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두려워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1)
세성은 무흠에게 밤이와 지운을 데리고 나가라 말했다. 지운이 강하게 반발했으나 좋은 꼴을 보일 수 없었기에 낙조도 거들어 그를 내보냈다. 주변이 고요해지자, 세성은 평소와 달리 축축하게 젖은 눈으로 해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성에게선 찾아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무엇이 두려운지 식은땀을 흘리고,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행동들이 눈에 잡혔다.
“세성님.”
“왜.”
“괜찮으십니까.”
“니가 봐도 안 괜찮아 보이냐?”
“어…….”
“어는 반말이고.”
“오늘은 오만하지 않으셔서요.”
낙조의 대답에 세성이 비소를 흘렸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낙조를 응시했다. 시선이 맞닿는 시간은 몇 초도 되지 않았으나, 세성이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볼 때보다 불편한 느낌이 강하게 솟구쳤다. 표정이 절로 찡그려지는 줄도 모르고 가만히 버티고 있었다. 세성은 얼굴에서 웃음을 깔끔하게 거두고서 입을 열었다.
“네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신소미의 몸에 뭐가 들어갔는지 알겠다.”
세성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낙조는 따라 얼굴을 굳히고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세성은 잠깐 낙조의 옷깃을 잡아끌어 반대쪽에 딸린 방으로 데려가더니, 문을 닫은 후 말을 이었다.
“변이식물이 들어가서 신소미의 능력을 탐한 게 아니야.”
“……사람이죠?”
낙조는 묵묵히 지켜왔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세성의 눈이 평소처럼 잠깐이나마 반짝거렸다. 그는 눈동자만 살짝 굴려 닫힌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꼭 누군가 훔쳐 듣는 걸 알아챈 듯, 가만히 한 곳을 노려보는 시선은 살기를 번득이며 드러냈다.
“그래, 변이식물에게 먹힌 사람이 들어간 거야.”
세성은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낙조는 세성의 시선을 따라 문을 응시했다. 정적이 잠시 머물렀다가 떠났다. 세성이 낙조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서 물었다.
“마지막엔 피를 사용해.”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낙조가 목소리를 크게 내뱉었다. 세성은 미간을 좁힌 채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낙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손을 내려 낙조의 손등을 쿡 찔렀다.
“너의 피를 사용하라고. 지금 니 몸 안에 돌아다니는 피만큼 독한 것도 없을 테니까.”
“……홍해화에겐 아무런 영향도 없나요?”
“그거야…….”
낙조의 질문에 세성이 곧장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을 나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침대에 놓인 해화가 보였다. 세성은 마지막으로 방을 나가기 전 낙조와 눈을 마주쳤다. 어느 때보다 무게가 실린 시선에 낙조의 마음도 덩달아 굳어졌다. 딸칵. 밖에서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났다.
오롯이 해화와 낙조, 둘만이 남았다. 낙조는 의자 하나를 빼고 조용히 앉았다. 여전히 감긴 두 눈꺼풀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갈라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쉬지도 못하게 하고 해화의 힘을 사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낙조는 턱을 괴고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에 하나둘씩 떠올렸다.
변이식물에게 먹힌 사람이 혼이 구천에도 가지 않고 떠돌다가 홍해화 몸에 들어간 건가. 한시가 급해 세성에게 자세히 물을 순 없었으나 여태껏 보고 들은 이야기로 대략 추측할 수 있었다.
‘왜?’
앞서 제시한 상황이 사실이라면, 그 뒤에 떠오르는 생각은 그것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로 해화의 몸을 빼앗으면서까지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살아생전에 무엇이 그 혼을 그렇게 붙잡아 떠나지 못하게 했을까. 낙조 특유의 느긋한 시선이 해화에게서 닿았다가 떨어졌다.
“…….”
정말로 죽은 척을 하는 건지, 해화의 몸은 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억지로 깨울 생각은 없었기에 낙조는 잠자코 해화의 곁을 지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이 점차 풀리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쯤이었다. 가지런히 놓인 해화의 손끝이 움찔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낙조는 안경을 고쳐 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화의 손이 안쪽으로 모이면서 천천히 그녀가 눈을 떴다.
시선을 마주하자마자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다짜고짜 새벽에 자신의 방에 들어와 진짜 이름을 물었을 때의 눈빛이었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는 열에 달구어진 것처럼 이리저리 일렁였다. 낙조를 보자마자 해화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낙조야…….”
“…….”
“여기는 어두워서 싫은데.”
해화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꽤 높은 톤이었다. 낙조는 언제까지 이 꼴을 봐 줄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해화의 몸에 덮인 그것은 몸을 배배 꼬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깨를 조금 넘는 머리카락을 헝클이는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진짜’ 해화의 모습이 보인다면 공격할 수 없었기에 타이밍을 잘 재야 했다. 낙조는 그것이 두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
“야.”
“응?”
“재미없으니까 머리 굴리지 마.”
“무슨,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대화가 안 된다고, 너랑.”
해화는 미묘하게 얼굴을 구기면서 억지로 웃었다. 물론 낙조가 알지 못하는 해화의 표정이 있을 순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해화가 자신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니었다. 둘이 남기로 했을 때부터 대화로 이 상황을 풀 생각은 없었기에, 낙조는 오른손 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제 향을 퍼뜨리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서천은 땅속에 있고 주변에 몰린 변종들은 이미 다 처리했으니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낙조의 손끝에서 달콤한 향이 흘러나오자, 해화의 두 눈이 퍼뜩 뜨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녀가 침대에서 뛰어내리더니 낙조에게로 다가왔다.
“뭐야, 낙조 네가 준비한 거야?”
“…….”
“대화 안 하려는 이유가 다 있었네. 시간이 아깝긴 했겠다, 그지?”
해화가 허리를 굽혀 낙조의 손끝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돋아난 게 없는 손이지만, 그것은 뭐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달이 난 표정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낙조는 잠시 닫힌 문을 응시했다가 해화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주저하지 않고 낚아채기 좋은 순간이었다.
*
“왜 이렇게 안 나와?”
밖에서 안쪽의 소식만을 기다리던 밤이가 걱정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운 또한 해화가 걱정되는지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복도를 오가며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마지막으로 방을 나온 세성은 상황이 마무리되면 오겠다는 말만 남긴 후 어딘가로 가 버렸다. 할 일이야 워낙 많을 양반이긴 했지만, 낙조에게 모든 것을 맡긴 순간에 혼자서만 느긋한 모습을 보이니 밤이의 눈엔 여간 고까운 게 아니었다.
“문은 왜 잠그고 가서.”
자물쇠가 걸린 문고리를 바라보며 밤이가 문 가까이에 귀를 댔다.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밤이를 지켜보던 무흠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애 뒤치다꺼리하려고?”
“뭐래.”
“물가에 애 내놓은 마냥 굴고 있잖아. 그렇게 못 미더워?”
“이보세요. 믿고 말고의 상황이 아니야, 이건. 뭐에 씌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고낙조한테 다 맡기는 게 말이 돼?”
“어쨌든 못 믿겠다는 거잖아. 우리가 안 믿어 주면, 고낙조 스스로 이뤄 낸 일도 다 무용지물이야.”
처음엔 일방적으로 시비를 거는 줄 알았던 밤이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받아치다가 허리를 완전히 세웠다. 방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벽에 기대어 있는 무흠을 향해 몸을 돌리고서 밤이가 입을 열었다.
“어, 사실 너무 불안해.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쟤가 갑자기 사라지거나, 죽을까 봐 걱정돼. 자신감 있는 거, 보기 좋지. 용감한 모습도 보기 좋아. 근데 모든 상황에서 꼭 고낙조만 저렇게 나서야 하냐고. 우리는 그냥 믿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거뿐이냐고.”
“내 말의 맥락을 짚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고낙조를 믿어 주는 거라는 말이다. 괜히 방해해서 일 더 크게 만들지 말고.”
“방해? 당연히 안 하지. 그냥 갈수록 내가 쟤한테 완전히 의지할까 봐 걱정도 돼. 믿어 주는 것 이상으로 쟤한테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거든, 나는. 그러니까 걱정되는 거야. 사람은 너무 잘하려고 하다 보면 실수도 저지르는 법이야. 절망하고, 후회했다가,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일어서지. 일어섰다고 해서 무조건 잘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걸 고낙조가 몇 번이나 겪었는지, 당신은 생각해봤어? 누구를 지키려고 하다가, 살리려고 하다가……, 최악의 결과를 맞이했을 때 쟤가 얼마나 무너졌는지 당신이 직접 봤냐고.”
밤이는 또박또박 말을 내뱉다가 끝에 가서는 조금 울먹거렸다. 무흠의 앞에서 한 번도 먼저 돌리지 않았던 시선을 떼고 그녀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발갛게 뜬 눈을 보고서 곁에 있던 지운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운의 입장에선 밤이의 말이 더 와 닿았다.
믿어준다는 것, 중요하다. 누군가 나를 믿고 있다는 사실 또한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다만 그게 과해졌을 때 불러들일 수 있는 후폭풍을 항상 경계해야 했다. 믿음에 답하지 못하게 됐을 때, 실망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일어설 수 있도록 곁에 남는 게 낙조에게 필요한 힘이었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하지 마.”
“…….”
“당신은 당신대로 해.”
“…….”
“대신 쟤한테 실망했다거나 그런 말 하지 마. 아무도 고낙조한테 실망했다는 말, 할 수 없어. 쟤가 한 번이라도 자기 몸 아끼려고 한 적이 있었어? 없어. 멍청해 보일 만큼 착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려고 한다고. ……오히려 우리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뭘 손 놓고 지켜봐. 무슨 일 있을까 봐 걱정이라도 해야지.”
밤이는 용케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말을 마쳤다. 그러나 눈을 가득 채웠던 눈물은 눈꺼풀이 감기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볼을 타고 흘렀다. 무흠은 소리 없이 젖어가는 밤이의 얼굴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할 수 없었다.
무흠의 삶에선 여태껏 당연시됐던 것들이, 밤이의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부숴졌다. 서로 살아온 삶과 환경이 다른 건 당연했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과 자신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무흠은 밤이와 낙조 문제로 부딪칠 때마다 혼란스러워졌다.
서천에선 무흠의 말이 옳았다. 각자 위치에 맞게 할 일이 있었고, 그 일을 맡은 사람은 쉽게 의심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믿으면서 잘 해내리라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바깥 사회에서 했던 군대 생활도 비슷했다. 무흠은 병사 한 명 한 명을 잘 믿어 주는 선임으로 유명했다. 바닥에 깔려 있던 용기도 찾아서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흠의 그런 우직한 면을 좋아했다. 그랬기에 무흠은 낙조 또한 믿어 주는 게 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신뢰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면서. 얼마 전까진 자신 또한 낙조를 온전히 믿지 못했다.
그래, 처음 만났을 때랑 달라진 모습에 믿기 시작했지. 무흠이 눈물을 닦아 내는 밤이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바뀐 이유가, 사실은 낙조를 믿어도 ‘안전하다’라는 생각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낙조를 온전히 믿었다면 밤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용히 도와줄 수 있는 행동을 생각했겠지.
밤이와 얘기를 나누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무흠은 서천에서 길들인 습관과 생각에 하나둘씩 금이 가는 걸 느꼈다. 서로 모양이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억지로 끼운 것처럼, 항상 어딘가 모를 갑갑함이 느껴졌던 이유일 수도 있었다.
무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밤이는 숨을 고르면서 손바닥으로 눈가를 찍어냈다. 두 손이 금세 젖어갔다. 지운이 밤이의 곁에 서서 휴지를 챙겨 주었다. 밤이가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휴지에 코를 풀었다. 같이 먹먹해진 마음으로 밤이를 안쓰럽게 응시하던 지운이 문득 방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깍……깍깍, 깍.’
‘까까까깍. 깍.’
도연이 변이식물에게 잡혀간 이후 냈던 소리와 비슷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분명 해화와 낙조의 것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지운이 밤이와 무흠에게 손짓했다. 문을 가리키면서, 그는 ‘이상한 소리가 난다.’라고 속삭였다. 밤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문에 귀를 댔다.
*
손끝에 코를 대고 킁킁대는 동안, 낙조는 왼손에 힘을 풀었다가 해화의 목 뒤를 강하게 쥐어 끌어 올렸다. 낙조의 향에 취해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에 뜨인 것은 켁켁거리며 손발을 휘저었다. 낙조는 잠시 고민하다가 벽에 그것을 밀쳐 냈다. 머리에게 아무리 ‘눈앞에 있는 건 홍해화가 아니다’라고 인식시켜도, 눈에 보이는 얼굴은 해화였기에 쉽게 손을 대기 힘들었다.
“거봐. 너 아무것도 못하잖아…….”
그것은 해화의 얼굴로 축 늘어진 소리를 냈다. 그리곤 몸을 잘게 흔들며 킥킥 웃어 댔다. 여전히 낙조의 손에 목이 잡힌 채로.
생각보다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체취를 내보내 껍데기에 달라붙은 것을 어느 정도 밖으로 꺼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낙조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그것은 도통 나오려 하지 않았다. 낙조는 한 손에 잡히는 해화의 얇은 목을 함부로 누르지 못하고 입안으로 혀를 깨물었다. 여기서 자신이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으면 해화는 물론이고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그게 편해, 낙조야.”
“도대체……, 내 힘으로 뭘 하고 싶어서, 홍해화를 괴롭혀.”
“이렇게 안 하면……, 낙조가 힘을 주지 않을 거잖아?”
“야.”
“…….”
“적당히 까불어. 내가 일부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니까.”
무언가를 할퀴듯 날이 선 목소리가 낙조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낙조는 그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후 오른손에 힘을 주어 손끝에 가시를 세웠다. 곧장 그 가시로 왼손 손바닥을 세로로 길게 긋자, 스멀스멀 상처 위로 검붉은 피가 피어올랐다. 손가락을 타고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낙조의 피를 본 해화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조금 전과는 달리 주춤거리며 뒤로 몸을 빼는 모습에 낙조가 차디찬 시선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