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지는 것 모두가 꽃이 될 수 있다면 (5)
“다행이긴 하네요.”
자신이 내려오기 전까지 해화의 꽃봉오리를 둘러싸고 있었던 밤이는 낙조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아무리 이파리를 벗기려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천장이 무너지면서, 낙하물에 깍리진 않았을까 걱정했던 낙조는 시름을 덜었다.
“더 움직일 힘은 없을 거예요. 건물 하나를 집어삼킬 만큼 힘을 뺐으니까.”
“이대로 차까지 들고 갈 수도 없는데……. 빼낼 방법은 없으려나.”
밤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서 꽃봉오리를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흠이 급한 대로 지운의 상처를 확인하는 사이, 낙조는 밤이의 곁에 서서 해화의 꽃봉오리를 무심코 툭, 건드려 보았다.
“어?”
분명 무흠과 밤이가 애를 쓰며 뜯으려 했던 이파리의 끄트머리가 움찔거렸다. 낙조의 손길 하나로. 밤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다시 꽃봉오리의 이파리를 쥐었다. 밤이의 손이 닿자마자 이파리는 다시 가운데에 모여 입구를 닫았다.
“이거 홍해화가 나 싫어한다고 결론 내도 되냐?”
“……큼, 그건 좀 억지 같아요.”
낙조는 헛기침을 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장 밤이가 곁눈질을 하는 게 느껴졌으나 굳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하진 않았다. 가벼웠던 분위기가 정적에 다시 가라앉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물이 발목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형체가 금방이라도 발목을 움켜쥘 것 같은 음습함이 느껴졌다. 낙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꽃봉오리를 응시하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누나, 제 뒤로 와요.”
“뭐하게.”
“…….”
“아, 알았어.”
밤이가 투덜거리며 낙조의 뒤로 물러섰다. 낙조는 밤이에게 지어 보이던 투명한 미소를 지우고서 다시 꽃봉오리 앞으로 다가갔다.
“홍해화.”
아직 해화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겠지만……. 낙조는 물끄러미 꽃봉오리를 내려다보며 이파리가 모인 곳에 손을 내밀었다. 동시에 손가락 끝을 튕기며 달콤한 체취를 흘렸다. 주변에 잠든 변종이 있을 것을 가정하에 내뿜은 아주 옅은 향이었다. 이파리는 전보다 더 강렬하게 반응했다. 봉오리 전체가 꿀렁거리며 진액을 몇 번 울컥, 내뱉더니 이내 침을 흘리는 것처럼 질질 진액을 토해 냈다. 밤이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꽤 많은 양의 진액이 꽃봉오리 주변에 고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꽃봉오리 안이 그제야 서서히 투명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해화의 그림자가 네 사람의 시야에 선명히 들어찼다.
―꺼내줘…….
빌라 안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낙조의 귓가를 맴돌았다. 낙조는 숨을 다잡고 일행들에게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나야.”
낙조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나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꽃봉오리가 반응하리란 건 확신했다. 해화의 의식을 짓누르고 있는 것도 결국은 변종이었으니. 다만 그 변종이 아직 자신에게 목적이 있어 호의적으로 굴 것인지가 문제였다. 살짝 벌어진 꽃봉오리는 고민하는 것처럼 이파리의 끄트머리만 흔들었다. 낙조는 경계심을 꼿꼿하게 세운 꽃봉오리에게 더욱 가까이 손을 내밀었다. 낙조의 손끝에서 풍기는 향이 더욱 진하게 꽃봉오리를 감쌌다.
톡.
이파리 하나가 향에 이끌렸다가 중심을 잃고 낙조의 손바닥 위로 넘어왔다. 낙조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곧장 이파리를 꽉 쥐고 제어하고 있던 향을 조금 더 끌어냈다. 툭, 투둑, 투두둑……. 봉오리를 감싼 이파리들이 일제히 바깥쪽으로 벌어지며 안을 훤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밤이는 이파리가 낙조에게 기울 때부터 묵묵히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고작 하루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하루가 지날 때마다 낙조는 점차 다듬어지고 있었다. 세상에 튕겨 나가려고 하는 것도, 맞물리지 않는 세상을 등지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완벽히 망해가고 있는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이의 시선이 무겁게 벌어진 꽃봉오리로 움직였다.
진액으로 뒤덮인 해화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낙조는 한쪽 무릎을 굽혀 해화의 발목부터 살폈다.
“…….”
항상 푸르렀던 해화의 발목은 앙상했다. 누군가 불을 지르고 간 것처럼 까맣게 그을린 흔적이 눈에 띄었다. 낙조는 손끝으로 발목에 감긴 진액을 느리게 닦았다. 진액이 지나간 자리는 참혹했다. 숨결이라곤 전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뼈가 적나라하게 보일 정도로 피부가 벗겨져 나갔고, 안에서 굳어버린 핏덩이가 낙조의 손톱에 걸려 빠져 나왔다. 낙조는 지운이 해화의 발목을 보지 못하도록 그녀의 발목을 감싼 후 고개를 돌렸다.
“닦을 만한 거 있어요?”
“이걸로 닦아.”
밤이가 보호복 아래에 걸치고 있던 얇은 외투를 벗어 낙조에게 던졌다. 낙조는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 추워요? 후회 안 해요?”
“니 그딴 소리 할 시간에 닦고 차에 실었겠다.”
“누나는 과장이 너무 심해.”
밤이에게서 받은 겉옷으로 해화의 몸을 덮은 진액을 닦았다. 자신이 아니면 진액으로 감염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누구에게 미루지도 못했다. 낙조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심하게 파인 해화의 발목을 겉옷으로 덮었다. 그리곤 그녀의 등과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가볍게 안아 올렸다.
“가죠.”
지운의 애처로운 시선에 붙들리지 않으려 애써 무흠을 응시한 채 말했다. 응급조치는 끝났는지 무흠도 고개를 끄덕이곤 장리를 정리했다. 지운은 무흠의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났다. 밤이가 남은 짐을 들고 앞장섰다.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낙조는 차가 있는 쪽을 향해 걷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떨어져 나간 수많은 줄기와 이파리들, 그리고 흩뿌려진 건물의 자재가 눈에 밟혔다. 저곳도 누군가의 집이었을 텐데. 만약 돌아오게 된다면 어떡하지.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하다가 헛웃음이 샜다. 해화를 구했다고 해서 완벽히 그녀가 깨어난 것도 아닌데 마음의 짐을 너무 일찍 털어 낸 것 같았다.
밤이의 겉옷은 진액으로 뒤덮여 있었기에 반대로 뒤집어 트렁크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해화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미약하게나마 해화의 숨결이 느껴졌다. 낙조는 해화의 몸 위로 자신의 외투를 벗어 덮어 주었다. 모두가 말이 없었다. 차에 올라탄 후에도. 지운은 복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낙조는 안전벨트를 차고서 밤이를 힐끗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번잡하게 일어난 일들에 놀랐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사실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만약 지운이 상처를 더 크게 입었더라면, 자신이 구조물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었다면, 밤이나 무흠이 낙석에 부상을 당했다면……. 많은 경우의 수를 피해서 모두가 안전할 수 있었다. 해화를 무사히 구해내는 것까지.
―내가……, 잡고 있어.
저 목소리가 해화의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자신의 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일행을 신뢰하는 입장이기에 더욱 객관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했다. 낙조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창밖에 시선을 두고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댔다.
―나 좀 꺼내줘…….
목소리는 애타게 낙조를 불러 댔다. 처음엔 주변에서 귓가를 툭툭 건드리듯 돌아다니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었다. 목소리가 선명해지는 만큼 낙조의 신경도 덩달아 예민해졌다. 바로 곁에서 얘기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리니, 지나가는 풍경에 집중하려 해도 손끝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목 뒤가 섬찟했다. 소름이 바싹 돋는 것을 무시하려니 발끝에도 힘이 들어갔다.
돌아가는 길은 아주 고요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입을 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낙조는 눈을 돌리면 보일 것 같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두려웠다. 차 안에 함께 있는 것처럼 어디서든 자신을 보고 있는 듯했다. 꺼림칙하고 속이 메스꺼웠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앉은 자리가 너무나 불편했다.
서천에 거의 다다랐을 때, 밤이가 창문을 내리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곤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낙조에게 속삭였다.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냐. 홍해화 너무 무서워.”
“뭐가요?”
“넌 앞에 타서 모르나? 뒤에 엄청 추워 지금.”
밤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불편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마침내 서천이 있는 산 입구에 다다랐다. 길바닥 위엔 낙조가 처리했던 변종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차를 주차한 후 낙조가 다시 해화를 안아 들었다. 산을 오르면서 낙조는 곱게 감긴 해화의 두 눈을 내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아주 긴 잠에 빠져든 것과 비슷해 보였다. 해화는 지금 꿈을 꾸고 있을까, 아니면 어둠에 갇혀 있을까. 낙조는 종종 자신을 가두고 오열하게 만들었던 어두운 기억을 떠올렸다.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엔 당사자의 나쁜 기억만큼 좋은 게 없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억지로 마주하게 했을 때 사람은 쉽게 무너진다.
―빨리 나 좀 꺼내줘…….
과연 이 말이 해화의 목소리가 맞는지, 낙조는 서천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해졌다. 차에서 했던 말대로 해화가 간신히 변종을 붙잡고 있는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해화를 구해내는 게 맞았다. 기운이 다 빨린 얼굴로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연 무흠이 낙조를 불렀다.
“세성님에게로 가자.”
“저도…….”
“질질 짤 거면 오지 마.”
“안 울어요.”
곁에서 소심하게 손을 든 지운에게 무흠이 무심하게 쏘아붙였다. 지운은 약이 오른 목소리로 받아쳤다가 복부의 통증에 다시 허리를 숙였다. 밤이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무흠에게 앞장서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이내 무흠이 세성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뗄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풍겨 올라오는 것 같았다.
똑똑.
“왔어?”
웬일인지 세성은 흰 도포를 입고 있지 않았다. 다른 이들과 다름없는 깔끔한 옷차림에 무흠을 제외한 모두가 잠시 얼어 있었다. 세성은 그런 시선이 익숙한지 별로 신경 쓰지 않고서 낙조의 품에 안긴 해화를 보고 빙긋 웃었다.
“잘 데려왔네.”
낙조는 주춤거리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무흠의 뒤에 바짝 붙어 들릴 듯 말 듯 속삭여 물었다.
“세성님 옷 왜 안 입었어요?”
“빨았나 보지.”
“아…….”
굳이 이유가 있는 건 아니구나. 낙조는 머쓱해진 얼굴을 감추고서 세성이 준비해 둔 평평한 침대 위에 해화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작게 딸린 화장실에서 손과 팔에 묻은 진액을 닦고 나오니 분위기가 한층 가라앉은 게 느껴졌다.
“시간이 많지 않아.”
“죽는……, 죽는 거예요?”
“아니. 깨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단 말이야. 고낙조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긴 한데……, 저 녀석이랑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 이 아이를 누르고 있는 건 원래 몸에 있던 식물이 아니라 다른 놈이야.”
세성은 해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녀를 세세히 관찰하는 듯 눈동자가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 낙조는 산에 올랐을 때, 해화가 노래를 부른 후 사라진 날을 떠올렸다.
“한 번……, 잠들지 않은 나무 같은 것에 끌려간 적이 있었어요. 그 뒤로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는데, 아마 그때 잡아간 변종이 아닐까요.”
“그러면 말이 되지. 여태껏 한 번도 말썽을 일으킨 적 없던 식물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숙주를 이용할 이유가 없거든. 그리고, 봐. 발목이 아예 썩었어. 원래 몸에 있던 식물을 완전히 죽이려고 했던 거야. 숙주를 독차지하고 싶었던 거지.”
―낙조야, 꺼내줘. 빨리. 나 시간이 없어. 시간이 없다고 말했잖아…….
“세성님, 들리세요?”
“…….”
―나 정말 이제 힘이 없어. 부탁이야, 제발……. 씨발 꺼내 달라고 개새끼야! 네 머리통에 가시를 꽂아 뇌수를 다 빨아먹기 전에!
“분명 저한테 원하는 게 있어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변질 된 해화 목소리로 된 환청을 듣고서 낙조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이들은 듣지 못했는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세성은 문드러진 해화의 발목을 응시하다가 소매를 걷어 해화의 닫힌 눈꺼풀을 뒤집어 보았다. 위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고도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성은 손을 떼고 뒤늦게 대답했다.
“알 것 같아? 너한테 뭘 원하는지.”
“서천에서 도망가기 전, 홍해화가 반복적으로 제게 물어봤던 질문이 있어요. 내 진짜 이름이 뭐냐고. 환인이 맞냐면서. 이름을 알면서도 물어본 게, 어쩐지 제가 스스로 이름을 말하도록 상황을 만드는 것 같았단 말이에요. 그게 아마……, 홍해화의 몸을 빼앗은 방법과 같지 않을까 싶어요. 홍해화는 식물과 대화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이름을 실토하게 만든 거예요. 그리고 그 능력을 사용하면서 뭔가를 느꼈겠죠. 능력을 사용하면서 홍해화의 기억도 읽었을 테니……, 제가 가진 힘이 탐이 날 수밖에요.”
“용케 알아냈네. 잘했다.”
“제 힘을 이용해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가 중요한데……, 일단 세성님. 애초에 변종이 그런 자아를 가지고 인간의 힘을 착취하는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겁니까?”
“모든 생명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죽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태어나자마자 먹이사슬에 속하게 돼. 본능이라고 하기보다 이놈이 이상한 거다. 자세한 건 켈리, 그 여자가 깨어나야 직접 들을 수 있겠지만.”
세성의 대답에 낙조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아무 걱정도, 시름도 없는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해화의 얼굴 안에 도대체 무엇이 날뛰고 있는 건지 당장이라도 뿌리를 들춰내 알고 싶었다.
“세성님, 이전에 저한테 그러셨죠. 제가 구천에 떠도는 것들을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오냐.”
“저와 변종만 남겨두고 모두 나가 주세요. 지옥문을 열어보겠습니다.”
결연한 낙조의 목소리가 방 안을 짙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