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지는 것 모두가 꽃이 될 수 있다면 (2)
진액이 바닥을 뒤덮은 줄기 위로 징그럽게 흘러내렸다. 낙조는 현관문 입구를 막고 서서 오른손을 뻗어 나뭇가지로 빈 공간을 메웠다. 지운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셋. 둘…….”
“…….”
“뛰어!”
우르르르릉, 두두둑, 둑.
지운이 달음박질치는 소리와 함께 뒤엉켜 있던 줄기들이 지금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낙조는 가장 굵직한 줄기를 발로 짓밟았다. 줄기는 진액변종의 피부만큼 물컹거렸다. 무게를 조금 더 실으니 사람의 혈관처럼 불그죽죽한 줄이 보였다. 지운이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내려가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낙조는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줄기를 계속 밟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양쪽 손으로 힘이 비슷한 크기로 흘러갔다. 왼손에서도 나뭇가지와 얇은 갈퀴 이파리가 피었다.
쩌어어어억…….
오싹한 기분이 목 뒤를 감쌌다. 낙조는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을 올려 천장에 매달린 것을 바라보았다. 밟힌 줄기마냥 잔뜩 부풀어 오른 꽃봉오리들의 끄트머리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꽃을 피우듯 여러 갈래로 봉오리가 갈라지기 시작하자, 안에 가득 차 있던 진액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었다. ‘악어와 새’에서 나온 직후 찾아갔던 산.
변종인지 사람인지 모르는 시체들이 나뭇가지에 묶여 주렁주렁 허공에 달린 산. 도연이 잡혀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들었던 그때.
희미해질 것 같은 기억이 서서히 흩어졌다. 눈앞의 상황은 한층 더 선명해졌다. 진액을 한 번 울컥 뱉어낸 봉오리 하나에서 사람의 손으로 보이는 것이 미끄덩하며 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설마…….’
낙조의 두 눈이 빠르게 천장에 매달린 봉오리의 개수를 셌다. 거실만 하더라도 족히 여섯 개는 돼 보였다. 붙은 방까지 피어 있다면 두 배는 될 것이다. 봉오리의 크기를 봤을 때 변종 하나만 품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바닥을 가로지르는 줄기 때문에 문도 닫지 못한 채 대립해야 했다. 지운을 따라 줄기가 뒤를 쫓았으니 무흠과 밤이도 위로 올라오는 것이 쉽진 않을 게 빤했다.
‘홍해화……, 홍해화도 저 안에 있나?’
정작 이곳에 온 목적인 해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큰 봉오리와 벽면과 바닥을 뒤덮은 줄기에 가려 시야가 완전히 트이지도 못했다. 그 짧은 순간, 팔꿈치까지 빠져 나왔던 큰 덩어리가 많은 양의 진액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진액에 뒤덮인 것은 겉으로 보기엔 변이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해화가 봉오리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니 쉽사리 남은 것들을 뚫기도 쉽지 않았다.
“깍. 깍깍. 까깍깍.”
이해할 순 없지만 한 번은 들어봤던 소리. 시선은 곧장 바닥에 떨어진 사람의 형태에게 꽂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것이 어느새 고개만 바짝 쳐든 채 턱을 움직여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연이 붙잡힌 후 목각인형처럼 일정한 박자로 낸 소리와 같았다.
여전히 진액에 뒤덮인 상태라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순 없었으나, 남자인 건 확실했다. 낙조는 밟고 있던 줄기에서 발을 떼고 곧장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뒤로 넘어가서 흰 자밖에 보이지 않는 눈, 과각화로 많이 손상된 피부, 진액에 엉겨 붙어 느린 몸짓까지……, 모두 진액변종과 다를 바 없는 행색이었다.
“깍깍.”
그리고 변종이 내는 소리까지. 주저할 겨를이 없었다. 낙조는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솟은 가시를 바짝 세우며 변종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나뭇가지가 꺾이면서 가시 하나하나에 변종의 피부와 진액이 걸렸다. 일반 진액변종을 상대할 때보다 더욱 거북하게 느껴지는 촉감이었다.
“하, 씹…….”
작게 욕을 읊고서 손을 털자, 진액과 살점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만큼 물렀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이곳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다시 돌리자마자 얼굴 반쪽이 날아간 변종이 턱을 우악스럽게 벌리며 낙조에게 덤벼들었다. 어깨를 붙잡힌 채 몸이 뒤로 넘어갔다.
바닥을 가득 메운 진액이 낙조의 등에 달라붙었다. 오른손에 뻗은 나뭇가지로 변종의 입을 틀어막은 낙조는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신 후 무릎으로 배를 힘껏 걷어찼다. 머리와 마찬가지로 몸도 물컹거렸다. 쉽게 나가떨어졌던 변종은 다시금 고개를 바짝 쳐들고 턱을 딱딱 갈았다.
‘씨발 이거 뭐……, 죽지를 않는데?’
원래대로라면 머리가 반 날아갔을 때 쓰러졌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머리의 반이 흘러내린 상태로도 변종은 꾸역꾸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낙조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두려 할 때, 등에 둔탁한 것이 턱 하고 맞닿았다.
“……돌겠네 이거.”
변종이 나온 봉오리에서 또 팔 하나가 미끄러지듯 나오고 있었다. 낙조의 최악을 이미 읽기라도 한 듯 펼쳐지는 광경에 급히 오른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사방에서 퍼지는 진액 냄새에 감각은 무척 예민해져 있었다. 갈 곳을 잃은 것처럼 덜덜 떨리는 손의 움직임에 마른침을 삼켰다. 온 신경을 집중하는 데에 사용해야 했다. 아직 봉오리에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은 잠든 변종을 확인한 후 낙조는 이곳저곳이 부러진 몸을 이끌고 다가오는 진액변종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저거…….’
진액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며 시야에 들어온 게 있었다. 엉덩이 위쪽에 달린 가느다란 줄이었다. 나뭇가지도 줄기도 아닌, 전선처럼 생긴 그것은 자신이 나온 봉오리 안쪽에 연결돼 있었다.
‘생각보다 쉽네.’
어차피 육체는 조종당하고 있다는 상태다. 낙조는 가까이 다가온 진액변종을 다시 발로 걷어찬 후 뒤를 돌았다. 이제 막 두 번째 진액변종이 꾸물텅, 하고 바닥에 흘러 내렸다. 그것 역시 등에 끈끈한 줄이 돋아 있었다. 낙조는 나뭇가지가 펼쳐진 오른손으로 망설이지 않고 줄을 쥐었다. 곧장 가시에 걸려 끊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최악의 수로 상황이 전환됐다면, 이후의 최악도 상상했어야 했다. 낙조는 고무줄처럼 걸려 늘어나기만 하고 끊기지는 않는 줄을 보고서 오른손에 조금 더 힘을 가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온 녀석이 턱을 아주 빨리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박수를 치는 소리와 비슷했다.
꿀렁…….
입을 열지 않은 남은 봉오리들이 함께 몸을 울렁였다. 한 주머니에서 나온 것조차 처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꺼번에 쏟아진다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지운을 비롯한 일행이 언제 올라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해화가 이 봉오리 안에 들어 있다는 장담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을 돕지 않는 순간에 놓인 낙조는 갈퀴가 달린 왼손으로 턱을 딱딱거리는 진액변종의 허리를 잡아 눌렀다.
“깍…….”
귀를 울려 대던 갈채가 일순간에 멎은 듯 고요해졌다. 낙조가 쥔 부분은 줄과 육체가 연결된 곳이었다. 끊어내지 못한다면 조종당하지 못하도록 연결되는 곳을 끊는 게 상책이었다. 왼손을 천천히 떼자 변종이 비틀거리다가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낙조가 쥐고 있었던 줄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다만 봉오리 안쪽에 연결된 줄은 낙조의 공격을 느꼈는지 거세게 꿈틀거렸다. 확실히 잘라내지 않는 한 낙조의 공격은 그리 치명적이지 않을 테고, 의미 없는 행동만 반복하는 꼴이 된다.
‘홍해화……, 홍해화부터 찾자.’
낙조는 눈을 번득이며 이를 갈았다. 어차피 봉오리가 낳는 변종은 밖에서 마주치는 것들보다 공격하는 속도가 무척이나 느린 편이었다. 방에도 다른 봉오리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서 해화의 흔적을 찾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조는 깨어나려 하는 두 번째 진액변종의 줄기도 왼손으로 쥐어 굳게 만든 후 조금 열려 있는 문을 몸으로 밀쳐 열었다. 바닥과 문에 낀 줄기가 갈려 나갔다.
“헉……, 하…….”
줄기에 낀 문은 더 열리지 않았고, 도로 닫히지도 않았다. 낙조는 조금이라도 열린 문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낙조의 몸이 방안으로 쏟아졌다. 거실과는 달리 봉오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거실에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고개를 들려고 할 때 찐득한 진액에 발이 미끄러졌다. 자세히 살필 새도 없이 몸이 뒤로 넘어갔다. 진액은 금세 낙조의 온몸에 달라붙었다. 생각보다 진액은 따뜻했다. 낙조는 끈끈이에 붙은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위로 들어 올렸다. 진액에 붙잡힌 손은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움직이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었다. 양손 모두 진액에 처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씨발……, 씨발, 씨발, 이 개새끼들아!”
고작 진액 덩어리에 붙잡혀 몸까지 통제당하자 악에 받친 욕이 터져 나왔다. 낙조는 몸부림을 치며 진액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늪에 빠진 듯 점점 파묻혀 가는 느낌에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고낙조!”
“……누나?”
현관 쪽에서 목청껏 낙조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낙조는 가슴까지 뒤덮은 진액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벽을 타는 줄기 때문에 목소리가 들린 곳까진 시선이 닿지 않았다. 낙조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내쉬는 숨에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여기요! 방 안에!”
“야 이거 뭐야! 미친 개징그러워!”
“조용히 좀 가자고, 당신 미쳤어?”
“이걸 보고도 침착할 수가 있어? 이거 완전 번식 현장이잖아!”
아무래도 지운이 별 탈 없이 둘과 만났고, 함께 올라온 듯했다.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서로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밤이와 무흠의 목소리에 어쩐지 조금은 안심이 됐다.
‘집중하자. 집중해.’
낙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시선부터 확실히 잡기 위해 애썼다. 진액 덩어리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겁이 나서 눈앞에 놓인 커다란 봉오리를 살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제야 낙조의 시선이 다른 봉오리보단 투명하여 그 속이 비치는 이파리에 닿았다.
“…….”
봉오리를 감싸고 있는 이파리들은 어딘가 익숙했다. 동그란 외형에 가지런한 잎맥. 아주 어렸을 적 네잎클로버를 찾을 때 많이 보았던 토끼풀과도 비슷했다. 낙조는 동그랗고 큰 이파리들을 바라보다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해화의 잎이었다.
“야 얘네 어떻게 죽여!”
“……홍해화.”
“고낙조! 뒤졌어?! 대답해!”
밤이가 외치는 소리가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등 뒤로 누군가 문을 열려는지 줄기가 낡은 문 모서리에 긁히는 소리가 났다.
“아저씨, 아저씨?”
걱정이 물씬 묻은 목소리로 지운이 낙조를 불렀다. 낙조는 투명한 봉오리 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처음엔 변이 식물에게 붙잡힌 변종이겠거니, 했던 사람의 인영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히 모은 두 손발. 어깨를 조금 넘는 머리 길이. 물에 부유하는 것처럼 봉오리 안에서 둥실 떠 있는 인영은 해화의 것이었다. 낙조는 느리게 넘실거리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급히 고개를 돌려 지운에게 소리쳤다.
“나 괜찮아. 들어오지 마!”
“저 개새끼 살아 있으면서 대답을 안 해!”
“등에 붙은 줄, 줄! 자를 수 있으면 잘라요!”
지운에게 한 대답은 밤이의 꾸지람으로 돌아왔다. 낙조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그대로 전한 후 지운에게 다시 당부했다.
“홍지운,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 누나 옆에 붙어 있어!”
“방에도 있는 거 아니야?”
“들어오지 말라고!”
지운이 봉오리에 갇힌 해화의 모습을 봤을 때 어떤 마음을 먹을지,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낙조는 호흡을 길게 다스리면서 온몸의 힘을 빼냈다. 손을 몸쪽으로 끌어당기는 게 아닌, 손목을 거둔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발버둥 치며 난리를 피우는 것보단 나았다. 적어도 가라앉는 느낌은 들지 않았으니까. 시간이 조금 지체된다고 해도 괜찮았다. 무흠과 밤이가 거실을 살필 틈에만 나오면 된다. 어떻게든 자신의 몸에 빨대를 꽂으려는 이 진액 덩어리에서 일어나 해화를 구해야 했다.
‘왜 홍해화만 투명하지?’
상체를 거의 일으켰을 무렵 스쳐 간 생각이 있었다. 다시 원래 형태로 돌아온 양손은 진액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갈퀴와 가시를 굳게 내세웠다. 붙잡는 것에 실패했다는 걸 알았는지, 덩어리는 더 이상 낙조의 몸에 붙지 않고 그대로 물처럼 흘러 바닥에 고였다.
‘왜 여기만 꽃봉오리가 하나고?’
낙조가 진액에서 벗어나자 천장과 벽, 바닥을 들쑤시고 있던 줄기들이 황급히 한 곳으로 움직였다. 해화가 담긴 꽃봉오리를 향해서. 단 몇 발자국밖에 남지 않은 거리였다. 낙조는 몸을 던져 봉오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줄기를 붙잡았다. 줄기는 한 마리의 변종처럼, 온몸을 꿈틀거렸다. 손바닥 안으로 선연하게 잡히는 그 움직임은 발끝에서부터 오한을 느끼게 만들었다.
‘설마…….’
모든 의문점이 단 하나로 좁혀지는 순간, 낙조는 줄기가 들어가기 위해 벌어진 봉오리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봉오리 안은 자신이 갇혔던 진액의 따뜻함을 넘어서 손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아무리 화상을 잘 입지 않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그 고통까지 완전히 감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낙조는 타들어 가는 불에 온몸을 던지는 느낌을 받으며 해화의 손을 잡기 위해 팔꿈치까지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거 다, 네가 한 거 아니지? 홍해화, 네가 하고 있는 거 아니지?’
낙조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데일 것 같은 온도에 숨이 금세 차올랐다. 그러면서도 봉오리 안에 담긴 해화의 인영에선 시선을 떼지 못했다.
딱딱거리며 무언가 지시하고 말하는 듯했던 진액변종, 명령을 받은 것처럼 자신을 먹어 삼키려고 한 진액 덩어리, 홀로 투명한 꽃봉오리 안에 담긴 채 줄기의 보호를 받는 해화. 마지막으로 식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 그 모든 게 하나의 사실로 겹쳐졌다. 모든 곳을 뒤덮은 줄기가 태어난 곳은 해화의 꽃봉오리였다.