빌라에 갔을 때, 네가 했던 짓 기억나나? 천장에 박힌 뿌리를 뽑으려고 했어. 언제 변종에게 잡힐지 모르는 상황에서.”

“…….”

“확신이 있었겠지. 그걸 뽑아야만 한다는 확신이. 근데 네가 스스로 판단한 건……, 아닐 테고.”

“……처음 보는 형태였으니까요.”

낙조의 시선이 서서히 선명해졌다. 스스로 답을 내린 듯, 목소리에도 점차 힘이 들어갔다. 무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홍해화 목소리가 들렸어요. 진짜 목소리…….”

“들을 수 있게 된 거다, 너도. 세성님처럼.”

무흠의 한 마디가 낙조의 몸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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