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지는 것 모두가 꽃이 될 수 있다면 (3)
생각을 번복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밖에서 버티고 있는 무흠과 밤이가 얼마나 시간을 더 끌어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낙조는 자신의 피부를 태울 것만 같은 진액을 헤치면서 해화의 손목 근처까지 손을 뻗었다. 낙조보다 뒤늦게 들어온 줄기들이 낙조의 팔을 옭아맸다. 해화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어 놓으려는 듯한 움직임에 더욱 물러날 수 없었다.
“고낙조!”
이번엔 무흠이 낙조를 불렀다. 곧이어 총성이 들렸다. 여전히 딱딱거리는 변종의 듣기 싫은 울음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다친 이는 없는 듯했다.
‘도망칠 때만 해도 홍해화가 아니었어. 홍해화가 뭘 위해 이런 일을 꾸며.’
낙조는 자신을 꽃봉오리 밖으로 빼내려는 줄기들의 압박을 겨우 견디면서 이를 악물었다. 줄기의 힘은 견딜 수 있었다. 다만 해화를 완전히 밖으로 꺼낸 이후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 조금은 두려웠다. 예측조차 가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모두 안전할 수 있을까. 해화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해화의 상태에 잘 알고 있는 듯했던 세성이 왜 함께 오지 못했는지 알 수 없어 야속했다. 방법이라도 제시해 준다면 의심치 않고 무엇이든 했을 텐데. 낙조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해화의 손목을 눈앞에 두고서 숨을 다잡았다.
‘……뿌리를 뽑아내면, 홍해화도 죽나?’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낙조는 시선을 올려 천장에 틀어박힌 꽃봉오리의 밑부분을 자세히 살폈다. 줄기에 칭칭 감겨 잘 보이지 않았던 곳에 계속 눈을 두고 있자니 이내 얇고 굵은 뿌리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지금까지 만난 변종들의 뿌리를 뽑아냈을 땐 모두 더 움직이지 못하고 쓰러졌다. 만약 해화를 품고 있는 꽃봉오리가 본체라면, 뿌리를 뽑는 순간 밖에 있는 줄기와 변종들 모두 한 번에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범위 안에 해화가 포함됐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낙조를 주저하게끔 만들었다.
―뽑아……. 그래도 돼…….
낙조의 시선이 뿌리에 붙들려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적셨다. 낙조는 꽃봉오리를 감싼 줄기들을 뜯어내면서 꽃봉오리에 귀를 붙였다.
―뽑아야 해…….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불씨처럼 작고 여린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낙조를 재촉했다. 그 목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낙조의 양손이었다. 지시라도 받은 듯 바짝 힘이 오른 양손은 더 이상 해화를 쫓지 않았다. 자신의 팔을 옭아맨 줄기들과 함께 꽃봉오리 밖으로 솟아올랐다. 마침내 오른손이 완전히 빠져나오자, 꽃봉오리가 기다렸다는 듯 열린 곳을 닫았다. 쇠사슬로 입구를 막듯이 그곳을 칭칭 감싸는 데에 정신이 팔린 줄기들의 움직임이 눈에 읽혔다.
끈적거리는 진액이 오른쪽 팔을 타고 흘렀다. 뻗다가 만 나뭇가지와 가시마저 흠뻑 적신 진액은 생각보다 쉽게 떨어졌다. 낙조는 주변에 있는 줄기들이 온통 꽃봉오리를 가로막고 있는 데에 집중한 틈을 타 한곳에 뭉친 줄기를 밟고 위로 뛰어올랐다.
터덕, 텁.
굵직한 줄기를 겨우 붙잡은 채 천장에 매달린 낙조는 미끄러운 진액 때문에 잘 잡히지 않는 오른손을 뗐다. 왼손으로만 모든 무게를 감당하면서, 오른손은 줄기와 줄기 틈에 보이는 뿌리를 향해 있는 힘껏 박아 넣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줄기들이 다시 개미떼처럼 우수수 흩어지는 게 보였다. 자신의 몸을 붙잡으러 오기 전에 뿌리를 완전히 잡아채야 했다. 낙조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천장의 벌어진 틈을 타고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부터 굵직한 나뭇가지와 가시가 이어서 돋아나며 천장 깊게 자리 잡은 뿌리 뭉치를 붙잡았다. 다른 변종에게서 뽑아낼 때와는 다른, 어딘가 불쾌한 구석이 가득한 감촉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일단 나와! 끝도 없이 나온다고, 이 새끼들!”
“아저씨!”
밤이와 지운의 외침도 들려왔다. 낙조는 바들바들 떨리는 왼손으로 자신의 무게를 버티면서 뿌리를 가득 쥔 오른손을 아래로 조금씩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파스스, 시멘트 조각과 온갖 먼지가 떨어졌다. 잔기침을 몇 번 털어내고서 낙조는 잔뜩 성이 난 줄기들이 우후죽순으로 움직이는 걸 보고선 일행에게 외쳤다.
“먼저 나가요!”
“쟤 지금 우리 말에 관심도 없다니까?”
밤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무흠에게 말했다. 줄기에 낀 상태라 문이 열리지 않으니 부술 수밖에 없었다. 무흠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꽃봉오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젠 작은 덩치의 변종들을 보고서 총구를 아래로 겨눴다. 문틈에 짓밟힌 줄기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탄에 제대로 맞은 줄기가 몸부림쳤다. 무흠은 곧장 두꺼운 굽으로 줄기를 사정없이 내려 쳤다. 진액이 조금 튀긴 했으나 옷을 겹쳐 입고 나왔기에 피부에 닿을 일은 없었다.
푹, 푸욱, 콰직.
몇 번 더 줄기를 찍어 누른 무흠의 발길질에 줄기는 금세 반 토막이 났다. 무흠은 잘린 부분을 걷어치운 다음 문에 끼어 있는 것도 발로 쳐서 뒤쪽으로 밀어냈다. 힘줄이 끊긴 줄기는 더 힘을 쓰지 못하고 축 늘어진 상태였다. 단단하게 힘을 주지 못하는 줄기를 치워내자 문이 열렸다. 무흠을 비롯한 일행은 천장에 매달린 채 무언가를 뽑아내고 있는 낙조의 뒷모습과 마주쳤다.
“너 뭐해!”
“빨, 리……, 나가요!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
낙조가 아득바득 소리쳤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낙조가 붙들고 있는 곳에서 굳은 모래가 우수수 쏟아졌다.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콜록거리던 밤이는 이내 자신들을 쫓아 방으로 기어 오고 있는 변종을 보고서 총을 다시 쥐었다.
탕, 탕!
“너 하고 있는 게 뭔데!”
“……누나.”
“왜!”
“우리 누나야. 홍해화, 홍해화잖아.”
문이 열린 후부터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지운이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밤이는 실처럼 가느다래진 줄을 매달고서 다시 일어나는 변종을 발로 걷어차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지운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낙조와 줄기들이 가려 잘 보지 못했던 꽃봉오리였다. 거실에 매달린 것들보다 훨씬 큰.
“홍해화가 어디 있다고?!”
“저기, 저기 안에…….”
지운이 손을 들어 꽃봉오리를 가리켰다. 그때 순서를 지키지 않고 이리저리 정신 사납게 움직이던 줄기들이 천장까지 타고 올라갔다. 낙조는 반쯤 빼낸 뿌리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줄기들을 번갈아 보다가 눈을 감고서 완전히 뿌리를 끝까지 뜯어냈다. 손가락은 물론이고 손끝에서 뻗어난 나뭇가지와 가시에 칭칭 감긴 채 떨어져 나온 뿌리의 크기는 낙조의 키와 비슷할 만큼 커다랬다. 끝없이 펼칠 수 있는 손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뽑지도 못했을 게 빤했다.
툭…….
줄기가 자신을 향해 밀려 들어오기 직전, 낙조는 왼손을 펼치면서 바닥에 발을 짚었다. 그와 비슷하게 꽃봉오리도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나!”
꽃봉오리가 떨어지자마자 지운이 해화를 부르며 달려왔다. 그는 겁도 없이 꽃봉오리를 뜯어내려 하며 계속해서 해화를 불러댔다. 손톱으로라도 긁어내려는 모습에 낙조가 황급히 지운의 앞을 막아섰다. 꽃봉오리 안을 채운 건 화상을 입을 수도 있는 온도의 진액이었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천장에 있던 줄기들이 돌아서서 벽을 타고 내려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왜……, 움직이는 거지?’
뿌리를 뽑아내면서 완전히 끝날 거란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줄기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제야 낙조는 자신이 붙들고 있는 뿌리가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게 아니라는 걸 발견했다. 가느다란 뿌리 몇 개가 천장에서 빠지지 않고 있었다. 거실에 핀 꽃봉오리와 연결된 뿌리 같았다. 낙조는 작게 욕을 짓씹으며 지운을 등 뒤에 두고서 남은 줄들을 쥐고 힘껏 당겼다. 끊어 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뿌리가 뽑히지 않은 것들이 또 뒤를 치러 올 수 있었다.
“장승님! 누나랑 홍지운 데리고 밖으로 나가요!”
낙조가 우드득,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다가오는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무흠에게 외쳤다.
“무너진다고요!”
“…….”
낙조의 말대로 거실에 묶인 꽃봉오리들도 낙조의 힘에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줄기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저리 움직였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시멘트 모래도 더욱 많아졌다. 무흠의 눈가 옆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곁에서 낙조에게 밤이가 무어라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무흠은 왼손에 뻗은 갈퀴와 나뭇가지로 주변에 있는 줄기들을 쳐가면서 뿌리를 계속 잡아당기는 낙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따라와, 빨리.”
“뭐?! 놓고 가자는 거야 지금? 미쳤어?”
“여기서 버티다가 죽는 것만큼 쟤한테 민폐 끼치는 것도 없어.”
“지금 건물이 무너진다는데 두고 가자고? 고낙조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생각 안 해?”
“고낙조를 믿으면 우리가 나가서 살아야 한다고!”
방 안이 울릴 정도로 소리친 무흠은 곧장 밤이를 붙잡고 방에서 나갔다. 아무리 밤이라고 한들 거구의 힘을 뜯어말리진 못했다. 길을 가로막는 줄기들을 밟고, 총으로 쏘는 소리가 잇따라 들렸다.
“홍지운, 너도 빨리 따라가!”
해화가 갇힌 꽃봉오리 곁을 떠나지 못하는 지운을 향해 소리쳤으나 낙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정신없이 꽃봉오리를 뜯으려 하는 지운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 게다가 뿌리가 무언가에 걸린 듯 더 이상 당겨지지 않자, 낙조는 일단 이어진 뿌리들을 끊어 냈다. 그리곤 구렁이처럼 자신을 쫓는 줄기들을 유인하면서 다시 거실로 나아갔다. 빽빽하게 틀어박힌 봉오리들과 사지가 거의 잘려나간 변종들이 바닥을 펄떡거리고 있었다. 낙조는 수납장 위로 올라가 한곳에 모인 꽃봉오리를 붙잡고 매달렸다.
뿌리를 뽑아야 한다, 뿌리를.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앞서 시멘트를 뚫느라 닳거나 부러진 가시들이 채 회복하기 전 뿌리들이 벌려놓은 틈으로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뿌리에서 풍기는 악취가 코끝을 찔러댔다. 낙조는 숨을 참은 채 봉오리의 뿌리들을 꽉 쥐고서 오른팔에 온갖 힘을 쥐어짜 한 번에 뽑아냈다.
우두두둑, 펑……. 스스스슥.
질긴 뿌리들이 서로 엉킨 채 모여 있다가 결국 낙조의 힘에 이끌려 떨어졌다. 한곳에 모인 만큼 천장에 큰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 시멘트 조각과 모래가 낙조의 머리를 적셨다. 낙조는 황급히 방으로 돌아가 지운을 찾았다.
“개새끼야! 정신 차리라고!”
무흠이 호신용으로 주었는지, 단도를 꺼내든 지운이 이파리를 잘라내려 하고 있었다. 낙조는 곧장 손목을 쳐 칼을 떨어뜨린 후 지운의 어깨를 잡아챘다.
“홍지운!”
“또 누나 혼자 두고 도망 못 쳐!”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층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거실에 있던 봉오리 뿌리들을 빼낸 이후부턴 줄기들도 힘을 잃고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금세 시든 모양으로 내던져진 줄기들을 짓밟으며 낙조가 지운을 일으켜 세웠다. 진액에 가득 차 있는 해화의 꽃봉오리는 무턱대고 잘라낼 수 없었다. 서천으로 데리고 가는 게 최선의 방법일 것 같았다. 낙조는 큰 꽃봉오리를 감싸 들려고 했다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시멘트 모래더미에 몸을 움츠렸다.
“엎드려!”
낙조가 지운에게 외치며 왼손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이전에는 변종을 상대하기 위해 했던 행동이었다. 손바닥을 중심으로 다섯 손가락 끝에서 갈퀴와 나뭇가지가 위쪽으로 길게 솟아올랐다. 이윽고 양쪽으로 펼쳐진 나뭇가지는 금세 낙조와 지운, 꽃봉오리 위를 감싸며 맞물렸다. 나뭇가지 사이사이론 갈퀴가 단단히 틈을 메웠다.
얼마 되지 않아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에 낙조가 오른손으로 지운을 끌어당겼다. 손가락과 손등 위로 부서진 잔해가 엉망진창으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우르르르릉, 콰과광.
번개가 꽂힌 것처럼 엄청난 굉음과 함께 천장이 부서져 내렸다. 엄청난 무게를 가진 시멘트 덩어리가 나뭇가지와 갈퀴를 긁고 떨어졌다. 갈퀴는 용케 찢기지 않았다. 낙조는 지운을 끌어안은 채 간신히 눈을 떠 꽃봉오리를 바라보았다.
투명하여 그 속이 다 비쳤던 꽃봉오리는 불투명해져 있었다. 해화의 인영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놓인 상황에 당황하기도 잠시, 곧 무지막지하게 큰 시멘트 덩어리가 낙조의 방어진 위로 떨어졌다. 손가락이 단번에 부러지는 고통을 느끼면서, 낙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어둠에 먹힌 것처럼 그 어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낙조는 주먹부터 쥐어 보려 했다. 오른쪽은 천천히 손가락이 안으로 감기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었다. 그러나 왼손은 감각이 너무나 미미했다. 힘이 아래로 뻗어지는 것 같다가도 팔꿈치 밑으로 느껴지는 건 고통뿐이었다. 낙조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홍, 홍지운.”
보이는 게 없으니 지운의 위치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오른손으로 주변을 살피니, 정말 건물이 주저앉은 듯 사방이 시멘트와 고철 더미로 막혀 있었다. 빛조차 한 틈 들지 않는 곳이었다. 무흠과 밤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우주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낙조는 조금 더 목소리를 키워 지운을 불러 보았다.
“홍지운!”
“……아저씨.”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가 곁에서 울렸다. 낙조는 목소리가 흐른 곳을 향해 손을 더듬거렸다. 이내 지운의 머리카락이 손에 감겼다.
“괜찮아?”
“누나가 안 보여.”
지운을 살피려 손을 천천히 움직이던 낙조가 멈칫거렸다. 지운의 목소리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낙조는 지운의 몸에서 손을 떼 느리게 코끝으로 가져다 댔다. 지독한 쇠 냄새가 피어올랐다. 마음이 한순간에 음푹 꺼졌다. 낙조는 허겁지겁 지운의 몸을 당겨 안았다. 지운의 배 근처에서 따뜻한 것이 울컥, 흘러나왔다.
“꽃이 없어…….”
닿으면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로 지운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