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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초-154화 (154/202)

154화. 지는 것 모두가 꽃이 될 수 없다면 (4)

무흠이 자신의 손목을 쥐고 뛸 때부터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발을 뗄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은 일어나서는 안 될 상상을 꺼내 자신의 눈앞에 흔들어 대곤 했다. 죽기 전 발악을 하는 듯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줄기들을 짓밟고 넘어가면서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밖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빌라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벽을 타고 오른 넝쿨이 하나둘씩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뭘 보고 고낙조를 믿자고 한 거야?”

밤이가 멍하니 빌라를 올려다보며 무흠에게 물었다. 곁에서 숨을 가다듬던 무흠이 무릎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고낙조가 저만큼 자신에 차 있는 모습 본 적 있나?”

“그걸 당신이 어떻게 구별해. 쟤는 가끔 영웅 행세를 하려고 들어. 그뿐이야.”

“사람……,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이제 바뀔 거다. 정확히는 고낙조가 바꿔 놓겠지.”

“그딴 말 그만 좀 해!”

밤이가 벌컥 소리를 내지를 때였다. 서 있던 땅이 우지끈, 하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밤이가 숨을 삼키면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낙조와 지운이 있던 맨 위층이 붕괴되고 있었다. 무흠은 황급히 밤이를 끌어당겨 도로 쪽으로 몸을 옮겼다.

쿠르릉, 투둑, 쿵. 쿵…….

천장이 무너지며 조각난 시멘트 덩어리가 밤이와 무흠이 서 있던 곳에 떨어졌다. 땅에 부딪히면서 박살이 나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밤이는 폭삭 주저앉은 맨 위층을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빌라를 감싼 것처럼 외벽을 칭칭 둘러싸고 있던 줄기와 이파리들도 순식간에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이게…….”

밤이가 황망한 목소리로 탄식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기둥이 함께 무너지거나 바닥이 주저앉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장이 무너진 걸 다행이라고 생각할 순 없었다. 밤이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곳에 떨어진, 낙석과도 같은 시멘트 덩어리를 다시 응시했다. 위쪽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항상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 자부했던 사람이더라도, 끝까지 아무렇지 않을 순 없었다.

“고낙조!”

“또 떨어질 수 있어. 조용해질 때까지 가만히 있지 그래.”

“뭐가 그렇게 뻔뻔해? 그래, 안 죽을 순 있어. 안 죽을 순 있어도 다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고낙조만 있는 게 아니라 홍지운도 있었어. 걔는, 걔는……!”

얼굴이 빨갛게 익을 정도로 소리를 높이던 밤이가 무흠에게 붙잡힌 팔을 뿌리쳤다. 지운의 이름을 말하자마자 속에서부터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목울대를 치고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밤이는 무흠에게 삿대질을 하던 손을 거두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허리에 두 손을 얹고서 아주 느리게 뱉어냈다. 밤이의 뒤에 선 무흠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는 고낙조 그렇게 살뜰히 챙기더니, 고낙조가 해결 못 할 것 같으니까 튄 거야? 아니면 회복력이 빠르니까 이 정도는 다쳐도 생각했어?”

“고낙조가 스스로 세운 계획을 방해하지 않으려 한 거야. 작은 일 하나로도 지 혼자 땅굴 파고 들어가서 삽질하는 놈이라고.”

“그 결과가 이거야? 어? 쟤 아직 서천이란 곳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모를걸.”

“하……, 결론만 말해 주지. 홍지운도 죽지 않았을 거야. 고낙조가 한 명 정도는 책임질 수 있으니까.”

“그 말이 지금 나는 열 받는다고 지금 말하고 있잖아! 왜 항상 고낙조가 해야 해? 서른도 안 된 애한테 갑자기 세상을 맡긴다는 게 말이 돼? 쟤가 다 하겠다고 하니까 만만한 거야?”

“대단한 변론가 나셨군. 고낙조랑 홍지운부터 찾고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네. 과연 고낙조를 내가 협박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서.”

“협박 같은 소리 하네! 너도 지금 확신이 안 서는 거 아니야! 쟤가 진짜 이 나자빠진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런 힘이 있다 해도 맡겨도 되는 건지 모르잖아!”

밤이의 마지막 말에 무흠이 옮기려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는 굳은 얼굴로 떨어진 조각난 시멘트를 바라보다가 침을 느리게 삼키곤 대답했다.

“확신할 수 없지. 나는……, 그런 게 보이거나 들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무흠은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 듯 우두커니 서서 떨어진 잔해들을 바라보았다. 곁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꼭 스스로에게조차 감추려고 했던 기억과 마주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때만큼 사람의 마음이 가볍게 움직일 때가 있나. 무흠은 두 주먹을 꽉 쥐더니 목을 빳빳하게 세웠다.

“그럼에도 믿어야 해. 난 그렇게 살아왔다. 모든 일이 잘 풀렸다고 할 수 없지만, 선한 마음으로 믿는 게 중요한 거야.”

“당신만 아는 말 지껄이지 말라고. 도대체 몇 번 말해야 해.”

밤이의 눈에 보이는 무흠의 모습은 그저 스스로를 충분히 변호하지 못해 아무 말이나 지어내는 사람이었다. 밤이는 무흠을 일부러 치고 지나가며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더 이상 빌라에서 무언가 더 떨어지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도로를 건너 빌라 쪽으로 가면서, 밤이는 어쩐지 썰물처럼 몰려드는 고독함에 울음을 꾸역꾸역 삼켜 내야만 했다.

무흠은 가만히 서서 밤이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엔 따뜻한 볕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무흠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마르다 못해 갈라진 입술을 꽉 깨문 무흠이 고개를 털고서 도로를 건넜다.

‘나한테도……, 저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서천의 어른들은 자애로워 보이지만 누구보다 엄한 사람들이었다. 처음 저지른 실수는 웃으며 넘어가나, 같은 실수를 할 땐 어김없이 크게 혼이 났다. 차기 장승으로 선택받은 날부터 무흠은 하루걸러 한 번씩, 서천의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낙조에게 함부로 죽지 않는다고 다짐하지 말라는 말을 한 것도, 몸을 소중히 하라고 한 것도, 사실은 무흠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얘기였다. 지금까지 지켜온 이들에게서 따뜻함 한 톨이라도 느껴 보고 싶었다. 굳이 낙조가 가여워서, 낙조의 능력이 서천에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무조건적으로 보호한 건 아니었다. 그런 말을 낙조에게 하며 자신의 응어리를 풀 수 있었기에 그랬다.

“……위에!”

밤이와의 거리가 조금 좁혀졌을 때, 무흠은 위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걸 느끼고 밤이의 어깨를 잡아 급히 끌어당겼다. 잔해더미를 둘러보던 밤이의 몸이 뒤로 넘어가면서, 아주 간발의 차로 밤이의 앞에 동그랗고 큰 무언가가 떨어졌다. 쾅, 하는 소리에 놀란 밤이가 무흠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

“……놔, 좀.”

밤이는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무흠의 손등을 툭툭 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윽박지르며 싸웠던 터라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곱게 나오지 않았다. 무흠이 곧장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밤이는 괜히 욱신거리는 것 같은 어깨를 매만지며 떨어진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아까 거실에서 봤던 그거랑 똑같은데.”

밤이의 말에 무흠이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곤 자세히 관찰했다. 아무리 공격해도 죽지 않았던 변종들과의 사투. 팔다리가 잘려도 바닥에서 버둥거린 변종들. 끊임없이 몸을 부풀리며 새 변종을 뱉어낸 꽃봉오리. 그녀의 말대로 위에서 떨어진 건 천장에 매달려 있던 그 꽃봉오리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것보다 커.”

다른 점은 크기에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것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몸을 부풀린다거나 움직이지도 않았다. 무흠은 내부를 단단히 둘러싼 이파리를 매만져 보았다. 끝이 둥글고 잎맥이 가지런한 이파리들이 손바닥에 감겼다. 곁에서 이파리를 들여다보던 밤이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이거, 이거 설마.”

“……?”

“총, 총으로 쏘면 안 될 거고, 칼, 칼은……, 칼은 홍지운 줬는데. 아씨, 왜 이렇게 단단해.”

허겁지겁 우악스럽게 이파리를 억지로 펴려고 하는 밤이를 보고서 무흠이 팔로 저지하며 말했다.

“안에 변종이 있을 확률이 커.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죽은 것 같은데―”

“―이거 못 알아보겠어? 홍해화 발목에서 나던 잎이잖아! 홍해화 거라고!”

밤이가 덜덜 떨며 외쳤다. 그녀의 말에 무흠이 시선을 돌려 둥근 이파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모른다는 것은 생각보다 현실에서 꽤 잔인한 사실을 알려 주기도 한다. 무흠은 이파리 모양을 확인하곤 말없이 위쪽에 몰린 이파리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얼마나 억센지 아주 살짝 벗겨질 뿐이었다. 오히려 힘을 쓰면 쓸수록 이파리가 더욱 단단하게 안에 매달려 있는 듯했다.

“죽은……, 건 아니겠지?”

곁에서 함께 이파리를 뜯어내려 하던 밤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흠은 애써 그 말을 무시한 채 이를 악물고 이파리를 쥐었다. 조금씩 벌어지기라도 하던 처음과는 달리, 끈끈이에 달라붙은 것처럼 이파리는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쿠구구궁, 우웅―

무흠마저 두 손을 이파리에서 떼려 할 때쯤이었다. 위에서 모래가 투두둑, 떨어져 머리와 어깨를 적셨다. 무흠은 위를 올려다보기도 전에 밤이의 등과 꽃봉오리 위로 몸을 던졌다.

*

“홍지운, 야……. 홍지운, 지운아.”

양손 모두 상처가 꽤 깊었다. 기운을 조금이라도 회복한다면 이까짓 시멘트 덩어리들은 멋대로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품에 안긴 지운의 무게가 자꾸만 낙조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빛도 들지 않아 지운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신을 보고 있긴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지운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며 대답을 듣는 것뿐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받아야 했다.

“나 괜찮아.”

“조금만, 조금만 참아. 알았지? 여기서 나가는 거, 아무 일도 아니야. 나한테 그런 거……, 아무것도 아니야.”

“아저씨.”

“어, 응. 왜, 많이 아파?”

“나 누나 보고 싶어. 홍해화……, 우리 누나.”

지운이 띄엄띄엄 말을 이어 갔다. 낙조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지운의 몸을 아프지 않을 만큼 끌어안았다. 오른손으로 피가 나오는 곳을 누르고 있긴 했으나 피가 도통 멈추지 않았다. 계속 뜨거운 게 울컥거리며 손바닥을 적셨다. 낙조는 덩달아 멍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봐. 홍지운, 홍해화 만나려면 눈 계속 뜨고 있어.”

“응.”

“그리고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지도 마. 기분 나쁘게.”

“아저씨 울어?”

“안 울어, 새끼야…….”

“아저씨 우는 거, 두 번째로 보네.”

지운이 힘겹게 말하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낙조는 지운의 어깨에 눈가를 비비고서 헛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근데 사람 진짜 쉽게 안 죽는다. 이래도 안 죽네.”

“너 그딴 말 할 거면 그냥 닥치고 있으라고.”

“아저씨 진짜……, 아니다.”

이곳에 오는 내내 불안해 보였던 지운은 낙조의 품에서 평온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말을 할 때마다 중간중간 앓는 소리를 내긴 했으나 피도 점점 멎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한 번 터진 눈물은 잘 멈추지 않아서, 낙조는 지운이 민망해할 정도로 몸을 떨었다.

“아저씨는 아저씨 덩치에 미안하다고 해.”

“…….”

“그리고 나도……, 약한 소리 해서, 미안해.”

지운이 몸을 웅크리며 중얼거렸다. 낙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 젖은 눈가가 따가웠다.

낙조는 울음을 멈춘 후 품엔 지운을 안고 남은 손으로 주변을 메운 시멘트를 매만져 보았다. 운이 좋았는지, 딱 지운과 자신이 누울 공간 정도의 틈을 준 채 천장이 무너진 듯했다. 아무리 비좁은 틈이라도 오른손 하나의 힘이라면 해낼 수 있었다. 낙조는 왼손으로 지운을 부축하고서 머리 위쪽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시멘트 조각에 오른손 손바닥을 댔다.

회복력이 아무리 빨라졌다고 해도 몇 분 사이에 뼈가 다시 완전히 붙을 걸 기대할 순 없었다. 왼손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화상을 입은 듯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지운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낙조는 오른손 손가락을 타고 느리게나마 퍼져 나가는 나뭇가지를 느끼면서 오른팔에 힘을 실었다.

우두두둑, 투둑, 구우웅.

마침내 지운과 낙조를 뭉개고 있던 천장의 일부를 완전히 쥐었다. 몇십 마리의 변종을 한 번에 터뜨린 적도 있으니 이 정도야 가뿐했다. 낙조는 숨을 들이마시면서 뒤로 기대고 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주변에 함께 쓰러져 있던 시멘트 조각이 점차 주변에서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단숨에 엎어 버릴 순 없었다. 분명 주변에 밤이와 무흠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제발 그들이 멀리 있길 바라며, 낙조는 상체를 꼿꼿하게 세웠다.

우르르르릉, 쿵!

얼마나 어둠에 갇혀 있었다고,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에 낙조와 지운이 눈을 찌푸렸다. 낙조는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시멘트 조각을 옆으로 치워 냈다. 다른 것들이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제야 숨이 터졌다. 탁 트인 사방이 눈에 들어왔다. 낙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지운의 상처를 확인했다. 그렇게 얕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눈물을 쏙 뺄 정도도 아니었다. 시선이 맞닿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너 이거 갖고 그렇게 온갖 신파를 떨었냐?”

“진짜 아파. 지금 이거 피 멎어서 그런 거야.”

“진짜 이 새끼가…….”

“아저씨 운 거 소문 내줘? 아직도 눈 빨간데.”

낙조는 속으로 온갖 욕을 씹어 대며 지운을 천천히 일으켜 앉혔다.

“내 목 잡아.”

“징그러워.”

“두고 간다.”

이번엔 지운이 말없이 낙조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최대한 맞닿지 않게 거리를 두고서, 낙조는 왼손으로 지운의 몸을 받친 채 오른손을 빌라 1층 쪽으로 뻗었다. 나뭇가지가 밑으로 내려가 단단히 중심을 잡았다. 무너진 천장을 밟고 난간에 선 낙조는 지운의 겁에 질린 비명을 들으며 단숨에 뛰어내렸다. 착지는 당연히 무사했다. 아주 살포시 바닥에 두 발을 디딘 낙조는 꽂힌 오른손을 거두면서 지운을 곧장 옆으로 내팽개쳤다.

“고낙조!”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밤이가 엉망진창인 화단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다정한 바람이 마음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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